안동 김씨/贊成公(達行) 가문

김조순과 그 큰아들 김유근

추읍산 2009. 8. 22.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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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남구순 처 안동김씨(南久淳 妻 安東金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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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 김선평(金宣平)

 

김상헌(金尙憲)-광찬(光燦)-수항(壽恒)-창집(昌集)-제겸(濟謙)-달행(達行)

 

 20세 金達行

21세 履慶 履中  履基
22세 明淳 生父 履基 祖淳  龍淳
23세 興根  應根 弘根 左根 元根    逌根       生父 祖淳
24세 炳德 炳始 炳溎 炳冀 炳地  炳㴤
生父 弘根 
25세 宗圭 容圭 性圭 用圭  錫圭  定圭

 

  

 

 

 

김조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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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순(金祖淳, 1765년~1832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가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字)는 사원(士源), 호(號)는 풍고(楓皐), 시호는 충문(忠文)이며, 영의정을 지낸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4대손이다. 정조의 신임이 바탕이 되어 딸인 순원왕후가 순조의 왕비로 책봉되면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1]

 

 

 

목차 [숨기기]

 

1 생애

 

2 가족 관계

 

3 같이 보기

 

4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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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편집]

 

178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과 규장각 대교(待敎)를 지냈다. 1788년 규장각의 대교를 지낼 당시,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당쟁에서 중립을 지키며 당쟁을 단호히 없앨 것을 정조에게 주장하였다. 1792년에는 동지(冬至) 겸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직각(直閣)과 이조참의, 승지, 총융사, 양관대제학 등을 지냈다.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1802년에는 딸이 순조의 왕비로 책봉되자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었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어린 순조(純祖)를 도와 국구(國舅)로서 30년간 순조를 보필하여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였다.

 

 

 

1800년, 대왕대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에 의해 병조판서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에 비변사 제조가 되었으며 1801년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병환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1년 뒤인 1802년에 다시금 훈련대장과 호위대장에 제수되었으며 역시 같은 해에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에도 제수되었으나 두 차례의 사직 상소를 올려 윤허(允許)되었고 같은 해에 판의금부사에 제수되었으며 1811년에는 금위대장(禁衛大將)에 임명되었으나 세 차례나 사직상소를 올려 결국 윤허되었다.

 

 

 

1827년에는 관서 지방을 여행하다가 서하(西下) 지방의 열악한 민간 실정을 순조에게 보고하여 경외(京外)에 위치한 각 아문(衙門)들의 절미(折米)와 형정(刑政), 인사, 대동미 등의 폐단을 정리하게 하였다.

 

 

 

아래는 김조순이 환곡과 대동미의 폐단을 순조에게 보고한 내용 중 일부이다.

 

신이 이번 관서에 내려가 이미 백성들의 고통스러움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으니, 다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도의 구환(舊還)이 경외(京外) 각 아문의 절미(折米)를 아울러 계산하면 6만 9천 3백여 석이 되는데, 그중 3만 9천여 석은 유망(流亡)한 호구에서 받아야 할 것이어서 지적해 받을 곳이 없으며, 2만 9천여 석은 현재 있는 호구에서 받을 것인데, 이른바 현재 남아 있는 호구라는 것은 바로 신미년(辛未年)과 임신년(壬申年)의 난리 후에 미처 도망하지 못한 고아와 과부를 억지로 현재 있는 호구로 기록한 자들이니, 원호(元戶)와 비교할 수가 전혀 없습니다. 만약 법대로 징수해 받아들인다면 인족(隣族) 역시 조만간 화가 옮겨 올 것을 알기 때문에 의구(疑懼)하여 흩어질 마음을 두고 있으며, 심지어 풍년이라는 말을 원하지 않기까지 합니다. 이제 아무 이로움이 없는 빈 장부(帳簿)를 가지고서 포흠낸 환곡을 징수할 것으로 여겨 고할 곳 없는 자들로 하여금 더욱 독촉을 받게 하여 안도(安堵)했던 자들이 도리어 도망해 흩어지게 된다면 이미 차마 하지 못하는 정사가 아니며, 또 안정시키는 방도에 어긋납니다. 이는 묘당이나 방백이 경솔하게 거론할 것이 아니니, 신의 뜻으로는 주상께서 탕감하라고 특명하시어 한 도(道)의 잔민(殘民)과 실호(實戶)가 모두 조가에서 다친 사람을 돌보아 주듯이 하는 덕을 입을 수 있게 하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2]

 

 

 

1828년, 김조순의 아내인 청양부부인(靑陽府夫人)이 사망하자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를 보내 직접 조문하게 하였으나 김조순이 “처음에는 놀라고 송구스러워하다가 이어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으나 이는 국조(國朝) 수백 년 내에는 아직까지 듣고 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라며 사양하여 조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832년,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두 달 뒤인 1832년 음력 4월 3일에 사망하였다. 사후에는 충문(忠文)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으며 1년 뒤인 1833년 음력 4월에는 예조판서인 조만영(趙萬永)의 건의로 종묘(宗廟)의 정조대왕(正祖大王)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3]

 

 

 

그 뒤에도 경기도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과 이천의 현암서원(玄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생전에는 문장력이 뛰어나 초계문신(抄啓文臣)을 역임하였다. 그외에도 죽화(竹畵)를 잘 그렸던 것으로 전해지며 문집으로는 16권 8책으로 구성된 《풍고집》이 있다.

 

 

 

가족 관계  [편집]

 

(고조부)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

 

(아버지) 서흥부사(瑞興府使) 김이중(金履中)

 

(아내) 청양부부인(靑陽府夫人) 심씨(沈氏)

 

(장남)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 김유근(金逌根)

 

(차남)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김원근(金元根)

 

(장녀)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

 

(사위) 순조대왕(純祖大王)

 

(삼남)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 김좌근(金左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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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생략. 출처: http://ko.wikipedia.org/wiki/%EA%B9%80%EC%A1%B0%EC%88%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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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근

 

 

 

【성 명】 김유근(金逌根)

 

【생몰년】 1785(정조 9)∼1840(헌종 6)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경선(景先), 황산(黃山)

 

【시 호】 문정(文貞)

 

【저서·작품】 《황산집(黃山集)》, 〈오주고목도(五株枯木圖)〉, 〈괴석도(怪石圖)〉, 〈연산도(硏山圖)〉

 

【시 대】 조선 후기

 

【성 격】 문신

 

 

 

1785(정조 9)∼1840(헌종 6).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선(景先), 호는 황산(黃山)으로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아들이다. 서울 삼청동(三淸洞)에 백련사(白蓮社)라는 집을 짓고 거주하였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순조 10년(18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로 급제한 뒤 사서 · 검상이 되고 1817년 이조 참의, 1819년에는 대사성을 거쳐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이후 이조 참판 · 대사헌이 되었으며, 1826년에는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였다.

 

1827년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 도중 면회를 거절당한 전직 관리에 의해 일행이 살상되는 흉변을 당하여 부임하지 않고 돌아와 병조 판서가 되었다. 순조 30년(1830)에는 다시 한성부 판윤을 지냈으며 아버지가 사망한 뒤 군상의 실권을 잡아 판돈녕부사가 되었으나 중풍에 걸려 4년만에 죽었다.

 

시와 서화에 모두 능했으며 특히 갈필(渴筆)을 사용하여 지극히 간일(簡逸)하고 문기(文氣)가 넘치는 남종문인화(南宗文人怜)를 잘 그렸다. 유작으로 개인 소장의 〈오주고목도(五株枯木圖)〉와 〈괴석도(怪石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연산도(硏山圖)〉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황산집(黃山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憲宗實錄, 國朝榜目, 朝鮮金石總覽

 

【관련항목】 김병주() 이헌구(李憲球) 김정희(金正喜)

 

 

 

 

 

출전: 서울 六百年史

 

출처: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inmul/johoo/1/18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