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는 저의 6대조 참의공 김용순(諱 龍淳), 그리고 5대조 황산 김유근(諱 逌根)의 묘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개군면 향리 선영으로 통일되었지만 30년 전만 해도 저희는 그곳을 1년이면 여러 차래 다녔습니다. 이곳도 저희 가문 의 정신이 깃든 곳이기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이곳이 제2 선영으로 되었는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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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 2022, 8, 30
훗날 효지리 선영이 있기까지의 과정이 밝혀졌기에 그 부분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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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군면 향리 선영이 있었던 이후 1823년 4월 14일 6대조 참의공(諱 龍淳) 할아버지께서 별세하시어 묘소를 이곳에 모시고부터 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뒤 1832년(순조 32) 4월 3일 영안 부원군 김조순(諱 祖淳)이 별세하신 후 4촌 형님인 참의공 諱 龍淳 옆에 안장되셨다고 추리합니다. 1840년 12월 17일 운명하신 5대조 황산 김유근(諱 逌根)의 묘소도 이곳에 자리 잡습니다.
그러니 효지리 마을 쪽에서 보면 큰 길건너편 삼태기 안 같은 곳 좌측에는
6대조 참의공, 가운데는 추정하여 영안 부원군, 오른쪽에는 5대조 황산 할아버지의 묘소가 자리하였습니다.종가댁을 사랑하시는 부원군 할아버지의 뜻이 별세 이후에도 반영된 것입니다. (그러나 부원군 할아버지 묘소는 그 후 1841년(헌종 7)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로 이묘하고 효지리는 6, 5대조만 남게 되엇습니다.) 이후 과정은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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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의 이곳에서의 추억을 단편적이나마 떠올려 보고자 합니다.
남한강을 가운데로 약 30리 거리인 개군면 향리와 흥천면 효지리입니다. 이곳에서 1, 4 후퇴 때 많은 향리 마을 주민과 함께 이곳으로 피난오고 그 어렵던 시절을 함께 하였습니다. 그 시절 모습은 따로 기억하기로 하겠습니다. 저는 전쟁 중인 1951년 이곳에서 흥천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53년 개군면 향리 원래의 선영으로 복귀하였습니다. 흥천면 효지리에는 이성관 할아버지인 이영희씨가 계셨습니다. 저희는 할아버지를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할아버지께
저희와 그 어렵던 시절
생사고락을 함께하시고
전쟁은 끝나고 저희는
개군면 향리로 복귀하였습니다.
효지리 선영을
도맡아 관리하시고
양 선영을 수없이
왕래하신 할아버지!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유약한 아버지를 대신하시고
가문의 멍에를 짊어지신
어머니의
버팀목이 되시어
물심양면으로
저희를 도와주셨습니다.
할아버지의 유지는
양 가문이
사랑이라는 끈으로
결속되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하도록
당부하셨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소망처럼
양가문의 유대는
사랑이라는 끈으로 결속되어
손자인 이성관과 저희는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계속
아름답게 이어질 것입니다.
이 세상을 착하게 살다 가신
할아버지!
하느님 품 안에서
평안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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