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贊成公(達行) 가문

김조순의 시골집과 현암 서원

추읍산 2009. 8. 28. 16:01

시골집

이천시 백사면 현방리의 파출소 이웃에 있는 현방리 공원은 주민들의 작은 후식처이다. 그리고 이곳은 김조순이 만년에 마련하신 시골집이라고 판단된다. 이는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1, 양평군 개군면 향리와 여주군 대신면 초현리 선영에서 가까운 거리이고

2, 공이 중건하신 영원사(이천시 백사면 송말리)가 이웃하여 있으며

3, 한국금석문 종합 영상정보시스템의 김조순 신도비 해석문에는 공의 시골집에 대하여

-- 생략. 공이 현암의 시골집에 있을 때 둘째 아들(김원근)의 문과 급제(1826, 9, 7)  소식을 듣고도 즐거운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도리어 서신을 보내 힘쓸 것을 격려하기를 매우 준절히 하니 사람들은 분수에 넘치는 일을 경계하는 공의 뜻을 알고 크게 감복하였다. 이하생략. --

4, 여기에서 현암(玄巖) 은 검은 바위로 해석되고 이는 현방리의 우리말 이름인 검 바위와도 상통한다.

5, 현암 서원이 세위질 때 이곳이 김조순의 정신이 깃든 곳임을  참작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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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 인식되어 이에 의하여서 글을 씁니다.
김조순이 만년에 휴식하던 이곳 시골집은 1832, 4, 3 김조순 별세 1년 후에 현암 서원이 세위 진다. 현방리의 지명 유래는 “현방리 공원이 영안부원군(泳安附院君) 김조순(金祖淳)을 제향했던 현암서원(玄巖書沅)이 있었던 자리라고 기술하고있다.”


현방리에 현암 서원이 세위지게된 동기

김조순이 죽은 지 1년이 되자 “황려(黃驪, 여주)는 충문공의 장구(杖屨)와 의관(衣冠)을 간직한 곳이니 사당을 세위 달라.”는 관학 유생들과 지역 선비들의 상소가 있었다. 임금이 곧 원액(院額)을 내려주었는데 “현암(玄巖)” 이라 하였다. -- 인용: 여주군사 2권 p227 ---그때는 이곳이 여주군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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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서원[ 玄巖書院 ]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현방리에 있었던 서원. 1833년(순조 33)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조순(金祖淳)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같은 해에 ‘현암(玄巖)’이라 사액되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70년(고종 7)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典故大方

≪참고문헌≫ 太學志

백과사전 카테고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유적 > 유교유적 > 서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기관·단체 > 교육기관 >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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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06년 잠시 현암 서원 있었던 이천시 백사면 현방리 공원을 답사하였다. 이곳에서 현암 서원이 있었던 자리라는 표지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선사 시대의 돌 무덤 자리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나를 안내하고 있지 아니한가. 공원 초입에는 돌 무덤이 보이고 말입니다. 현방리 지명사에는 분명히 이곳이 현암 서원이 있었던 자리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어찌 된 일인가? 나는 다음과 같이 추리하였다.

 

그렇다. 이곳은 원래 청동기 시대에 고인돌이 있었던 자리다. 그 유적은 김조순의 시골집이 있은 이후에도 정원(園)안에 보존되고 있었다. 1833년 이곳은 현암 서원으로 되었다. 그리고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70년에 서원은 훼철되어 없어지고 고인돌은 그곳에서 그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오늘날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문화 유적 현장으로 보존될 것이다. 이곳 현방리 공원은 공원이라기엔 뜻밖에 작아 보였다. 그냥 하나의 작은 마을 사람들의 휴식 공간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잠시 그 옛날 180년 전의 이곳 모습을 생각하며 감회에 젖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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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支石墓] / dolmen]

- daum 용어백과 -


큰 돌을 몇 개 세우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은 청동기 시대 족장의 무덤.


고인돌(지석묘)은 큰 돌을 몇 개 세우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은 무덤으로, 청동기 시대에 지역을 다스리던 지배자(족장)의 무덤이다. 전 세계에 약 6만 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특히 우리나라에는 3만 기 이상이 밀집되어 있다.


[바둑판식(남방식) 고인돌]

네모난 구덩이를 파서 돌방을 만든 뒤, 땅 위에 고임돌을 놓고 그 밑에 커다란 덮개돌을 얹은 형태이다. 주로 한강 이남에서 발견되며, 화순 고인돌 유적지가 대표적이다.


[탁자식(북방식) 고인돌]

커다란 덮개돌 밑에 탁자 모양으로 받침돌을 놓고 시신은 땅 위에 두는 형태이다. 주로 한강 이북에 분포하며, 강화 고인돌 유적지가 대표적이다.


[개석식 고인돌]

땅에 구덩이를 파서 돌로 방을 만들고, 그 위에 고임돌을 놓지 않고 덮개돌을 덮은 형태이다. 남방식 고인돌과 모양이 비슷하며, 한반도 전역에 분포한다. 고인돌 가운데 숫자가 가장 많다.

 출처  http://homework.kids.daum.net/contents/contents_ency_view.php?contentsNo=2070801m5114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