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贊成公(達行) 가문

고조 할아버지 소산 김병주(小山 金炳㴤)

추읍산 2009. 8. 26. 16:45

 

시조 김선평(金宣平)

 

김상헌(金尙憲)-광찬(光燦)-수항(壽恒)-창집(昌集)-제겸(濟謙)-달행(達行)

 

 20세 金達行

21세

履慶

履中

 履基

22세

明淳 生父 履基

祖淳

 龍淳

23세

興根

 應根

弘根

左根

元根

  逌根       生父 祖淳

24세

炳德

炳始

炳溎

炳冀

炳地

 炳㴤

生父 弘根 

25세

宗圭

容圭

性圭

用圭

 錫圭

 定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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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4, 4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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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방목(國朝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3539])

 

주소를 붙여 클릭하였으나 뜨지 않아 복사하여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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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년 (辛亥 철종 2) 급제하셨는데 발견되어 싣는다. 이에 앞서 1850년(庚戌) 진사시에 합격한 바 있다.

  

 

고조 할아버지 소산 김병주(小山 金炳)

 

 

어머님께서는 고조 할아버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랜 관료( )생활에서 오는 엄격함, 불의를 용납 못 하시는 성품과  대쪽같은 고고한 성품이셨다고 합니다. 저희는 할아버지를 훈동 대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훈동 대신일까? 훈동에 사셔서 그렇게 부른걸까? 그렇다면 삼청동의 백련사에 사셨다는 기록으로 보아 언제인가? 훈동으로 이사하신듯 합니다. 당시에도 아주머니들이 광주리에 물건을 담아서 각 가정을 방문판매하는 그런 행상(박물장사)이 있었던가 봅니다.

 

 

 

하루는 떡을 파는 박물장사가 할아버지 집에 들어오다가 할아버지와 마주쳤습니다. 할아버지의 그 위엄에 놀란 그 박물장사는 머리에 인 광주리를 땅에 떨어트리고 혼비백산하였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그 떡 장사를 안심시키시고 땅에 흐트러진 떡을 다 사셨다고 합니다. 고조 할아버지의 이런 모습에 그 떡 장사 아주머니는 크게 감동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할아버지의 단면을 보여주는 구전입니다.

 

 

 

할아버지는 춘산 김홍근[春山 金弘根  1788(정조 12)∼1842(헌종 8)]의 둘째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종가댁인 증 좌찬성 김달행의 대를 잇기 위해 저의 5대조 황산 김유근에게 입후하였습니다.

 

 

 

우리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지탄합니다. 저는 이에 대하여 본 블로그의 2차 안동김씨 세도정치(1849~ 1863 철종대왕 시기)편에서 후손으로서 깊이 사죄드리고 나아가야 할 마음가짐을 밝힌 바 있습니다. 할아버지도 이 시기 출사한 분이니 세도정치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 문중에서 태어나지 않으시고 다른 문중에서 태어나셨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1863년말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여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종식시키고 고른 인재등용을 하였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면 흥선대원군 집권 이후 할아버지는 어떤 모습이셨을까요? 서울六百年史에서 그 모습을 옮겨보겠습니다.

 

 

 

김병주(金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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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김병주

 

【생몰년】 1827(순조 27)∼1887(고종 24)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범초(範初)

 

【호】소산(小山)

 

【시 호】 효문(孝文)

 

【시 대】 조선 후기

 

【성 격】 문신

 

 

 

1827(순조 27)∼1887(고종 2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범초(範初)이다. 좌의정 김홍근(金弘根)의 아들로 이조 판서 김유근(金逌根)에게 입후(立後)되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서울 삼청동 백련봉(白連峰) 부근에서 살았다.

 

 

 

1851년의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으로 오르고 이어 규장각 직각 · 대사성 · 홍문관 부제학 등 청직(淸職)을 역임하였다. 1859년부터 1863년까지 4년동안에는, 1861년 10월 20일과 1863년 1월 29일 두차례에 걸친 한성부 판윤 임명과 함께, 대사헌과 이조 참판 · 형조 판서 · 예조 판서 · 경상도 관찰사 · 좌참찬 등의 요직에 임명되어 안동 김씨 가문의 중추적 존재로 활동하였다.

 

 

 

1864년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뒤 그 집안은 권력에서 밀려 났지만 그 자신은 일시나마 병조 · 이조의 판서를 맡아 보기도 하고, 특히 1875년 9월과 이듬해 1월에 한성부 판윤을 중임하는 등 권력의 한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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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고종실록에서 정리한 흥선 대원군 집권 이후의 김병주의 출사 모습입니다.

 

 

 

 간추리면 고종 즉위년인 1663년 종첩집사, 고종 1년 향관,  고종 3년 형조판서, 판의금 부사, 병조판서, 고종 7년 형조판서, 예조판서, 고종 9년 형조 판서, 고종 10년 판의금 부사, 이조판서, 고종 12년 판의금 부사, 한성부 판윤. 고종 13년 한성부 판윤, 판의금 부사, 홍문관 제학, 고종 14년 의정부 좌참찬, 고종 20년 예문관 제학, 공조 판서, 1885년(고종 22) 판돈령 부사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할아버지께서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을 맞이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이를 군총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임오군란에 대하여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보기: 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7476&cid=46623&categoryId=46623


 

 

당시 저의 고조부 김병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을 옮김니다.

 

모두가 불안 속에서 하룻밤이 지나갔습니다. 날이 새고 아침 일찍 어느 벙거지를 쓴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대감 마님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저희들은 대감 마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하고 물러갔습니다. 어찌 됐든 불안한 나날은 계속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가솔들과 함께 잠시 피신하기로 하였습니다.

 

개군면 향리 선영 근처 여강(驪江 남한강의 여주군 경계안의 강)가인 개군면 앙덕리에는 황산 김유근 할아버지의 시골 별장이 있었습니다. 불안한 서울보다는 그래도 선영근처인 시골이 안전하다고 판단하신 것 입니다. 그리고 얼마 동안 여강가인 앙덕리에서 보내셨습니다.

 

 

 

1882년 6월 9일 발발한 임오군란은 그해 7월 16일 종식되었으니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군란이 종식되기전 시골에 머물 때에도 임오군란의 여진은 계속되었습니다. 군란의 여진중 어느때인가? 하나의 큰 무리가 앙덕 나루터로 집결하고 있었습니다. 또 한 번의 불안이 엄습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난 군중 무리에서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대감마님께 전해주십시오. 저희들은 강을 건너기 위해 이곳에 집결하고 있습니다. 그러하니 대감마님께서는 안심하십시요. 다시 한번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어떻거나 그들에게 소를 잡고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도강(渡江)하여 여주군 금사면의 이포리 쪽으로 향 했습니다. 이런 불안한 정황(情況) 속에서도 저희 가문은 안전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곧 상경하여 조정에 계속 출사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1883(고종 20), 6, 4 예문관 제학. 같은 해 7월 9일 공조판서.1885(고종 22) 종1품 판돈령 부사 직책을 받았다고 고종실록은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887년 임종하시기 1년 전인 1886년경 앙덕리로 낙향하신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는 심순택[沈舜澤, 1824~1906 |자:치화(穉華), 시호: 문충(文忠)]이 기록한 김병주의 가장, 시장(家狀, 諡狀)에서 晩年驪江之仰德村居 라고 쓰여있기 때문입니다. 고조부께서는 1887, 음 6, 12일 파란만장한 생을 여강가인 앙덕리에서 마감하십니다. 할머니는 초취부인에 증정경부인 평산신씨, 재취부인은 정경부인 파평윤씨, 삼취부인에 정경부인 풍천임씨입니다.

 

할아버지의 대하여는 책이나 인터넷상에서 할아버지를 지탄하는 글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흥선 대원군이 등장하는 TV 드라마에서도 할아버지는 그 모습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 집권 이후에도 계속 중요직책을 맡고 계셨던 것으로 보아 이는 할아버지의 깨끗함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묘소는 양평군 개군면 향리 선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