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김선평(金宣平)
상헌(尙憲)-광찬(光燦)-수항(壽恒)-창집(昌集)-제겸(濟謙)-달행(達行)
21세 |
履慶 |
履中 |
履基 | |||
22세 |
明淳 生父 履基 |
祖淳 |
龍淳 | |||
23세 |
興根 |
應根 |
弘根 |
左根 |
元根 |
逌根 生父 祖淳 |
24세 |
炳德 |
炳始 |
炳溎 |
炳冀 |
炳地 |
炳㴤 |
25세 |
宗圭 |
容圭 |
性圭 |
用圭 |
錫圭 |
定圭 |
하옥[荷屋은 金左根(1797~1869)의 號] 할아버지께 드립니다.
할아버지! 오늘은 큰마음 먹고 할아버지께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별세하신지도 142년이 흘렀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어머님인 풍산홍씨로부터 가문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 왔습니다. 60년 세도정치 그 말미를 장식하셨던 할아버지를 동경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5대조이신 황산(黃山 金逌根)할아버지와 연관하여 생각도 하였습니다.
세도정치라는 부정적 의미의 모든 굴레를 짊어지신 하옥 할아버지! 그러나 이는 저희 가문의 본모습이 아니었습니다. 1856(철종 7년)년 4월 10일부터 5일간 여주 목(驪州 牧, 지금의 여주읍)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집 1,000여 호가 소실되었습니다. 이때 아들이신 사영 김병기 할아버지를 여주로 급파하시고 가진 것 모두인 양곡 1,000석을 내놓아 휼민(恤民)들을 구제하였고 그들과 아픔을 함께하였습니다. 이것이 저희 가문의 참모습입니다. 저는 어머님으로부터 당신의 증 종손이신 세마 할아버지(金升鎭)께서 일본 강점기에 어렵게 사는 이웃을 위하여 나누는 봉사정신과 조상님을 향한 열절하신 사랑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습니다.
군국의 사무(軍國 事務)를 짊어지셨던 황산 할아버지로부터 그 기개(氣槪)와 가풍(家風)을 이어받으신 하옥 할아버지! 제가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내촌리 소일마을을 처음 찾은 것은 군 입대전인 1964년경 이었습니다. 여주군 흥천면 효지리 황산 할아버지 묘하에서 십리 정도로 가까운 곳인데도 늦게 찾아갔지요. 그때 신씨 할머니(승진 할아버지 후처)께서 종손이 왔다고 그렇게 좋아하시고 순서에 의해 하옥 할아버지, 당신의 아들이신 사영 김병기(思潁 金炳冀), 손자이신 김용규(金用圭), 증손자 김승진(金升鎭) 할아버지의 묘소, 그리고 나합 할머니 묘소까지 소개받고 참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어느 할아버지인가? 기일 이어서 현손(玄孫: 고손)이신 광한(廣漢) 아저씨는 못 오시고 마을에 일가 되는 분하고 제례를 올리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99칸 집의 규모나 주위의 풍광이 향리 선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곳! 그러면서 작은집이 큰집을 압도하는구나! 하는 쓸데없는 자괴심에 빠져들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좁은 제 소견 탓이었습니다. 조선은 김씨의 나라이지 이씨의 나라가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도정치(勢道政治)로 나라의 발전을 후퇴시켰다는 이런 저희 가문을 향한 질타 속에서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세칭(世稱) 안동김씨 60년 세도정치 그 중심에 저희가문이 있습니다.
永安府院君 金祖淳~黃山 金逌根~豊恩府院君 趙萬永~永恩府院君 金汶根~荷屋 金左根으로 이어지는 계보(系譜)를 보면서 오늘을 생각합니다.
저희도 많은 풍파를 겪었습니다. 약한 마음을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저는 황산(黃山) 할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린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옥 할아버지! 오늘날 저희 가문의 현실이 역사의 수레바퀴인가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급박하기에 모든 것에 앞서지 못하는 조상공경을 자탄하게 합니다. 양평군 개군면 향리 선영으로 옮겨진 황산 할아버지의 묘소와 비석을 끌어안고 어찌할 줄 몰라 좋아하시던 당신의 현손(고손)이신 광한 아저씨! 소일 선영의 그 크나큰 묘역의 잡초를 뽑기 위해 손잡이 용 쇠꼬챙이를 지참 얼마나 열심이셨는지 손가락이 꼬부라지신 아저씨를 생각합니다.
별다른 재주도 능력도 없는 제가 그래도 가정,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 장삿길에 나섰습니다. 행선지 중에는 소일도 포함됩니다. 하옥 할아버지! 그때 항아리가 유리뚜껑이 왔습니다. 사과차가 왔습니다. 하는 차량방송 소리를 들으셨지요. 할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열심히 살아라. 그리고 선영을 잘 지켜다오! 하신 말씀이 메아리가 되어 제 마음속에 박혀 버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냥 하나의 장사꾼으로 보았겠지요. 사영 할아버지가 부친인 당신 묘소를 지키고 만년을 보내 시기 위해 지었다는 99칸짜리 그 집 입구까지 갑니다.
세도정치라는 낱말에서 오는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를 덮어 씌워지신 하옥 할아버지! 그런 모습으로 평하는 글들을 수없이 봅니다. 저는 어머님으로부터 영안 부원군(김조순) 할아버지의 곧고 맑은 모습을 들었습니다. 지방을 잠행하시던 어느 날 할아버지는 그곳 지방관과 밥상을 마주하였습니다. 그 지방관은 보리밥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옆에서 맛있게 먹는 분이 마주앉은 분이 영안부원군 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 후 영안 부원군 할아버지의 이런 모습에 감동한 그 지방관은 크게 뉘우치고 훌륭한 관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2007년 만주의 지안에 있는 그 옛날 고구려 19代 王 광개토대왕릉을 답사하였습니다. 대왕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돌판 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돌판뿐 그 위에 있어야 할 대왕의 유골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광개토대왕을 생각하면서 하옥 할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저희 가문의 수호신으로 되신 하옥 할아버지! 하늘나라에서 평안히 쉬 십 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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