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贊成公(達行) 가문

의석 김응근(宜石 金應根) 할아버지

추읍산 2009. 8. 31. 09:32

 시조 김선평(金宣平)


김상헌(金尙憲)-광찬(光燦)-수항(壽恒)-창집(昌集)-제겸(濟謙)-달행(達行)


   20세 金達行

21세

履慶

履中

履基

22세

明淳

生父 履基

祖淳

龍淳

23세

興根

應根

弘根

左根

元根

逌根

生父 祖淳

24세

 

炳德

 

炳始

炳溎

 

炳冀

生父 泳根 

炳地

 

炳㴤

生父 弘根

25세

宗圭

容圭

性圭

用圭

錫圭

定圭


 

 

김응근(金應根) 

 

성 명】 김응근(金應根)

【생몰년】 1793(정조 17)∼1863(철종 14)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계경(溪卿), 의석(宜石)

【시 호】 청헌(淸獻)

【저서·작품】 《공산지(公山誌)》, 〈의열사비(義烈祠碑)〉(글씨)

【시 대】 조선 후기

【성 격】 문신


1793(정조 17)∼1863(철종 1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계경(溪卿), 호는 의석(宜石)이다. 참판 김명순(金明淳)의 아들이며 형 김흥근(金興根)은 영의정, 아우 김홍근(金弘根)은 좌의정을 지냈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순조 16년(1816) 사마시를 거쳐 음보로 1822년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다. 그후 외직으로 여러 군 · 현의 수령을 역임하였으며, 1857년 충청도 관찰사에 이어 내직으로 들어와 1860년 공조 판서에 올랐다. 이어 형조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당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힘입은 바 크다.

글씨에 뛰어나 평양에 〈의열사비(義烈祠碑)〉를 썼으며,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 《공산지(公山誌)》를 편찬하였다. 시호는 청헌(淸獻)이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哲宗實錄, 公山誌

【관련항목】 김병시(金炳始)

인용:  서울 六百年史

 

출처: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inmul/johoo/1/19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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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지[ 公山誌 ]


1859년(철종 10) 임정회(林挺會) 등이 편찬한 충청도 공주목(지금의 공주시) 읍지. 2책. 지도가 첨부된 목활자본. 간행은 1861년에 이루어졌다. 모두 6권으로 제1책에 권1·2·3이, 제2책에 권4·5·6이 실려 있다.


또한 권5는 구지인물질(舊誌人物秩)·신증인물문과(新增人物文科)·청백(淸白)·충훈(忠勳)·음사(蔭仕)·무직(武職)·연방질(蓮榜秩)·증기질(贈耆秩) 등으로, 권6은 효자질(孝子秩)·구지효녀(舊誌孝女)·신구열녀(新舊烈女)·추단질(追單秩)·제영(題詠) 등으로 되어 있다.


마지막에는 이 읍지 편찬에 관련한 인물들의 명단인 〈공산지명록 公山誌名錄〉이 있어 편찬자를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사족(士族)으로 임정회 등 상생(庠生) 10인과 오령(吳鈴) 등 향관(鄕官) 2인의 이름이 실려 있다.


제2책의 첫머리에는 당시 관찰사였던 김응근(金應根)의 서문이, 끝에는 이경부(李敬溥)·이정재(李定在)·임준상(林準相)의 발문이 실려 있다.


이 읍지는 공주의 사족들이 만든 사찬읍지로서, 매우 상세하고 항목이 세분되어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학교에 소장된 제기·서책·집물·기명 등을 따로 조목을 두어 기록한 것이나, 인물조를 10여 개 항목으로 구분한 것에서 그러한 점이 나타난다.


공해조에는 각 건물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칸수를 기록한 뒤에 목사로부터 관노·관비에 이르기까지 관원의 수를 기재하였다. 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1801년의 견역청절목과 민역청절목을 수록한 점도 독특하다.


견역청절목은 호적을 작성할 때마다 드는 지사가(紙寫價) 등 제반 비용을 백성들로부터 염출하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시행한 것인데, 운영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점과 새로운 대책, 그에 관한 절목을 모두 기록하여 놓은 것으로서, 조선 후기 지방 사회 구조와 운영의 일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자료이다.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밖에 이 읍지의 사본 ≪공산지≫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후대의 필사본 산질(散秩) ≪공산지≫와 발췌본인 ≪공산읍지발화 公山邑誌拔華≫가 규장각도서에, ≪진잠읍지 鎭岑邑誌≫와 ≪음성읍지 陰城邑誌≫가 첨부된 편자·연대 미상의 ≪공주감영읍지 公州監營邑誌≫ 1책이 장서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忠淸道邑誌

≪참고문헌≫ 湖西邑誌

≪참고문헌≫ 公州監營邑誌

≪참고문헌≫ 公山邑誌拔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문헌 > 고문헌 > 지지 > 읍지

 

출처: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i=235400

------------------------------------------------------------------------- 저의 군대생활(1965~ 1967)은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덕도리에 있었던 26사단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저희 군부대 건너편에는 하나의 작은 촌락이 있었습니다. 외출하였다가 우연히 마을에 들렸는데 조그마한 조선 개와 집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귀대하였습니다. 1965년 말쯤 첫 휴가를 나왔습니다. 군 생활을 이야기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여기서 소개해 드리는 김응근 조상님 묘역이고 그 옛날 개와집은 묘막이라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저는 귀대하였고 그리고 외출시에 그곳을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군인 부부를 만났고 여자분은 후손되는 일가분 이었습니다. 저와 같은 동자 돌림의 여자분이 출가하여 이곳에서 선영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곳에서 묘소가 있는 뒷동산에 올라갔습니다. 그곳에는 김응근, 김병시[근처 가납리(가래비)], 김용규 조상님 묘역이 자리하였는데, 저는 묘역을 돌아보고 참배하였습니다. 또한, 이곳은 어머니에게서 들어온 광한 아저씨의 부친이신 세마 김승진(洗馬 金升鎭, 金左根의 증 종손) 할아버지의 生家임도 알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 초 광한 아저씨는 청헌공 김응근(淸獻公 金應根) 종손이신 김도한 아저씨와 함께 향리 선영을 찾아오셨습니다. 6, 25전쟁 때 행방불명되신(당시는 한국에서 정착하셨습니다.) 도한 아저씨가 광한 아저씨와 함께 저희 집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지금은 도한 아저씨도 광한 아저씨도 운명하시어 뵐수가없습니다. 그곳 선영의 후손이신 김희동 형님과는 가끔 전화로 소식을 주고 받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