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贊成公(達行) 가문

효정공 김병지[孝貞公 金炳地] 할아버지

추읍산 2009. 8. 31. 14:33

 

시조 김선평(金宣平)


김상헌(金尙憲)-광찬(光燦)-수항(壽恒)-창집(昌集)-제겸(濟謙)-달행(達行)


   20세 金達行

21세

履慶

履中

履基

22세

明淳

生父 履基

祖淳

龍淳

23세

興根

應根

弘根

左根

元根

逌根

生父 祖淳

24세

 

炳德

 

炳始

炳溎

 

炳冀

生父 泳根 

炳地

 

炳㴤

生父 弘根

25세

宗圭

容圭

性圭

用圭

錫圭

定圭

 

김병지(金炳地)

1830(순조 30)∼1888(고종 25).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백령(伯靈). 할아버지는 조순(祖淳)이며, 아버지는 원근(元根)이다. 1854년(철종 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관직에 나아갔다.


1863년 형조참판에 올랐고 이듬해 고종 때에는 실록청의 지실록사(知實錄事)가 되어 ≪철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867년(고종 4) 도승지를 거쳐 그해 9월에는 한성부판윤, 그해 10월에는 공조판서가 되었다. 1875년(고종 12) 형조판서를 거쳐 그해 12월에는 청나라에 대한 반송사(伴送使)로 임명되었다.


1876년(고종 13) 다시 공조판서를 거쳐 수원부유수의 외직에 나아갔다. 2년간 수원부유수로 근무한 뒤 1878년(고종 15) 12월에는 함경감사 김세균(金世均)과 자리를 바꿔 함경도감사가 되었다. 함경감사로 있는 동안 개항장이 된 덕원부(德源府)의 원산항문제를 덕원부사 김기수(金綺秀)와 함께 조정에 일일이 보고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때 김병지가 올린 장계에는 덕원부 원산항 개항을 전후하여 일본상인 및 거류민들에 의해 빚어지는 경제적 침투과정이 드러나 있다. 1881년(고종 18)에는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참고문헌≫ 純宗實錄

≪참고문헌≫ 承政院日記

≪참고문헌≫ 日省錄

≪참고문헌≫ 備邊司謄錄

≪참고문헌≫ 國朝榜目

≪참고문헌≫ 韓國故事大典(金舜東 編, 回想社, 1969)

≪참고문헌≫ 高宗時代史 1·2(國史編纂委員會,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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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56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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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 부원군 김조순의 손자이시고 그 대통을 물려받으신 효정공 김병지(孝貞公 金炳地) 할아버지는 부친인 취정 김원근 조상님을 닮아 조용하고 깨끗한 삶을 사셨습니다. 1854년(철종 5)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관직에 나아가신 할아버지는 철종 대왕 재위기간(1849~ 1863) 안동 김씨의 위세가 대단하였음에도 부친이신 취정 김원근 조상님을 닮아 조용하고 성실한 출사(出仕) 모습을 보이십니다.


이는 1863년 말 흥선대원군 집권 이후에도 계속 출사하신 기록으로 보아 이 또한 할아버지의 정직, 성실함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효정 김병지 조상님은 1888년(고종 25) 운명하신지 얼마후 같은 해인 11월 7일 공조판서 김병지에게 효정(孝貞)이라는 시호(諡號)를 고종 임금님으로부터 받습니다. 김병수(金炳洙)의 아들인 김석규(金錫圭)로 하여금 대를 이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