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贊成公(達行) 가문

고조부의 생부이신 춘산 김홍근(春山 金弘根)

추읍산 2009. 8. 30. 16:34

 시조 김선평(金宣平)


김상헌(金尙憲)-광찬(光燦)-수항(壽恒)-창집(昌集)-제겸(濟謙)-달행(達行)


   20세 金達行

21세

履慶

履中

履基

22세

明淳

生父 履基

祖淳

龍淳

23세

興根

應根

弘根

左根

元根

逌根

生父 祖淳

24세

 

炳德

 

炳始

炳溎

 

炳冀

生父 泳根 

炳地

 

炳㴤

生父 弘根

25세

宗圭

容圭

性圭

用圭

錫圭

定圭

 

【성 명】 김홍근(金弘根)

【생몰년】 1788(정조 12)∼1842(헌종 8)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의경(毅卿), 춘산(春山)

【시 호】 문익(文翼)

【시 대】 조선 후기

【성 격】 문신


1788(정조 12)∼1842(헌종 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의경(毅卿), 호는 춘산(春山)이며 이조 참판 김명순(金明淳)의 아들, 영의정 김흥근(金興根)의 형으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위수(衛率)로서 순조 29년(1829)에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다음 교리(校理)로 특진되고 순조 31년(1831)에는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승지 · 대사성 · 이조 참판 · 홍문관 부제학 등을 거쳐 헌종 4년(1838)에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그뒤 홍문관 제학, 이조 · 공조 · 병조의 판서, 우참찬(右參贊)을 지냈다.

이듬해(1840) 사헌부 대사헌으로서 풍양 조씨(豊壤趙氏)와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력다툼에 대한 시폐의 상소(上疏)를 올리고 병을 핑계로 사직하려 하였으나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에 기용되고 헌종 7년(1841)에는 좌의정에 승진되었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國朝人物考, 名世叢攷, 韓國名門統譜

【관련항목】 김병주(金炳㴤) 김응근(金應根) 이헌구(李憲球)

 

인용: 서울 六百年史

 출처: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inmul/johoo/1/23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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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한 시대 큰 획을 그으신 세 분(춘산과 추사 그리고 황산 )의 각기 비친 오늘의 모습을 보면서 깊은 고뇌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떨쳐버릴 수 없는 필연으로 이에 저의 심경(境)을 적어 아래와 같이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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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산(春山 金弘根 1788-1842) 할아버지 그리고 모두에게 드리는 글

 

할아버지께서는 저의 고조(金炳㴤 1827-1887)의 생부(生父)이십니다. 그러니 혈통상 저의 5대조이십니다. 어느 곳에서 태어나시고 성장하셨는지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사셨는지는 묘표 등에 나와 있을 것인데 이는 연구하여야 할 과제입니다. 종가댁의 대통을 잇기 위해 사랑하는 둘째 아들을 황산(黃山 金根 1785-1840) 앞으로 입적시키신 할아버지를 사랑합니다. 할아버지의 묘소는 북한땅인 개성에 있어 지금은 가 뵐 수도 없으니 어서 조국이 통일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춘산 할아버지는 1832년 영안 부원군(金祖淳 1765-1832)께서 별세하신 이후 황산 할아버지와 함께 출사 하시고 찬성공(贊成公(達行) 가문을 이끌었습니다. 어렸을 적 어머니의 말씀을 되살리면, 하루는 춘산 할아버지께서 저희 집(황산 김유근의 집)을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시대를 구성하자 면 1820년(순조 20) 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때 황산은 추사와 단짝 친구가 되어 추사댁 별서인 검호(黔湖) 동장(桐莊)에서 초의선사, 김재원(金在元), 김경연(金敬淵)등과 교환(交歡)했다고 합다. 이때 추사는 황산(黃山) 김유근과 절친한 벗이 되어 그의 대청(對淸) 창구기능을 했으니 청유(淸儒)들이 추사편을 통해 황산에게 대증(代贈)해 달라는 물목(物目)이 든 편지들을 계속 보냈다고 합니다. 그때 받은 물건중 하나가 아닐까요?]

 

 

그때 황산 할아버지께서는 호피(虎皮)를 갖고 계셨는데 이는 기물(奇物)을 좋아하시는 성품이 가져온 현상이 아닐까요?


 

혼자서 갖고 싶으셨는 아니면 대쪽같은 춘산 할아버지의 지적을 피하기 위함인지는 잘 모르지만 춘산 할아버지가 집에 당도하심을 들으신 황산 할아버지는 치워라, 치워 하고 명하시어 그 위기(?)를 모면하셨다고 합니다. 이는 두 분의 모습을 보여주는 구전(口傳)입니다.


그런 황산 할아버지께서 1837년(헌종 3) 중병으로 은퇴하시자 아직 젊으신 하옥(荷屋 金左根 1797-1869)할아버지를 품에 안으시고 순원왕후를 보좌하시면서 그 노고가 크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할아버지의 공명정대한 모습을 믿습니다. 그러나 1840년 7월 10일은 황산 할아버지께서 중병으로 실어증까지 겹쳐 운명하시기 다섯 달 전입니다. 그때 춘산 할아버지 모습이 자꾸 생각납니다. 10년 전 있었던 윤상도 옥사(尹尙度 獄事) 사건을 상소하시고 이로 말미암아 황산 할아버지의 절친한 벗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는 출사(仕)이 막히고 제주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애초의 뜻이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결과가 그렇게 되어 마음 아픕니다. 왜 윤상도 옥사사건을 재론하셨어요?


저는 1800년 순조 대왕께서 등극하신 이후 저희 가문과 추사 가문은 세교를 통한 유대가 더 밀착되었음을 여러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황산유고(黃山遺稿)의 서화정(書畵幀)을 통해서 황산, 추사, 이재의 우정의 깊이를 알았고 또한, 그리운 사람과 제추수백운도(題秋樹白雲圖)를 통해서 황산이 추사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추리(推理)하였습니다. 이러한 속에서도 양 가문 아픔의 굴절현상이 있었음은 유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그 가는 길에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풍랑이 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한계인 것을요.


춘산 할아버지! 세상 사람들이 아는 데로 할아버지와 추사의 얽힌 사연이 꼭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의 진정한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진실로 다가가려는 생각이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그러면서 더 큰 포용력으로 모든 것을 감싸 안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도 생각합니다.

 

하늘나라에 계신 할아버지! 그곳에서 춘산, 황산, 추사, 세 분이 만나시고 이 세상 살아갈 때 있었던 불편한 마음이 있었다면 무릎을 맞대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시고 오해를 푸는 계기를 가지시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간에 과정이야 어떻든 선(善)을 추구하는 마음은 같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늘나라에서 춘산, 황산, 추사 세 분의 아름다운 우정이 꽃 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


 프란치스코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생각하면서 이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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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조선왕조실록의 김홍근 졸기입니다.


헌종 9권, 8년(1842 임인 / 청 도광(道光) 22년) 11월 6일(경술) 1번째기사

판중추부사 김홍근의 졸기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홍근(金弘根)이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대신(大臣)은 그 기량(器量)과 식견의 굉위(宏偉)함과 마음가짐의 준엄함이 본시 어떠하였는데, 등용된 지 얼마 아니되어 포부를 펴지 못하였으며, 잠깐 사직함을 윤허하자, 서단(逝單)556) 이 갑자기 이르렀으니, 경탄(驚歎)하는 외에 어찌 슬픔과 아픔을 견디겠는가? 죽은 판부사(判府事) 김홍근의 초상에 상장(喪葬)의 제절(諸節)은 마땅히 예(例)에 의하여 거행토록 하고, 녹봉(祿俸)은 3년을 한하여 보내 주도록 하며, 사자(嗣子)는 탈상을 기다려 조용(調用)케 하고, 성복(成服)하는 날에는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하였다. 김홍근의 자(字)는 의경(毅卿)이니, 기국(器局)이 준엄 정제(整齊)하여 벼슬하기 전부터 사우(士友)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포포(布袍)557) 와 피천(皮薦)558) 으로 그 평생을 마치고 문학(文學)으로 자부하지는 않았으나, 그 공사(公私)의 문자(文字)를 지음에 있어서는 지적하고 진달함이 넓고 통창(通暢)하여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다하고서야 그치었다. 성품이 굉활(宏濶)하였고, 사리(事理)와 물정(物情)에 지극히 세밀하였으며, 벼슬에 오른 지 10여 년 만에 중서(中書)559) 에 들어갔으나, 그의 본뜻이 아니어서 주저하다가 사양하고 물러나 드디어 전시(展施)한 것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뜻은 크고 재능은 없으면서 망령되게 계략을 시도하는 것은 곧 성인(聖人)의 훈계하신 바 어리석으면서도 스스로 자신의 재능만 믿고 임의로 행동하면서 남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인 것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