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贊成公(達行) 가문

유관(游觀) 김흥근 조상님

추읍산 2009. 8. 31. 11:01

 

 시조 김선평(金宣平)


김상헌(金尙憲)-광찬(光燦)-수항(壽恒)-창집(昌集)-제겸(濟謙)-달행(達行)


   20세 金達行

21세

履慶

履中

履基

22세

明淳

生父 履基

祖淳

龍淳

23세

興根

應根

弘根

左根

元根

逌根

生父 祖淳

24세

 

炳德

 

炳始

炳溎

 

炳冀

生父 泳根 

炳地

 

炳㴤

生父 弘根

25세

宗圭

容圭

性圭

用圭

錫圭

定圭

 

            

 

김흥근묘갈


유명조선 의정부 영의정 치사봉조하 시 충문 안동김공 흥근지묘

배 증정경부인 심씨 부좌


공의 성은 김씨요, 휘는 흥근이고 자는 기경이며 호는 유관으로, 본관은 안동이다. 선조 휘 선평은 고려시대에 태사를 지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청음선생 문정공 휘 상헌께서 도학과 충의로 세상에 전해지면서부터 문곡 문충공 휘 수항, 몽와 충헌공 휘 창집, 죽취 충민공 휘 제겸 같은 분이 있어 나라를 위하여 충절을 다하다가 화를 당하기도 하였다. 증조의 휘는 달행으로 휘 이경을 낳았는데 모두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이경은 형인 목사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증직된 휘 이기의 아들 휘 명순을 취하여 양자로 삼았으니, 이조참판을 지내고 영의정으로 증직된 분으로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 증 정경부인 평산 신씨는 첨정을 지내고 좌찬성에 증직된 휘 신광온의 따님이다.

공은 정조 병진년(정조 20, 1796년) 9월 15일에 태어났는데 성품이 영리하고 비범하였고 풍채에서는 재기가 두드러지게 발하였다. 어려서 병이 났는데 기이한 징조가 있었고, 스승에게 글을 배울 때에는 날마다 몇 백 줄씩을 배워도 한번만 보면 외웠으며, 커서는 선배와 어른들이 모두 큰 재목이라고 장담하였다. 순조 계유년(순조 3, 1813년)에 증광 생원에 합격하고 을유년(순조 25, 1825년)에 알성문과에 합격하였다. 무자년(순조 28, 1828년)에 6품으로 올랐고 기축년(순조 29, 1829년)에 통정이 되었다. 헌종 정유년(헌종 3, 1837년)에 가선, 임인년(헌종 8, 1842년)에 품계를 올려 자헌으로 올랐고, 정헌 무신년(헌종 14, 1848년)에 숭정에 올랐으며, 철종 신해년(철종 2, 1851년)에 대광보국에 올랐고 당저 을축년(고종 2, 1865년)에 치사하여 기로소에 들어갔다.

참외로는 시강원 설서, 겸설서, 규장각 대교, 예문관 검열과 대교를 지냈고 참상으로는 문학, 필선, 겸필선, 겸사서, 홍문관 부응교, 사헌부 집의, 통례원 상례, 사복시정, 동학교수, 문신 겸 선전관을 지냈으며 내금위 종사로 피천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통정으로는 승정원의 동부승지에서 좌승지까지 올랐고 공조 · 이조의 참의 겸보덕, 이천 · 안악의 수재, 성균관 대사성, 돈녕부도정, 전라도관찰사를 지냈고 가선으로는 형조 · 호조 · 이조 · 예조의 참판, 한성부의 좌 · 우윤, 홍문관 부제학, 도승지, 동지경연 성균 · 춘추관사, 중추의금부사, 규장각, 직제학, 도총부도총관, 특진관, 동지부사, 비변사유사, 공시당상, 평안도관찰사를 지냈다. 자헌과 정헌으로는 육조의 판서, 대사헌, 판윤, 의정부 좌참찬, 지경연, 춘추관, 돈녕부, 중추부의금부사, 호서구관, 홍문관 예문관, 규장각의 제학, 문형권, 선혜청 당상을 지냈고 숭정으로는 판의금, 경상도관찰사, 강관, 지실록청사를 지냈으며 대광보국으로는 좌의정, 영의정, 판중추에서 영중추에 이르고 영돈녕, 실록총재관, 봉조하를 지냈다.

제조로는 사직서 · 경모궁 · 승문원 · 내의원 · 상의원 · 사역원 · 관상감 · 내자시 · 빙고를 맡았고, 도제조로는 종묘 · 사직서 · 영희전 · 내의원 · 사옹원 · 사역원 · 사복시 · 금위영 · 어영청을 맡았으며 그 사이 호위대장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권설로는 영접도감 · 빈전도감의 제조 · 삼조보감과 문헌비고의 찬집 · 진찬당상 · 가례 · 상호 · 묘호의 도제조 · 천릉총호사 · 삼정이정총재관을 맡았으며 전책을 짓고 보의 전찬을 썼는데 향사 영여의 호위 기타 교정과 제조의 공이 있었으니, 전후로 말과 무늬있는 가죽을 하사받은 것이 거의 30차례나 된다.

옥당에 있으면서 우레의 이변이 있자 간언을 올려 학문에 힘쓰고 정사를 부지런히 돌볼 것으로 진면하였는데, 말이가 매우 적절하고 정직하여 익종께서 가납하였다. 지방 관찰사로 있을 때에는 출척을 엄명하게 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통찰하여 개혁하였다. 형조에 있을 때에는 옥사를 심리함에 되풀이 신문하여 공평히 하였고, 예조에 있어서는 복중에 일을 보는 관제를 의정하였고, 장계에 있어서는 재정의 출입을 맑게 하고 봉춘의 관리를 근실히 하였으며, 양전에 있어서는 천거를 공평하게 하여 인재 적체가 다 풀렸고 대소의 과시를 맡아서는 평정이 정밀하고 밝아 사론이 흡족해 하였다.

일찍이 헌종을 모실 때 일로 인하여 충언을 올리는 정성을 다하니, 임금께서 기뻐하며 받아들이셨다. 무신년(헌종 14, 1848년)에 대간의 무고한 탄핵을 받아 광양으로 귀양가니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포의로 있는 사람들 서로 강개해 하면서 말하기를, “바른 사람에게 이러한 일이 있다니?”라고 하였고, 경유하는 고을마다 길을 가로막고 만나보기를 바랐는데 겨울에 풀려나 돌아왔다. 철종 초년에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에 이미 통촉하신 바이다.”하고 누누이 잘 타일렀으나 공이 도의를 대며 감히 나가지 않으니 인천으로 귀양보낸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곧 불러들여 전의 관직을 제수하고 돈독한 가르침을 더해준 뒤 공이 나와야 경연을 열겠다는 명까지 내리니 공이 부지런히 힘써서 나왔다. 정승을 임명할 때에는 충정과 문학 및 재유로 할 것이라 하교하였고, 또 곧 비상한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하교하니 공이 감격하고 황송하여 부득이 응명하였다. 매양 등대하여서는 성학에 힘쓰고 현명한 유생을 불러들이고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고 수령을 가려서 쓰고 탐욕을 징계하고 재용을 절약하고 기강을 진작시키고 과거의 폐단을 고치는 일 등으로 간절히 아뢰었고, 문충공 민정중이 배향되지 않은 것에 대해 청하기도 하였다. 신해년(철종 2, 1851년)에 헌종을 종묘에 모실 때 진종의 합사하는 것 마땅치 않다는 말이 있어 공이 힘써 그 말의 잘못을 분변하여 묘통이 마침내 바로 잡혔다. 중서에 있은 지 9년이 채 못되어 사직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쉴 것을 비는 글을 세 번이나 올리니 임금이 “덕망과 경술로써 좌우에서 나를 도우기 바라노라.”하고 손수 비지를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공은 계속해서 소원을 아뢰어 여섯 번이나 소를 올리기에 지금 임금 2년에야 비로소 소청을 들어주었다. 그 비지에 이르기를, “경은 세상을 경영하고 사물을 조종하는 학식과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가져 여러 조에서 의지하였던 바이고 국인들이 신복하는 바이오. 충절로써 나라를 받드는 일은 본래 자리에 나와 있거나 집에 한가히 있거나 구별이 없소. 경이 성취한 훌륭한 일은 모든 조정의 큰 의론이나 큰 정령으로 민국에 관계가 있는 것이니 때때로 지적하여 진언하고 바르게 도와 선인들이 대대로 충정에 독실하여 길이 왕가를 잊지 않은 성사를 따르도록 하오.”라고 하였다. 교지를 선포하던 날 입시하여 주렴 앞에서 효제와 근검으로 종시토록 학문에 힘쓰도록 임금께 우러러 아뢰니 동조에서 하교하기를, “충성과 근면함과 곧음 및 밝음은 항상 흠탄하는 바이었소. 경은 비록 치사하더라도 종종 연중에 나와 우리 임금을 도와주오.”라고 하였다.

공은 순조, 익종, 헌종, 철종의 사성조에 지우를 받았고 당저에 이르러서도 은례는 변하지 않아 치사한 뒤에도 일이 있으면 특별히 불렀다. 헌종께서는 옥권서대를 내렸고 철종과 당저께서는 어필로 별호를 써서 내렸으며 당저께서는 또 은병과 은잔을 내렸다. 공은 충정을 세업으로 삼고 명의로 가계를 삼아 시례에 물들어 효성과 우애는 뿌리가 박혀 있었다. 나이 겨우 15세에 의정공이 북영의 임소에서 세상을 떠나니 슬퍼하여 몸을 상함이 어른과 같았고, 병술년(순조 26, 1826년)에 모친상을 당해서는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리우기도 하였다. 종숙부 충문공이 일찍이 역질에 걸려 병세가 위중할 때 공의 손을 잡고 집안과 국가의 후사를 부탁하였다. 공은 백씨 문익공과 중씨 청헌공을 섬기기를 엄숙하고 공손하게 하면서도 담담함과 온화함을 잃지 않았고, 아들을 키움에는 은정이 지극하였고 가르침은 올바랐다. 자신을 검속하기에는 정밀함과 요약됨으로써 하였고 사람을 대함에는 관대함과 용서로써 항상 인애가 남에게 미치도록 마음을 썼다. 벼슬자리에 나가 일을 처리할 때는 근면하고 삼가고 상세함으로써 하여 법에 따라 실정에 힘썼다. 소신을 고집함에 엄격하였고 인정에 따라도 의리에 합치된 것은 힘써 찬성하여 이루게 하였으며, 예로써 논하여도 경상에 어긋난 것은 밝게 분변하여 바로 잡았다. 꼭 말해야 할 일이 있으면 화복이 목전에서 바뀐다 해도 괘념치 않았다. 아! 공의 굽힐 수 없는 절개는 옛날의 이른바 대신에게 부끄러울 바가 없다 하겠다.

한 번 일에서 손을 떼자 교외에 기거하면서 도서와 거문고와 바둑에 성령을 쏟다가 경오년(고종 7, 1870년)에 의정공이 세상을 뜨신 주갑을 당하자 서러워하고 사모함이 마치 새로 당한 것처럼 하여, 세초부터 소복을 하고 지내다가 제일에 이르러서는 제사에 참여하여 속으로 이제 그만 돌아가 모시기를 빌더니, 8월 17일 자시에 정침에서 생을 마쳤으니 향년 75세이다. 병이 위독해지자 상께서는 어의를 보내서 간병하였고, 부음이 전해지자 조정과 저자의 문을 닫았으며, 은졸의 하교를 내렸고 성복일에는 가까이 모시는 신하를 보내서 부의를 전하였으며 경연의 신하를 대하여 슬퍼하길 마지않았다. 한편 조야에서도 모두 탄식이 간절하였다. 10월 을미일에 수원 남면의 압실에 잠시 묻었다가, ▨▨ ▨2월 16일에 ▨조 왼쪽 간좌원에 장사지냈다. 유집이 있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부인 증정경부인 청송심씨는 생원 심능직의 따님이다. 병진년(정조 20, 1796년) 3월 7일에 태어나 15세에 공에게 시집와서 시어머니를 섬기고 남편을 받들며 동기간에 있어서나 자녀를 기름에 있어서 효성스럽고 공경하고 우애있고 인하여 부인의 덕을 두루 갖추었다. 무술년(헌종 4, 1838년) 정월 5일에 돌아가시어 처음에는 시흥 상북면에 장사지냈다가 이번에 공의 묘소에 합부하였다. 공의 둘째 아들 병덕은 이조판서를 지냈는데, 내가 그에게 딸을 시집보냈으나 지금은 죽고 없다. 딸은 남양 홍원종에게 시집갔는데, 홍원종은 문과에 급제했으나 일찍 죽었다. 병덕의 양자는 조균이다. 나는 공과 동료로 지낸 지 거의 15년이 되어 공의 언행을 보고 듣고 열복함이 깊었다. 판서군이 공의 본말을 아는 이로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여겨 묘표를 부탁하니 어떻게 늙고 병들고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겠는가? 그리하여 간략히 이상과 같이 서술하여 뒷사람의 책임에 가름하고자 한다. 조균은 이름을 종규로 고쳤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원임규장각제학 치사봉조하 한산 이경재는 글을 짓고,

숭록대부 의정부우찬성 겸 지경연사 홍문관제학 은진 송근수는 글씨를 쓰고,

전면은 자헌대부 공조판서 전성 이시민이 쓰다.

당저 ▨▨에 충문공이라 시호가 내렸다. 시법에 ‘임금을 섬김에 절조를 다함을 충(忠)이라 하고, 부지런히 배우고 묻기를 좋아함을 문(文)이라 한다.’라 하였다.

경인년 9월 27일 인시에 영평 일동면 기산리 임좌원에 이장하였다.


숭정기원후 5 병자년(고종 13, 1876년) 월 일에 세우다. 

 

한민섭 

 

출전: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출처: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8704

--------------------------------------------------------------------

김흥근[ 金興根 ]


1796(정조 20)∼1870(고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기경(起卿), 호는 유관(游觀). 달행(達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경(履慶)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명순(明淳)이며, 어머니는 신광온(申光薀)의 딸이다.


형은 좌의정 홍근(弘根)이다. 1825년(순조 25)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대교(待敎)·겸보덕(兼輔德)·이조참의·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837년(헌종 3)에 동지부사로 동지정사와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이조참판·규장각직제학·홍문관부제학·평안도관찰사 등을 거쳐, 1841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대사헌·한성부판윤 및 공조·호조·예조의 판서와 규장각제학·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846년에 좌참찬이 되었다.


1848년에 다시 예조판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안동김씨의 권세를 믿고 방자한 행동을 하였다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전라남도 광양현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여 다시 안동김씨의 세도가 확립되자, 유배에서 풀려나 한성부판윤으로 등용되었다.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1851년(철종 2)에 좌의정에 오르고 ≪헌종실록≫ 편찬 총재관(摠裁官)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영의정이 되었다. 판중추부사로 물러났다가 1862년에 이정청총재관(釐整廳摠裁官)이 되었고, 1864년(고종 1)에 ≪철종실록≫ 편찬 때 지실록사(知實錄事)가 되었다. 이듬해 영돈녕부사로서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인물 > 문신

출처: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i=254714 

------------------------------------------------

유관 김흥근 조상님 묘역은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의 소야골에 있습니다. 저는 아직 이곳을 찾아뵙지 못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직계 후손도 어느 분 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 분야에도 관심을 두고자 합니다. 유관 할아버지의 묘는 포천시에서 향토 유적 제31호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올라 있는 사진을 보니 비석이 총탄에 맞아 부분 파손된 곳이 몇 군데보여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마도 6, 25의 전흔 일 것입니다. 1990년 초 하옥 김좌근의 현손이신 광한 아저씨가 향리 선영을 오셨습니다. 그때 저는 아저씨에게 흥자 근자 산소는 어디 있고 종손은 어느 곳의 사시며 누구이신가요. (저의 집에는 현대판 족보가 없습니다.) 아저씨는 묘소는 포천에 계시는데 종손은 무(無)다.  그러나 차손은 있겠지요. 그곳 묘소도 풍수지리 연구가들의 연구대상인가 봅니다. 인터넷 사진에서의 묘소는 깨끗하게 잘 관리되고 있음을 볼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