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김선평(金宣平)
김상헌(金尙憲)-광찬(光燦)-수항(壽恒)-창집(昌集)-제겸(濟謙)-달행(達行)
21세 |
履慶 |
履中 |
履基 | |||
22세 |
明淳 生父 履基 |
祖淳 |
龍淳 | |||
23세 |
興根 |
應根 |
弘根 |
左根 |
元根 |
逌根 生父 祖淳 |
24세 |
炳德
|
炳始 |
炳溎 |
炳冀 生父 泳根 |
炳地 |
炳㴤 生父 弘根 |
25세 |
宗圭 |
容圭 |
性圭 |
用圭 |
錫圭 |
定圭 |
용암 김병시[蓉庵 金炳始 1832(순조 32)∼1898] 할아버지
의석 김응근(宜石 金應根)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저는 용암 할아버지께서 이렇도록 훌륭하신 조상님 이신줄은 미쳐 생각 못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철종 대왕 재위기간보다는 고종 때 더 정치 일선에 서신 분입니다. 구시대에서 새 시대로 넘어가는 여명기에 서신 할아버지는 그러나 구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조선 왕도정치의 정체성을 수호하려고 무척 애를 쓰셨습니다. 파란만장한 우리의 역사 즉 문호개방,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경쟁 등의 혼란기에 보수 정객으로 맹활약하십니다. 새로운 사고로 임하시지 않고 왜 그리하셨을까?
이는 나라 사랑하는 방법에서 오는 차이입니다. 나라의 정체성을 간직하면서 조국 근대화로 이르는 길을 가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의 활약상은 철종실록에서 9번, 고종실록에 313번 나옵니다. 고종 임금님이 용암 할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는 다음에 실리는 김병시 졸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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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8권, 35년(1898 무술 / 대한 광무(光武) 2년) 9월 16일(양력) 1번째기사
궁내부 특진관 김병시가 졸하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김병시(金炳始)가 졸(卒)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 대신(大臣)은 장중(莊重)하고 진실한 자태와 정밀하고 겸손한 규범으로서 왕실에 충성을 다하고 이미 나라를 위해 진력한 것이 많았다. 임오년(1882)과 갑신년(1884)에 충성을 바치고서도 그 공을 자처하지 않았고, 어전(御前)에서 계책을 진달한 것은 남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니, 짐(朕)이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 어떠하였겠는가? 어려운 때에 널리 구제해 주기를 몹시 바랐었는데, 근래에는 병환이 심해간다고는 하였지만 어찌 갑자기 졸서 단자(卒逝單子)가 이를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정색(正色)하고 입조(立朝)한 위의(威儀)와 어떠한 어려움에도 진력한 경의 정성을 이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상심한 마음을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다.
졸한 특진관 김병시의 상(喪)에 동원부기(東園副器) 1부(部)를 실어 보내고, 예장(禮葬) 등의 일은 규례대로 거행하라. 장례 때를 기다려서 비서 승(祕書丞)을 보내 치제(致祭)하되, 제문(祭文)은 직접 지어서 내리겠다.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행장(行狀)을 기다릴 것 없이 장례를 지내기 전에 시호(諡號)를 의정(議定)하게 하라.” 하였다.
출전: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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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시 [金炳始]
1832(순조 32)∼1898.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초(聖初), 호는 용암(蓉庵). 아버지는 판서 응근(應根)이다.
1855년(철종 6) 북원(北苑) 망배례(望拜禮) 때 참반유무시사(參班儒武試射)에서 뽑혀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때부터 훈국금위종사관(訓局禁衛從事官)·선전관(宣傳官)·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정언(正言)·병조정랑(兵曹正郎)을 거쳐 1860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오르고 1863년에는 이조 참의가 되었다.
1865년(고종 2) 병조참의, 1869년 예조참판·의금부사(義禁府事), 1870년 공충도관찰사(公忠道觀察使), 1874년 도승지, 1875년 형조판서·예조판서·우참찬(右參贊), 1876년 도총관·병조판서, 1877년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도통사(都統使), 1878년 총융사(摠戎使)·어영대장(御營大將)·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이조판서, 1879년 규장각제학·호조판서, 1881년 공조판서·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 1882년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변리통리내무아문사(辨理統理內務衙門事)·독판군국사무(督辦軍國事務) 등의 문무현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잠시 호조판서에서 물러났다가 흥선대원군이 톈진으로 납치된 후 호조판서에 재임명되었고,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가 일본군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 주둔하며 군란의 사후처리문제로 조선 정부를 괴롭히고 있을 때 지삼군부사로 대관(大官)에 임명되어 종사관 서상우(徐相雨)와 함께 이들과 담판 협상하였다.
또, 청나라의 장군 오장경(吳長慶)에게 조선 정부가 군란의 주도 세력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왕십리와 이태원을 기습 공격하도록 하여 수많은 군인과 가족들이 학살을 당하였는데, 이때 오장경을 찾아가 무고한 양민은 살육하지 말 것을 청원하였다 한다.
임오군란 중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지되었던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복설 되고, 그해 12월 정부 기구의 개편으로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이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으로, 통리아문(統理衙門)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바뀌면서 독판군국사무(督辦軍國事務)에 임명되었다.
1883년 1월 진주사(陳奏使)로 임명되어 청에 다녀온 후 양향당상(糧餉堂上)·선혜청제조·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조정의 신하들이 개화파와 수구파로 갈려 대립하자 사대당에 가담하여 김옥균(金玉均)일파를 몰아 내는데 일조 했다.
그 후 성립된 심순택(沈舜澤)내각의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로 전권 대신이 되어 이탈리아·영국·러시아 등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으며, 통리군국아문의 우의정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고 잇달아 의정부좌의정과 총리내무부사(總理內務府事)에 임명되었다.
1886년 〈논시폐수차 論時弊袖箚〉를 올려 정부가 개화 정책을 위해 증대한 국가경상비의 지출을 억제하고, 근검 절약하는 긴축재정으로 운영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당시 정부에서 조운(漕運)의 편리를 위해 추진하였던 윤선(輪船)의 구입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리고 1888년에는 〈논전폐계 論錢弊啓〉에서 정부의 화폐 정책을 비판하고, 특히 당오전(當五錢)을 비롯한 악화의 남조를 금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빌미로 조선에 상륙한 청·일간의 전쟁이 있기 며칠 전인 6월 20일에 영의정에 올랐으나, 다음날 일본군이 조선정부의 폐정을 개혁한다는 이유로 흥선대원군을 앞장세워 경복궁을 점령하고 24일 김홍집(金弘集) 내각을 수립하게 되어 자리를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각이 수립되면서 갑오경장이 진행되고 새로 조직된 군국기무처에서 시강원사(侍講院師)와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의 자리를 맡았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후 김홍집내각이 단발령(斷髮令)을 강제로 실시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때 궁내부특진관으로서 단발령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 이뤄진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은 김홍집 내각 실각, 친로내각 수립이라는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는데, 신내각의 총리 대신이 되었다.
1897년 대한제국이라는 국호 아래 새 관제를 정비한 광무정부의 의정부의정(議政府議政)에 임명되었고, 대원군이 죽은 뒤에는 산릉석의중수도감도제조(山陵石儀重修都監都提調)에 임명되었다.
정치·경제사상은 철저하게 유교적 왕도 사상에 근거하고 있었으나 이용후생과 경세치용에 대한 관심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철종 조에 관직에 오른 위부터 문호개방·임오군란·갑신정변·갑오농민전쟁·청일전쟁·갑오경장·을미사변 등 한국 근세의 역사 속에서 정부의 중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언제나 온건 보수의 길을 선택하여 개량주의를 지향하는 정치가로 일관하였다.
특히, 김옥균·박영효(朴泳孝) 등 갑신정변을 주도한 혁명 세력 뿐 아니라 김홍집·어윤중(魚允中) 등으로 대표되는 온건 개혁 세력과도 언제나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보수주의자였다.
일생을 조선 봉건왕조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5백년 선왕의 제도는 변혁될 수도 없고 변혁돼서도 아니된다는 정치 원리를 신봉한 수구파 관료였다.
최근 일부 학자들에 의해 민본주의에 입각한 중도적 개혁가로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으로 점철된 조선근세정치사에서 언제나 민족주의적 입장을 지킨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정치가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가 죽은 뒤 고종이 제문을 직접 짓고 충문(忠文)이라 증시(贈諡)하였다.
저서에는 ≪용암집≫이 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참고문헌≫ 承政院日記
≪참고문헌≫ 日省錄
≪참고문헌≫ 蓉庵集
≪참고문헌≫ 韓國近代의 民族意識硏究(金昌洙, 同和出版公社, 1987)
백과사전 카테고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인물 > 문신
출처: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33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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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시묘갈(金炳始墓碣)
공은 성이 김(金)씨로, 이름은 병시(炳始), 자는 성초(聖初), 하사받은 호는 용암(蓉菴)이다. 안동(安東)이 본관으로 고려의 태사(太師) 선평(宣平)이 시조이다. 본조에 들어와 청음 문정공(淸陰 文正公) · 문곡 문충공(文谷 文忠公) · 몽와 충헌공(夢窩 忠獻公)은 모두 이름난 절사로 그 덕과 공업이 역사에 실려 빛나고 있다. 5대조는 제겸(濟謙) 충민공(忠愍公)으로 호는 죽취(竹醉)이다. 고조할아버지 달행(達行)은 찬성에 추증되고, 증조할아버지 이경(履慶)은 찬성에 추증되었으며, 할아버지 명순(明淳)은 이조참판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응근(應根)은 음직으로 관직에 나가 공조판서를 지낸 청헌공(淸獻公)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의석(宜石)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된 용인이씨(龍仁李氏)로 첨중추 재순(在純)의 따님이다.
공은 순조 임진년(순조 32, 1832년) 10월 3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바탕이 수려하면서도 맑고 활달하였으며, 성품은 단정하면서도 중후하였다. 겉으로 드러나게 자기를 닦지 않아도 속에 쌓인 총명함이 당시 집안을 빛냈지만 오직 경서와 사기에만 깊이 심취하였다. 욕심 없이 담담하여 외물을 사모하지 않으니 선배와 어르신들이 모두 큰 그릇이 될 거라며 추켜세우며 장담하였다. 헌종 무신년(헌종 14, 1848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철종 갑인년(철종 5, 185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원(翰苑 : 한림원과 예문관) · 영각(瀛閣 : 홍문관) · 은대(銀臺 : 승정원) · 반장(泮長 : 대사성) · 부제학, 이조참의를 지냈다. 정묘년(고종 4, 1867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고, 경오년(고종 7, 1870년)에 충청감사가 되었으며, 갑술년(고종 11, 1874년)에 도승지, 을해년(고종 12, 1875년)에 규장각 직제학 가의대부(嘉義大夫)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추천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판서가 되었다. 병자년(고종 13, 1876년)에 세자빈객 병조판서, 정축년(고종 14, 1877년)에 무위제조(武衛提調)가 되었고, 관례에 따라 혜당(惠堂 : 선혜청당상)을 겸하였다. 무인년(고종 15, 1878년)에 총융사 어장도통사 이조판서 포도대장, 기묘년(고종 16, 1879년)에 홍문제학 호조판서 규장각제학, 경진년(고종 17, 1880년)에 숭정대부(崇政大夫), 신사년(고종 18, 1881년)에 공조판서, 임오년(고종 19, 1882년)에는 숭록대부(崇祿大夫), 계미년(고종 20, 1883년)에 보국대부(輔國大夫) 판돈녕부사, 갑신년(고종 21, 1884년)에 우의정, 병술년(고종 23, 1886년)에 좌의정 세자부, 경인년(고종 27, 1890년)에 영돈녕, 임진년(고종 29, 1892년)에 호위대장, 갑오년(고종 31, 1894년)에 영의정 세자사가 되었다.
이와 같이 처음 입사한 이래로 순조롭게 품계가 올라 여러 관직을 물 흐르듯 거쳤고, 여러 차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관부와 겸직 및 새로 제정된 관직을 거쳤지만, 대체적인 것은 기록하지 않았다. 공이 호서(湖西 : 충청도) 지방의 동향(桐鄕)에 관찰사로 나갔을 때 모두 청헌공(淸獻公 : 김병시의 아버지 김응근)이 남긴 규정을 지키고 받들며 어기지 않았고, 백평(白平)은 석벽에 새겨 덕을 기리니, 이웃 군에서 서로 우러러보았다. 그때 정해청(鄭海淸)의 옥사가 온 지방에 널리 퍼져 소란했는데, 공이 사실을 샅샅이 조사하고, 반드시 신중히 법률을 살피며, 되풀이 신문하여 죄를 공평히 처리하니, 민심이 차츰 안정을 찾았다. 관사를 수리할 공역이 대단히 많았지만 민력을 허비하지 않았다. 조정으로 돌아가는 날에 수백 명의 나이든 노인들이 한 사발의 물을 받들면서, “공의 다스림이 물처럼 맑았기 때문에 이 한 사발의 물로 전송합니다.”하였다. 을해년(고종 12, 1875년)에 임금께서 특지로 공을 부르니, 공은 사관이 갖추지 않은 것은 문서를 위조한 것과 같으므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으나, 임금의 엄한 명령에 입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후한 대우는 날로 융성해졌다. 이조와 병조의 뚜렷이 구별되는 품계로 오래 벼슬한 사람들이 차례로 자리를 옮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많은 사람들의 불평을 하나로 모아 국정을 관장하고, 재원을 깨끗이 하며, 봉용(封樁 : 재보를 저장한 창고)에서 날마다 지출하는 경비를 신중히 처리하니, 이에 힘입어 재정이 줄어들지 않게 되었다. 예위시(禮闈試 : 會試)를 주관하여 학식이 뛰어나면서도 오랫동안 뜻을 굽히고 있던 사람이 응시하였을 경우 선발하지 않음이 없었다. 여러 번의 과거를 통해 얻은 인재들이 가장 많아 총사로 삼았으나 훈척이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거처할 수 없다며 사양하였다. 기과적(記過籍 : 과실을 기록한 책으로, 잘못을 고친 경우에 이름을 삭제한다.)에 이름이 있다는 부분에 이르러선 임금이 부신을 받고 이름을 없애기 위해 힘쓰라고 하였다.
임오군란 때에, 궁중에 창검이 숲과 같았다. 임금이 맨발로 전을 내려오자, 공이 업어서 피하니, 군졸들 모두 외치기를 “이분은 충신이다.”라고 하며 감히 가까이 가질 못하였다. 이 때문에 임금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에 청나라 장수가 성 밖의 난을 일으킨 병사들을 잡고자 마을을 점령하였다. 공이 가서 청나라 장수를 보고 “난을 일으킨 자는 불과 십 여 명에 지나지 않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이 옳겠습니까? 마땅히 왕전빈(王全斌 : 송나라 장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하니, 청나라 장수가 놀라면서 그만두도록 하였다.
갑신정변으로 삼전궁(三殿宮)이 피난하자, 공은 성북동(城北洞)에서 각심사(覺心寺)에 이를 때까지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이때 의정의 임금의 명이 있다고 하여, 공은 갑작스럽게 행재소(行在所 : 임금이 궁 밖에서 거처하는 임시 장소)에 들어가 인사드리고, 임금에게 환궁하여 민심을 안정시킬 것을 청하자, 다음다음날로 환궁하였다. 임금이 일본공사를 접견하는데, 일본공사가 주변을 물릴 것을 청하였다. 공이 정색하며 “어찌 자기 군주에게 고하는 것을 신하가 들을 수 없겠는가? 하자, 청나라 장수가 듣고는 탄식하며, “김(金)공은 참으로 대신이다.”하였다. 난이 차츰 평정되자, 벼슬자리에서 물러났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관직을 받아 경연 자리에 나아갔다. 경연에서 계절에 따라 몸조리를 신중히 할 것,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을 등용할 것, 기강을 바로잡을 것, 백성들의 일을 걱정할 것, 군대에 관한 일에 뜻을 둘 것, 이웃 국가들과 교류를 해야 할 것 등을 힘써 아뢰었다.
을유년(고종 22, 1885년)에 벼슬을 그만두며, 차자(箚子 : 간단한 형식의 상소문)를 올려 당시의 폐단 및 그것을 바로잡는 방안과 왕세자 교육에 힘쓸 것을 극언하였다. 병술년(고종 23, 1886년), 당오전(當五錢 : 조선 후기 상평통보 법정 가치의 다섯 배에 해당하는 화폐)의 폐단이 두루 고질이 되어 백성들은 생계를 이어갈 수조차 없었다. 이에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그것에 대한 이해를 논하고, 될 수 있는 한 빨리 없앨 것을 청하였다.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지난번 어전에서 올린 간언으로 갈렸다. 몇 개월이 안 되어 재임명되자, 소를 올려 힘써 사직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고 이어 차자로 당시의 폐단을 숨김없이 직언하여 올렸다.
무자년(고종 25, 1888년)에 다시 재상의 직에 임명되었다. 공이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매우 간절히 아뢰었고, 또 궁궐 중건하는 부역을 빨리 그만둬야 한다고 말하였다.
계사년(고종 30, 1893년)에 동학이 크게 번지니 공이 아뢰기를 “이 무리들도 모두 우리의 백성인데, 갑자기 군대를 출동시켜 위협을 가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하였다. 갑오년(고종 31, 1894년)에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을미년(고종 32, 1895년) 8월, 변(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서울에 왔다. 그러나 사건을 쉬쉬하며 드러내지 않았고, 그 자세한 사정을 알만한 연고가 없어, 이내 고향의 자택으로 돌아갔다. 10월에 비로소 중궁전의 부음을 듣고 달려가 곡을 하였으며, 단발하라는 명에 공은 글을 올려 옳지 않다고 말하였다. 12월에 임금이 러시아 공관으로 처소를 옮기고 공에게 총리대신을 맡겼다. 병신년(건양 1, 1896년) 정월, 러시아 공관에 나가 환궁 및 대행후(大行后 : 명성황후)의 장례에 관한 일을 청하였다. 8월에 총리를 고쳐 의정이라 하는 등의 14개조의 상소를 올렸다가 면직되었다. 정유년(광무 1, 1897년)에 다시 의정의 직을 받았으며, 시사에 관한 일로 일곱 차례 상소를 올리자 사직을 허락하였다. 무술년(광무 2, 1898년)에 다시 의정을 받았으나 연이어 상소를 올려 면직을 허락받고, 전후 의정으로 받은 봉금을 국고로 돌려주었다.
공은 이때부터 병으로 자리에 누워 약이 되는 음식을 올렸으나 물리치면서 “너무 부끄러운 구차한 삶이다. 그런데 그것을 조금 더 연장하고자 하겠는가?”하였다. 7월 26일 양주(楊州) 석우병사(石隅丙舍)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67세였다. 부음을 듣고, 임금이 크게 슬퍼하면서 애도의 뜻을 표하시며, 관으로 쓸 나무 일부를 보내어 예장하고 전례를 살펴 거행하도록 하였다. 장례할 때를 기다려 비서승한테 제문과 제물을 보내 제사지내게 하였다. 제문은 임금이 친히 지어서 내렸고, 시호에 대한 의논이 수합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충문(忠文)’이라 시호(諡號)하였다. 동궁에서 치유제문을 친히 지어 궁관을 통해 보내 예장토록 하니, 고인의 뜻이라며 받지 않았다. 9월 17일에 청헌공(淸獻公) 묘의 왼쪽 산등성이에 임시로 묘소를 마련하였다가, 기해년(광무 3, 1899년) 4월에 정남향 자리로 바꾸어 장사지냈다. 임금이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고, 제수는 궁내부에서 수송하게 하였다. 계묘년(광무 7, 1903년) 10월 22일, 양주 광석면 추교리(楊州廣石面楸橋里)의 북북동쪽의 언덕으로 이장하였으며 치제 등의 의절 모든 것이 기해년의 것과 같았다.
부인 정경부인(貞敬夫人)은 남양홍씨(南陽洪氏) 이조판서 남릉군(南綾君) 종서(鍾序)의 따님으로 경인년(순조 30, 1830년) 11월 16일에 태어났다. 아들 용규(容圭)는 문과에 급제하여 비서승으로 있고, 측실 소생인 아들 택규(宅圭)는 군수, 복규(宓圭)는 전 참봉이다. 딸은 교리인 서상윤(徐相允)에게 시집갔다. 용규(容圭)는 4남을 두니, 전 참봉 태진(泰鎭) · 승진(升鎭) · 풍진(豐鎭) · 복진(復鎭)이 그들이다. 택규(宅圭)는 아들 관진(觀鎭)을 두었다.
공의 성품은 효를 다하여 부모를 섬김에 어김이 없었다. 매번 부모의 제삿날에는 비록 많이 아프더라도 반드시 직접 하였고, 새벽이 될 때까지 눕지 않았다. 두 동생에 대한 우애는 진실로 사랑하여 지극히 돈독하였으며, 두 조카를 아낌이 마치 자기 소생과 같이 하였다. 종족을 진휼할 때에도 멀고 가깝고를 구분하지 않고 정도에 맞게 조절하니, 더러는 곳간이 비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공은 항상 “청빈을 남겨주는 것이, 내가 자손을 위하는 계책이다. 해를 끼침이 적기를 바란다.”하였다. 만년에 성북동(城北洞)에 퇴거하였는데 그 집은 좁고 작았다. 수석을 찾아 이리저리 거닐며 돌아다니며 항상 가마를 타고 다녔는데도, 행인들은 상공임을 알지 못하였다. 옷감은 단지 베와 명주를 사용하고 방안에는 기이한 완구를 두지 않으며, 음식 가짓수는 몇 가지를 넘지 않았다.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하나 마음에 찰 때까지 마시질 않아, 사람들이 취한지 조차 몰랐다. 조용히 있으면서 말을 적게 하였고, 종일토록 조각상처럼 단정하였다. 집안사람들이 잘못을 하여도, 말이나 얼굴색을 더하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하였다.
임금과 왕세자가 직접 글을 써서 호를 내렸으며, 또 은 술잔 1구를 내렸다. 은 술잔에 임금이 직접 쓴 글을 명으로 새겼는데, “충화(冲和)로 덕을 삼으니 군자가 잔을 준다.”이다. 공로를 명기한 그릇을 들고 하늘이 내려준 이름이 여기에 있음을 말한다. 은 술잔을 그리고 시를 써 넣은 그림을 집에 보관하고 있다. 공은 하늘을 놀라게 할 만한 공이 있었지만 공이 있다 자처하지 않았고, 하기 어려운 말도 참고 간절히 하니,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중서(中書 : 궁중의 문서 조칙 따위를 맡아보던 벼슬)에 출입한 15년 동안 직위에 있는 날이 적었어도, 조정의 큰일이 있으면 반드시 방문하여 자문을 받았다. 몰래 임금이 꾀한 것을 허락하지 않아도, 매양 임금의 동의를 합하여 받았다. 비록 모두 시행되진 않고 또한 아는 사람이 드물더라도, 변하지 않는 충애는 그 바탕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문장에 대한 신명은 우습게 여겨 뜻을 두지 않았다. 무릇 저작 · 문장 · 서간 · 교지는 모두 비록 그 빛남은 적으나 정밀하여 읽을 만하다. 시는 더욱 맑고 새로웠고 매우 영특하였다. 서법은 둥글면서도 아름답고 씩씩하면서도 굳세고 날카로웠으니 동옹(董翁 : 명나라의 서화가 동기창(董其昌)을 가리키는 듯)의 정수를 깊이 체득하였다 하겠다. 『유고(遺稿)』 6권, 『임육록(壬六錄)』 1권, 『퇴사록(退思錄)』 12권, 응제(應製 : 임시 과거시험) 때에 임금의 명령으로 대신 지은 시와 문초(文草)가 매양 상자에 넘칠 때마다 그것을 불살랐다.
슬프다! 공이 소자를 마치 친자처럼 여겨 두터이 사랑함이 깊었으니 비유컨대 입가의 알리는 말이 마치 귀에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이미 머리가 커서 자주 뜻을 저버렸다. 공이 언제나 기대한 것이 많았는지 굽어보고 올려다보며 탄식하셨다. 태진(泰鎭)이 표수(表隧)의 글을 부탁하였는데 아는 것이 적고 병으로 정신이 흐리니, 어찌 이 일을 감당하겠는가. 생각건대 감히 아첨함이 넘치지 않는 것은 있으나, 덕업과 언행에 대해 만에 하나도 발휘하질 못하였으니 어찌 통한을 이기리오.
오촌 조카 가의대부(嘉義大夫) 호조참판 원임 규장각 대교(戶曹叅判原任奎章閣待敎) 종규(宗圭)가 삼가 짓고,
손자 종사랑(從仕郞) 혜릉 참봉(惠陵叅奉) 태진(泰鎭)이 삼가 쓰다.
앞면은 손자 승진(升鎭)이 삼가 쓰다.
융희(隆熙) 4년(순종 4, 1910년) 경술 2월 26일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니 향년 81세이다. 효와 공경함, 유순함과 아름다운 범절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3월 임시로 청헌공(淸獻公) 시아버지의 묘 오른쪽 언덕에 장사하였다가 신해년(순종 5, 1911년) 2월 19일에 합장하고 합사하였으며, 비의 앞면의 오른쪽 을 비웠다가 지금에 이르러 쫓아 새긴다. 복규(宓圭)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고, 서상윤(徐相允)은 양아들 병천(丙天)을 두었으며, 태진(泰鎭)의 아들은 어리다. 승진(升鎭)은 전 시종관으로 나아가 족숙이 되었고, 전 특진관 용규(用圭)가 있으며, 후에 풍진(豐鎭)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어리고, 관진(觀鎭)의 딸도 어리다. 불초 손자 태진(泰鎭)이 알고 있는 것에 따라 기록하였다.
대한광무(大韓光武) 7년(1903년) 계묘 월 일에 세우다.
이대형
출처: http://gsm.nricp.go.kr/_third/user/search/KBD008.jsp?ksmno=8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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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통상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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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통상조약(영문)
(朝英通商條約(英文)) 서울특별시의 국보
지정번호 국보 제131호
제작시기 조선 고종 21년(1884)
소유자 국립중앙도서관
≪조영통상조약(Treaty of friendship and Commerce Between Great Britain and Corea)≫은 고종 20년(1883) 11월 26일 조선과 영국 사이에 전문 13조의 조영수호통상조약(朝英修好通商條約), 부속통상장정(附續通商章程), 세칙장정(稅則章程), 선후속약(善後續約)의 영문 필사본으로 이듬해인 1884년 2월 8일에 파크스(Harry S. Parkes)와 김병시(金炳始) 사이에 비준이 교환되었다. 이 조약원문(국립귀 641, 0342-20-10)은 1책으로 63장(126쪽)이며 34.0×20.8㎝이다. 권말에는 ‘Articles Regulations under which British Trade is to be Conducted in Corea’,‘Import Tariff and Export Tariff’,‘Rules’,‘Protocol’이 합철되어 있다.
영국은 자국의 어선용 프로비던스호(The Providence)가 정조 21년(1797)에 원산 근해를 항해했던 것을 시작으로 순조 32년(1832)에는 로드 암허스트호(The Lord Amherst)가 충청도 홍천에 한달 정도 머물면서 통상·수호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대원군 집정시에는 로나호가 충청도와 경기도 연안에 나타나 통상 요구를 해왔고, 셔먼호는 평양에 와서 통상요구를 했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잠시 공백을 두었던 영국상선은 조일병자조약을 계기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다시 통상요구를 하기에 이르렀다. 조일 수교가 성립되어 제1차 수신사로 김기수(金綺秀)가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주일 영국공사로 있던 파크스(Harry S. Parkes)는 김기수와 만나 통상수교를 위한 담판을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1876년 가을부터 실비어호(The Sylvia), 스윙거호(The Swinger)가 경상도를 실측 조사하였고, 또 바바라 테일러호(The Babara Taylor)가 제주도 근해에서 난파 구조되었으므로 장기(長崎)의 영국영사관원(英國領事館員)을 조선에 파견하여 사의를 표명하였다.
1881년 6월에는 페가서스호(Pegasus)가 지방관원과 다시 담판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본격적인 통상조약이 타진된 것은 조미통상조약이 타결된 직후였다. 영국은 1882년 5월 17일 에 윌스제독(Admiral Willes)을 전권으로 임명하여 조선에 파견하였고, 조선에서는 5월 28일 조영하(趙寧夏)를 전권대신, 김홍집(金弘集)을 부관, 서상우(徐相雨)를 종사관으로 하여 인천에서 조영회담을 개시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1882년 6월 6일자로 마건충(馬建忠)·정여창(鄭汝昌) 등의 임석하에 영국의 윌스간에 전문 14조로 된 조영수호통상조약에 조인하였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윌스제독이 체결한 이 조약은 조일수호통상조약에 비하여 “영국의 무역과 영국민의 지위보장이란 견지에서 커다란 결함을 내포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비준을 유보하였고, 1883년 10월에 당시 주청영국공사로 있던 파크스(Harry S. Parkes)를 파견하여 조선의 전권대신 민영목(閔永穆)과 더불어 상세한 수정을 가한 다음 1883년 11월 26일 전문 13조의 조영수호통상조약 원문과 부속통상장정·세칙장정·선후속약을 조인하였고, 이듬해인 2월 8일에 파크스와 김병시 사이에 비준이 교환되었다. 이 조약문은 당시에 영문 필사본으로 작성되었으며, 고종의 어보가 찍혀있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 가운데 외교 대표들과 영사들은 조선 국내를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고 조선정부는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조항, 치외법권의 철폐를 조선국왕에 의하여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영국정부의 판단에 의하여 승인해 줄 때 가능하도록 한 조항, 부산과 인천 이외에 서울과 양화나루를 개항하기로 한 조항, 개항장에서 영국인은 종교를 가진다는 조항,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일정한 지역에서는 여권이 없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다는 조항, 영국 군함은 개항장 이외에 조선 국내 어디서나 정박할 수 있고 선원이 상륙할 수 있다는 조항 등은 모두 영국에게만 유리한 것들이었다.
반대로 조선이 영국에서 행할 수 있는 권리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불평등조약이었다. 이후 영국은 미국이나 일본이 조선에 전권공사를 파견한 것과는 달리 한 단계 낮은 총영사를 파견하여 조선에 머무르도록 했다. 이 조약문은 조선이 근대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서구열강들과의 외교관계가 어떻게 진행되어 갔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이다.
출처: http://ko.wikipedia.org/wiki/%EC%A1%B0%EC%98%81%ED%86%B5%EC%83%81%EC%A1%B0%EC%95%B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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