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贊成公(達行) 가문

사영 김병기 할아버지

추읍산 2009. 9. 1. 16:35

 

 시조 김선평(金宣平)


김상헌(金尙憲)-광찬(光燦)-수항(壽恒)-창집(昌集)-제겸(濟謙)-달행(達行)


   20세 金達行

21세

履慶

履中

履基

22세

明淳

生父 履基

祖淳

龍淳

23세

興根

應根

弘根

左根

元根

逌根

生父 祖淳

24세

 

炳德

 

炳始

炳溎

 

炳冀

生父 泳根 

炳地

 

炳㴤

生父 弘根

25세

宗圭

容圭

性圭

用圭

錫圭

定圭


 

 

사영 김병기[思穎 金炳冀 1818~ 1875] 할아버지

 

 1818(순조 18)∼1875(고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존(聖存), 호는 사영(思潁). 부사 이중(履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제학 조순(祖淳)이고, 아버지는 판돈녕 영근(泳根)이며, 어머니는 윤치승(尹致升)의 딸이다. 영의정 좌근(左根)에게 입양되었다.


1847년(헌종 13)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 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다. 1849년(철종 즉위년) 대사성이 된 뒤 1850년 이조참의·실록청수찬관(實錄廳修撰官)·규장각직제학·예조참판, 1851년 이조참판, 1852년 대사헌을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재정이 고갈 상태임을 조정에 보고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주도록 청하였다. 1853년에 총융사(摠戎使)·훈련대장·예조판서·의정부좌참찬·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공조판서·한성판윤 등을 역임하고 이듬 해 호조판서, 1860년 금위대장·어영대장을 지냈다.


1862년에는 삼남 지방으로부터 시작된 전국적인 민란의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설치한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의 구관당상(句管堂上)이 되었다. 철종 때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하에서 이조판서·어영대장·판돈녕부사직을 두 차례, 호조판서직을 다섯 차례나 거치는 등 관력(官歷)이 화려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자 1864년(고종 1) 판돈녕부사·광주유수(廣州留守) 등 한직으로 물러났다. 그러다 다시 요직에 기용되어 1865년 병조판서·좌찬성, 1866년 공조판서·예조판서, 1867년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문근(汶根)의 조카로 성격이 호방해 문근의 사랑을 받았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한창일 때에 초야에 있던 흥선대원군과 교유해, 뒷날 흥선대원군이 집정해 안동 김씨 일파가 대부분 제거될 때도 여전히 관직에 머무를 수 있었다. 저서로 ≪사영집≫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참고문헌≫ 憲宗實錄

≪참고문헌≫ 哲宗實錄

≪참고문헌≫ 高宗實錄

≪참고문헌≫ 國朝榜目

≪참고문헌≫ 近世朝鮮政鑑 上(朴齊絅, 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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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인물 > 문신

출처: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62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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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영 할아버지는 김영근(위 표 김달행의 큰형님인 김성행의 증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으나 하옥 김좌근의 아들로 입적하였습니다. 철종 대왕 시절 안동김씨의 위세가 대단하였고 그리고 당시 정계를 주름잡았던 하옥 김좌근의 아들로 입적하셨으니 그 가지시는 권세는 더욱 막강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흥선 대원군이 등장하는 T, V 드라마를 통해서 하옥 김좌근 부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들 부자를 몹시 부정적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철종 대왕 시절 사영  김병기에게 많은 모멸?을 받기도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끈끈한 유대관계를 유지하였나 봅니다.

 

이제 1863년 말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후 사영 김병기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후 두분사이에 재미난 일화가 여럿 있습니다. 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옥 대감의 생일인가요? 사영은 흥선 대원군을 초대합니다. 많은 손님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던 흥선 대원군은 갑자기 안색이 변하고 먹던 음식을 토해냅니다.  웩.웩! 그리고 사영 김병기를 째려보았습니다. 독약이다! 대원군을 호위하는 군사는 흥선의 다음 명을 집행하기위해 주위를 감쌋습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사영 김병기와 하옥 가문입니다. 모두 새파랗게 질려 이를 지켜보는데 그때 사영 김병기가 흥선대원군이 토해낸 음식을 손으로 담아 모두 먹습니다. 그리고 대원군을 보면서 말합니다. 대감께서 장난이 심하십니다. 하하하! 김병기는 놀라운 기지를 발휘합니다.

 

흥선 대원군은 집권 초기 여러 관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내가 천 리를 지척으로 줄이고 태산을 깍아 평지로 만들며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고 합니다. 이 뜻이 무엇인지몰라 서로들 전전긍긍하던 차에 사영 김병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리를 지척으로 압축하려 하면 지척이 되고 남대문도 3층이 될 것입니다. 지금 대감께서는 무슨 일인들 못 하겠습니까? 그러나 태산은 스스로 태산이니 어찌 평지로 바꾸겠습니까. 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는 바로 소외당하여온 왕실 인사들을 가까이하고, 안동 김씨가 쌓아 올린 정치기반을 깎아내리겠다는 것이며, 또한 남인처럼 소외 받아온 인사들을 크게 등용할 것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 참고: (2006, 서해문집) 매천야록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났습니다. 나라 안은 양이 가 쳐들어온다고 혼란에 빠졋습니다. 특히 서울 장안은 피난민이 장안을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내로라하는 양반들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하는 등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그때 사영 김병기는 여주 우안당(又安堂)에 머물고 있었는데 가족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대대로 나라에 은혜를 받고 살아왔으므로 사직과 함께 존망을  같이 해야 한다. 너희는 죽음을 두려 위하지 말라. 그리고 가족들을 이끌고 피난가는 사람들과 반대로 입경했다고 합니다. 대원군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낙심했다고 합니다. 정적인 안동김씨의 기개가 단번에 되살아나는 것이니 기분이 좋을리는 없을 것입니다.

 

흥선 대원군도 사영 할아버지를 이렇게 인정합니다. “아들을 낳으려면 김병기처럼 웅특(雄特)한 아들을 낳고, 그렇지 않으면 홍원식 형제처럼 단아하고 준수한 아들을 낳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