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김선평(金宣平)
김상헌(金尙憲)-광찬(光燦)-수항(壽恒)-창집(昌集)-제겸(濟謙)-달행(達行)
21세 |
履慶 |
履中 |
履基 | |||
22세 |
明淳 生父 履基 |
祖淳 |
龍淳 | |||
23세 |
興根 |
應根 |
弘根 |
左根 |
元根 |
逌根 生父 祖淳 |
24세 |
炳德
|
炳始 |
炳溎 |
炳冀 生父 泳根 |
炳地 |
炳㴤 生父 弘根 |
25세 |
宗圭 |
容圭 |
性圭 |
用圭 |
錫圭 |
定圭 |
약산 김병덕(約山 金炳德) 할아버지
1847년(헌종 13) 정시 문과에 급제하고 출사하신 할아버지는 헌종, 철종, 고종의 3대의 걸친 임금을 모시면서 근면 검소하고 청렴한 출사모습을 보이십니다. 매천야록을 쓴 황현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김병덕은 한번 버선을 신으면 때가 타 회색빛으로 되었어도 계속 신고 다녔다고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회색 당상(堂上)’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재상의 지위에 있을 때에도 부친의 방 청소와 정리 정돈을 손수 하였고 밥상은 고기 반찬은 두 가지 이상 올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다. 검소하고 청백하여 옛날의 명유에 비하여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고종 황제는 그런 그를 사랑하여 과거시험관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김병기 저 조선 명가 안동김씨 pp185~ 187 에서는 김병덕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쓰고 있습니다. 보기: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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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문화원 홈페이지에서 소개하는 김병덕
김병덕(金炳德)ㆍ1825(순조25)~1892(고종29)
갈기대신 김흥근(金興根)의 아들이고 자는 성일(聲一), 호는 약산(約山)이다. 아버지(興根) 갈기대신이 살던 웃 갈기에서 살았다. 병덕은 약산대신이라고 부른다. 1847년(헌종13) 정시문과에 급제했다. 이때만 해도 안동김씨의 세력이 여운을 남기고 있어 조정에는 각 부서마다 안동김씨가 자리 잡고 있던 때이다.
김병덕의 아버지 흥근은 요직에 있을 뿐 아니라 김수근(金洙根), 김좌근(金左根) 등이 판서급에 있으며 정상(頂上)을 향해 줄달음질 치고 있었을 때이다. 1854년(철종5)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승배되었고 직제학을 거쳐 1858년(철종9)에 이조참판으로 뛰어 올랐다. 이때 영의정에는 김좌근(金左根), 호조판서에는 김병국(金炳國), 직제학(直提學)에는 김병주(金炳?), 규장각제학에는 김보근(金輔根), 경기관찰에는 김병운(金炳雲)이었다. 1860년(철종11) 이조판서가 되었다. 호조판서는 김병익(金炳翼)이었다. 같은 해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 右參贊)으로 전직되었다가 1863년(철종14)에 예조판서가 되었다.
1866년(고종3)에는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1867년 이후에는 이조판서를 세 번이나 지냈다 이어서 병조판서를 거쳐 1880년(고종17) 통리기무아문당상(統理機務衙門堂上)이 되고 이후 평안도 관찰사, 수원부유수, 독판군국사무(督辦軍國事務)를 역임한 후 1884년(고종21) 우의정에 올랐다. 1885년(고종22) 좌의정이 되었다.1890년(고종27) 치사(致仕)해서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청렴결백하여 명재상으로 칭송되었다. 그리하였기에 고종조(高宗朝)에 이르러서 세도 김씨(勢道 金氏)가 모두 퇴출되어도 약산대신만은 조신(朝臣)들의 신임을 받아 건재하였다. 치사 후 일동면 수입리 갈기 옛집에 와서 살았는데 부자가 대신(大臣)이라서 흥근(興根)을 노대신(老大臣), 병덕(炳德)을 소대신(少大臣)이라 불렀다.
약산대신(約山大臣)이 일동에 와 있을 때 중암 김평묵(重菴 金平?) 선생이 일동 운담(雲潭)에 기거 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학자 중암(重菴)이 우리 고장에 계시니 우리 고을의 영광이라 하며 매년 계속해서 양식과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한다. 묘는 일동면 기산리에 있고 시호(諡號)는 문헌공(文獻公)이다.
http://www.pcmh.or.kr/html/11_22.html ---------------------------------------------------------
약산 김병덕 조상님은 헌종실록에 2번, 철종실록에13 번, 고종실록에 124 번 나옵니다. 여기서는 운명하실 때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고종 29권, 29년(1892 임진 / 청 광서(光緖) 18년) 윤6월 23일
전교하기를, “듣건대, 봉조하(奉朝賀) 김병덕(金炳德)의 병이 위독하다고 하니, 어의(御醫)를 보내어 상당(相當)하느 약물(藥物)을 가지고 가서 병을 진찰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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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9권, 29년(1892 임진 / 청 광서(光緖) 18년) 윤6월 23일
봉조하(奉朝賀) 김병덕(金炳德)이 졸(卒)하였다.
전교하기를, “이 대신(大臣)은 품성이 방정하고 지조가 꾸밈이 없었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을 임금에 대한 충성으로 옮길 줄 알고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도 숨김이 없었다. 깨끗한 지조를 대대로 지켜 왔으며 몸가짐은 매우 검소하였다. 사임을 윤허한 것은 비록 훌륭하게 성취시키려는 데 있었지만 나라를 짊어지고 나가는 높은 명망으로 의탁하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간절하였다.
나이는 노쇠기에 들어섰지만 정력은 아직 왕성하였는데 앓는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금방 서단(逝單)의 비보가 올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나의 슬픔은 뭐라 말할 수 없다. 졸한 봉조하 김병덕의 상(喪)에 동원부기(東園副器) 1부를 실어 보내고, 성복(成服)하는 날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시호(諡號)를 주는 절차는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거행하고, 녹봉(祿俸)은 3년간 그대로 보내 주며 예장(禮葬) 등의 절차는 규례에 따라 거행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봉조하 김병덕은 일찍이 보양관(輔養官)을 지냈으니 치조(致弔)와 치제하는 절차는 사부(師傅)의 예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출전: 조선왕조실록. 보기: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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