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그리움은 강물처럼

벌초 이야기

추읍산 2009. 9. 21. 15:34

음력 7월 20일은 저의 조상님의 묘소를 벌초하는 날입니다.

 

이 원칙은 1747년(영조 23) 이곳에 8대조 김달행 할아버지의 묘소가 자리 잡은 이후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벌초를 하면 그 후로도 풀이 자라서 지금은 양력으로 9월 10일경부터 시작합니다. 양평군 개군면 향리 아랫상골에 위치한 나의 뿌리가 자리한 곳! 오늘은 벌초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마을분과 함께하는 벌초

 

저는 마을 분들의 고마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벌초는 시제사와 더불어 저희 집의 연중 큰 행사입니다. 작은 시골마을인 이곳은 저희 선영입니다. 이곳에서 벌초하는 모습을 어렸을 적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기억을 되살리고자 합니다. 음력으로 매년 7월 20일이 되었습니다. 이곳은 8대조로부터 부모님 묘소까지 계십니다. 저희 마을 한복판의 작은산과 그 산자락에는 8대조 할아버지 묘소와 그 후손들 그러니까 저희 조상님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미리 이야기하지 않았는데도 아침 9시경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낫을 들고 모여듭니다. 매년 음 7월 20일은 저희 벌초하는 날로 인식되어버린 것입니다. 당시의 마을 가구 수는 모두 해야 16호입니다. 이렇게 해서 십여 명의 마을 분들이 8대조 묘소 제절 앞으로 모여 낫으로 풀을 깍 기시작합니다. 유난히 묘역이 넓은 이곳 8대조 할아버지의 묘역만 한나절이 걸립니다. 오후 1시경 이곳의 벌초는 마치고 점심때입니다. 묘소 옆에는 저희 집이 있습니다.

 

마을 분을 대접하기 위한 음식상이 차려집니다. 하나의 작은 잔치가 벌어진 것입니다. 음식을 장만하시느라고 수고하시는 이웃아주머님들! 집안은 떠들썩하고 맛있게 점심을 드신 마을 어른들은 한낮의 더위를 피해 낮잠에 들어갑니다. 한잠 자고 나면 오후 3시경이 됩니다. 마을 사람들은 저희 조상님의 나머지 묘소의 벌초를 위해 각자 맡은 묘소로 향합니다. 이렇게 하여 모든 벌초는 그날 마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어떤 분은 맡은 곳을 하루 전에 시작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이 함께한 벌초는 이곳에 8대조 묘소가 있은 이후부터 1980년대 중반 그러니까 1985년 어머님 운명하신 이후 1986년까지 이루위진것입니다.

 

저는 마을 분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이제 세태는 많이 변하였습니다. 많은 분이 고향을 떠났고 새사람으로 채위졌습니다. 지금까지는 구시대의 인습에 젖어 늘 하던 데로 그렇게 하여왔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뀐 것입니다. 그때는 예취기가 처음 등장하는 초기였습니다. 저는 마을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하였습니다. 지금까지는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제가 하겠습니다. 마침 예취기도 나왔다고 하니 이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어려움이 있으면 도와주겠노라고 하시는 마을 분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저는 서울로 향했습니다.

 

예취기를 구입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다.

서울 청계천의 공구상가를 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국산은 아직 없었던 시절이였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일제인 가이와 예취기를 한 대 샀습니다. 처음 나온 시기이긴 하지만 전국에서 기계공구가 밀집된 곳이니 어렵지 않게 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예취기를 짊어지고 고향으로 왔습니다.

 

유난히도 잡초가 우거진 8대조 김달행 묘역

가능하면 잔디를 새로 입히고 싶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입니다. 이제 1987년 음력으로 7월 20일, 저는 집 옆 산소의 풀을 깎기 시작하였습니다. 웽! 웽~기계소음 요란하게 난생처음으로 기계로 풀을 깎기 시작합니다. 처음이라 서트르지만 그런 데로 재미를 붙여가며 잡초를 제거합니다. 8대조 묘역에는 유난히도 잡풀이 우거져 있어 기계에 풀이 감기고 그러면 잠시 감긴 풀을 뜯어내고 다시 시작합니다. 기계가 인력 5인 이상 몫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양면 날이 잡초를 제거하고 그렇게 하다 보면 휘발유가 떨어져서 재급유하고 날도 갈아끼고 하여 계속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잡초 속에는 벌집이 있습니다. 벌들이 날아와서 쏘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벌초를 하다 보면 풀 속에 숨겨진 돌을 건드리기도 하고 때로는 흙에 날이 박혀 반동에 의해 손잡이 용 대가 나의 가슴을 치기도 합니다. 흙먼지가 일어 잔모래가 순간 눈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나는 그로 인하여 안과병원 치료를 몇 번 받기도 하였습니다. 여주군 흥천면 효지리 산소까지 이곳으로 모셔왔기에 벌초분량은 더욱 많아졌습니다. 이렇게 하여 풀을 깎는 데만 꼬박 5일 그리고 풀 걷고 상돌 등 돌 틈에 잡초와 잡목 등 제거에도 2일 정도 걸립니다. 

 

이제 저와 우리 아이들이 벌초를 단독으로 한 지도 24년이 흘러갔습니다. 지금은 벌초하는 시기도 조금 늦추웠습니다. 음력과 양력은 대략 한 달 정도의 차이가 있는데 음력 7월 20일 그때 하면 풀이 클 시기가 남아있어 양력으로 9월 10일경으로 늦추웠습니다. 벌초를 하다 보면 팔이 아프고 몸은 땀으로 뒤범범됩니다. 그래도 선영을 아름답게 꾸며야 한다는 사명감이 모든 것을 잊게 합니다. 다른 문중 벌초에는 그 자손들이 모두 모여 함께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저희 문중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나의 사명이려니 하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인터넷 세상이고 모든 것이 새로워졌습니다. 역사상 유명인사들의 묘역을 찾아 사진도 올리고 글을 쓰는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분들을 봅니다. 올해에도 7월25일 한참 풀들이 우거진 시기에 이곳 모습을 담은 모습을 보았습니다. 왜 하필이면 그때 풀이 우거진 시기에 이곳 모습을 공개하는 것일까? 부끄러운 모습을 자책하면서 그러나 조상님을 향한 저의 마음은 사랑 자체임을 말씀드립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조상님을 바로 모심인가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내 후대에는 그리고 100년 그 이후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나를 둘러싼 현실은 모든 것을 어렵게 합니다. 하느님 저에게 지혜를 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