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는 선 안동과 후 안동이 김씨가 있는데 시조가 다르다
선 안동김씨는 신라 경순왕 넷째아들의 둘째 아들인 숙승을 시조로 하고 고려 때 장수 김방경을 중시조로 하며
인조때 김자점, 독립지사 김구 등이 이집안 출신이다
후 안동김씨는 삼태사 중 하나인 김선평의 후예로 그의 9대손 되는 김삼근이 비안 현감에서 물러나면서
이곳 소산(시미마을)에 정착하여 입향조가 되니 그 후손을 비안공파라 한다
비안공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계권은 한성부 판관을, 둘째 계행은 대사성을 지냈다
둘째 아들 김계행은 무오사화때 부당함을 상소하고는 소산으로 낙향하고 이후 길안 묵계로 옮겨 그의 후손들은 거기에 칩거하게 된다
무계 종택, 만휴정이 모두 그 분의 유적이다
그러나 맏아들 김계권은 출세길로 나아가 다섯아들 중 막내인 영수가 영천군수를 지냈고
김영수의 아들 3형제 중 맏이 영과 둘째인 번이 모두 문과에 올라 이때부터
중앙에 진출하여 명문 토대를 쌓는데 특히 둘째 김번의 후손들은 서울 장동의 청풍계(청운동)에 세거하게 된다
이후 장동파는 크게 번성하여 청음 김상헌의 후손중에 왕비가 셋, 임금사위가 둘, 정승이 15명, 판서가 51명
관찰사가 46명, 시호를 받은 이가 49명이 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들이 세도 정치의 주역인 안동김씨 집안이다
이에 반해 맏이 김영의 후손은 소산으로 낙향하여 조용히 살았다.
그리고 텃밭을 지키며 고고하게 세거해왔다
서울장동파는 소산을 본향으로 잊지 않았다. 김상헌이 병자호란때 항복문서를 찢고 단식으로 척화를 주장하다 여의치 않자
이곳으로 내려와 칩거하면서 '청나라를 멀리 한다'는 뜻으로 청원루라 이름짓고 심양으로 끌려갈때 까지 여기서 살았다
결국 세도 안동김씨와 안동양반과는 그 입지와 삶의 방식이 오히려 정반대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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