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 글 출처
경기여성인물을 찾아서1-그대의 맑은 향기 사라지지 않으리/ 경기도, 2001,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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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나씨(1630-1703): 여섯 아들을 모두 훌륭한 학자로 길러낸 교육자
조선시대 아들과 손자를 훌륭히 키워낸 부인을 거론하자면 여럿이 있겠으나, 그 가운데 단연 으뜸으로 받들여져야 할 사람은 바로 안정 나씨이다.
나씨는 영의정이었던 남편 김수항과 영욕을 함께 했던 내조자로도 훌륭했지만 김창집(金昌集 : 영의정), 김창협(金昌協 : 예조판서, 대제학), 김창흡(金昌翕 : 대문장가), 김창업(金昌業 : 『노가재연행록』의 저자), 김창집(金昌輯 : 학자·문장가) 등 육창(六昌)이라는 여섯 학자를 훌륭하게 성장시킨 공로 때문에 신사임당에 버금가도록 유명해진 분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안동 김씨는 대체로 이들의 후손들이 얻어낸 명성이었다.
효성이 지극하고 인자한 인품을 지녀…
삼연 김창흡의 어머니 안정 나씨는, 목사를 역임한 성두(星斗)의 딸이며, 참의 만갑(萬甲)의 손녀이며 보덕(輔德)을 지낸 급(級)의 증손녀였다. 친정어머니는 경주 김씨로 외할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남중이었는데 개성에서 경력의 벼슬을 지내던 1630년 안정 나씨를 낳았다.
나씨를 낳을 때 매를 꿈꾼 태몽이 있어 반드시 뛰어난 명성을 얻을 자손이 태어날 것임을 기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유년시절부터 인자하고 민첩한 지혜가 있었고, 관찰력이 매우 뛰어났었다. 열 살 무렵부터는 벌써 어른들을 도와 음식상을 차렸는데, 이때에도 알맞고 적당하게 하여 어른들의 뜻에 맞게 할 수 있었다. 친정할머니 정부인은 수몽 정엽선생의 딸로 어질고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는데, 나씨가 운세를 돌이킬 수 있는 사람으로 될 것이라 하며 반드시 귀한 신분이 되리라고 기대했다.
할아버지 나만갑이 영주에서 돌아가시자, 할머니 정부인이 오래도록 슬퍼했는데 안정 나씨가 예쁘고 유쾌한 모습으로 곁에 있으면서 온갖 방법으로 즐겁게 해드리니, 부친인 목사공 나성두는 부모 공양하는 효녀라고 칭찬했다.
열여섯 꽃다운 나이로 김수항에게 시집 와서 시아버지 동지공(同知公) 김광찬(金光燦)을 잘 섬긴 나씨가 항상 한스럽게 여겼던 것은 시어머님을 모실 수 없었음이니, 그 부분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목이 메어 울었는데, 죽기 전까지 언제나 그렇게 했다.
남편 김수항은 젊은 시절에 상당히 몸이 마르고 허약했는데 너무 일찍 벼슬길에 올라, 안정 나씨는 항상 염려하는 마음으로 남편을 받들어 모시며 하루라도 긴장을 푼 적이 없었다. 김수항은 관리의 선발을 맡은 이조의 책임을 10여 년이나 맡았으나 집안이 물처럼 깨끗하여 한 사람의 잡인도 묵은 적이 없으니 안방 살림을 아주 깨끗이 처리했던 나씨의 덕이라 할 수 있었다.
나씨는 가족과 가문에 영화와 복록이 모아질 때마다 당장 기뻐하지 않고 얼굴에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남편 김수항이 끊임없이 승진하여 정승의 지위에까지 오르자 살얼음을 밟듯이 두려워하고 처신을 더욱 신중하게 하고자 노력하며 살았다.
또한 그녀의 사람을 섬기고 아끼는 마음은 한없이 넓었다. 시아버지인 동지공이 온갖 복을 누리고 일흔이 넘게까지 사시는 복된 처지에서 돌아가셔서 모두 경사롭게 여겼는데, 나씨는 너무 슬피 울어 조문하던 사람들도 애처롭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남편 김수항조차도 말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기들이 죽거나 좋지 않은 일을 당하면 해가 넘도록 웃음을 잊었고, 심지어 남녀 종들의 죽음이나 이웃사람들이 상을 당하는 경우에도, 비보를 들으면 오열하며 식음을 폐했으니, 착한 마음은 보통 사람들의 정보다 배나 더했다고 할 수 있다.
일에는 정성을 쏟고, 의(義)로써 훈계
나씨는 의지력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나고 일을 귀찮아하는 법이 없었다. 제수품 장만하는 일에는 더욱 부지런하여 제사가 다가오면 질병에 아랑곳하지 않고 준비물을 살피고, 더러는 서서 새벽까지 보내면서 노비나 심부름꾼들을 채근했다. 모두 밝은 옷을 입고 일을 하도록 했으며 가마솥을 씻는 데서부터 땔감을 나르는 일에 이르기까지 정연하게 차례가 있었고, 제물로 바쳐야 할 물품은 낮은 말로 호칭하지 못하게 하고 존칭을 쓰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제기에 담아놓고 보면 빛나고 깨끗하며 향기를 뿜어 사람의 손을 통해서 만들어낸 물건 같지가 않았으니, 정말로 정성을 다 바친 결과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자식들에게는 의로써 훈계하셨으니 어릴 때부터 작은 잘못이라도 김수항이 모르도록 덮어 주지 않고 반드시 벌을 받게 했으며, 비록 어른이 되어서도 마음에 합당하지 않은 일이 있으면 엄하게 질책하며 모른 척하지 않도록 했다. 평상시에 자식들에게 기대했던 바는 탁월한 업적을 세워 비천한 데로 빠지는 것을 면해야 한다는 것이어서, 여러 손자들을 두루 사랑하면서도 뛰어난 재주에는 기뻐하고 우둔한 머리에는 애석하게 생각했다. 가장 미워하는 것은 게으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어서, 항상 이런 뜻으로 여러 며느리들을 힘쓰게 했다. 비록 병환이 낫지 않고 오래 끌어 문을 닫고 있는 날이 많았으나 안팎의 자잘한 일까지 명확히 알고 있어서 속일 수가 없었다. 아랫사람을 거느림에는 비록 엄격했지만 춥거나 배고픈 사람에게는 극진한 마음으로 가슴 아파했다. 술찌끼나 콩죽을 나눠 먹이면서 혹시라도 균등하게 하지 못하면 곧바로 며칠간씩 미워했다.
그리고 항상 “매 때리는 일과 술이나 밥을 제대로 먹게 하는 일은 당연히 병행해야 한다”
라고 강조했다. 찢어진 상자나 낡은 빗자루에 이르기까지 모두 모아서 유용하게 쓰도록 했으며, 광의 문단속은 조심스럽게 하면서도 베풀어 구제하는 데는 즐겨 했으니, 더러 입으로 미처 하지 못한 말이 있더라도 미간을 살피고서 하고 싶은 일에 부응하는 사람도 있었다. 더구나 노고에 보답하려고 베푸는 일은 날짜가 오래 되었다는 이유로 해서 조금도 소홀하게 하지 않았다.
대체로 인서의 정신을 모든 사물에 실현했고 엄밀하게 집안을 유지하여 진실로 종족들이나 친척들이 숭앙하던 바였으나 그것은 오히려 평상시 모범적인 생활태도에서만 그랬지, 그분께서 갑작스러운 변란을 당해 의리로 처리했던 일이나 분수 밖의 영특했던 행실에 대해서는 반드시 사람마다 다 알고 있지는 못했다. 나씨의 남편 김수항은 진도에 유배되어 있던 시절, 아들 김창흡이 어머니에 관한 일을 여쭙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너의 어머니는 본디 영민한 자질로 사리에 밝게 통했다. 우리 아버님을 섬기면서 충성스러운 봉양을 극진하게 하여 아주 마땅하게 여기시고 매우 사랑하셨었다. 젊은 날에 나는 몸이 여위고 약해서 평생의 근심을 안고 있었으니 어떻게 하루인들 마음을 풀어놓고 지내는 것을 볼 수 있었겠느냐? 재물과 이익에 대해서는 벗어난 듯 구차함이 없게 하고 욕심을 줄이고 남과 같은 등급이 되라고 깨우쳐 줌은 그보다 위에 갈 사람이 드물 것이다. 중년 이후의 일들이야 너희들이 목격했던 바이나 더러는 간략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그의 본심을 알고 있다.”
남편의 유서를 늘 품에 지니고 살아
1689년의 큰 환란(기사환국)을 겪게 되어 김수항은 진도로 유배되어 죽음을 당했다. 남편 김수항은 부인 나씨가 성격상 이러한 상황을 참아내지 못할 것을 알고는 진심을 다해서 넉넉한 마음으로 대하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는데, 그 내용은 “구차스럽게 남아서라도 여러 자식들이 의지하게 하는 데 힘쓰라”는 것이었다. 한마디 말로는 충분치 못한 듯, 끝내는 한 장의 종이에다가 글로 써 가지고 이별을 고했으니, “여러 아이들을 온전히 키우지 못하면 지하에서 만나지 맙시다”라는 내용이었다.
안정 나씨는 가슴을 치고 이마를 조아리면서도 그 유서를 받았다. 입관 때 널의 곁에서 아들들과 함께 몸을 굽히고 머리를 조아려 슬픔에 겨워 가슴을 치던 나씨는 갑자기 울음을 그치고 결연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여기가 어느 곳인데 이런 혹독함을 당했느냐? 그러나 만일 서울에 있었다면, 철사줄로 지역까지 구획해놓거나 십자로의 길도 빙빙 돌아서 가야 할 정도로 온갖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저 흉측한 사람들이 더욱 기세등등하지 못하도록 할 방법이 없을 것 아니겠느냐? 지금이야 그런 것은 모면한 데다 편안하게 운명하셨으니 저들의 흉악스러움으로도 더 이상 할 짓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생각과는 달리 너희 아버지께서는 안온하고 순조롭게 받아들였으니, 이처럼 떳떳할 수 있겠느냐? 나와 너희들은 마땅히 유언을 잘 받들어 죽지도 말고 더욱 자신을 가꾸는 일에 힘쓰도록 하자.”
김창집을 비롯한 자식들은 뜻밖의 일을 당한 데다가 어머니를 위로해 드릴 말이 없어서 난감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듣고서야 다행히 김수항의 시신을 거두어 뭍으로 나왔다.
기사환국으로 숙종이 김수항의 집안의 재산까지 몰수하도록 했다는 소리도 있고, 더러는 형벌이 여러 아들들에게까지 미칠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또 조정에서는 이미 무거운 법으로 처벌키로 확정해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친지들조차 김수항의 시신을 선산에 안장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등 모두가 어렵게 여기고 의문을 제기하여 소란함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족들은 마지못해 덕평으로 돌아가 머무르며 사태의 변화를 보면서 진퇴의 계획을 세우던 중 마침내 김수항의 시신을 양산에 안장할 수 있었으며, 흙을 덮은 지 오래지 않아 김화에 모실 수 있게 되었다.
숙종 27년인 1701년에 이르러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무술옥사(戊戌獄事)와 여러 인물들의 행동이 폭로되었다. 동평군 이항과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가 연결되었고, 민암과 민종도는 뒤늦게 역적죄로 처벌되었으니, 무릇 이들 서너 사람의 큰 간사꾼들이 처음부터 국모를 해치기로 모의하고 김수항을 해치기로 했던 사람들인데, 남구만이 보호할 수 없었음은 마치 귀신이 벌을 내린 것과 같았으니, 하늘의 뜻이 그리 정해진 것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큰아들이 의금부의 관리로서 시종일관 국문하는 곳을 살피면서 직접 이항과 장희재가 사형 당하는 것을 보았으니 이 역시 하늘의 뜻이었다.
식사를 나르던 여종이 연속해서 소식을 전해오자 나씨는 통쾌한 얼굴로 아들 창흡을 돌아보면서, “나와 너희들이 마음을 썩힌 지 10여 년, 다행스럽게 이런 날을 보게 되니 너의 형이 벼슬을 하는 것도 말할 수 없게 되었구나 라고 했다. 큰아들이 나라의 명령을 부지런히 이행하면서 두 고을의 수령이 되었지만, 나씨는 “내 어찌 고을살이 아들의 봉양을 받으랴?” 면서 함께 가기를 승낙하지 않았고, 뒷날 김창흡 외삼촌의 간곡한 권유로 강화도와 개성의 두 도읍지에만 따라가 봉양을 받았다. 그러나 평소부터 앓고 있던 지병이 심해져, 마침내 숙종 29년인 1703년 6월 22일 서울의 본댁에서 세상을 떠나자, 자식들은 그녀가 항상 몸에 지니고 있던 남편 김수항이 써준 결별의 글은 관에 함께 넣어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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