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직계조상님

향곡 안동김씨 문정공파 기증유물 기획전시회에 붙여

추읍산 2011. 10. 8. 13:47

 

아랫글은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산 국민관광지 안에 있는 양평 친환경농업박물관에서 있을 위 제목의 전시회(예정: 2011, 11, 11~2012, 2, 26)에서 배부될 책자에 나올 필자의 글로 아래 공개합니다. ○ 추기: 필자가 양평군에 보낸 원문으로 일부 줄여 교정되었으나 취지는 같습니다. ----------------------------------------

 

文正公(淸陰 金尙憲)派 13世孫 金澈東

 

양평군에서는 2009년 安東金氏 文正公派 寄贈遺物이라는 제목으로 도록을 발간하였고 그때 인사말을 통해 저의 직계조상님과 그 형제분을 소개하여 드린 바 있습니다. 그로부터 2년, 이번에는 제가 기증한 유물을 토대로 기획전시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도록을 출간하여 주신 것도 감사한 데 더하여 펼쳐지는 모습으로 저희 문중을 알리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를 마련하여주신 양평군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에도 문중사를 깊이 있게 추적하고 싶지만, 한정된 공간과 쓸 글을 이미 2009년 - 기증유물 도록에서 표현하였으므로 본 장에서는 간추리고, 소개하고 싶고 기증유물에 많이 포함된 향리 선영의 정점(頂點)이신 찬성공 김달행(贊成公 金達行) 이하 직계사(直系史)를 代를 이어 쓰겠습니다. 더 알아보고자 하시려면 집중적으로 공개한 http://blog.daum.net/0113508344에서『안동

김씨』『기증유물 도록』 편 등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기증 동기는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모든 국민이 역사를 공유하여야 하는 원칙

둘째, 개인이 소장함으로써 오게 되는 훼손분실을 막고

셋째, 과학적으로 관리되어 영구보존이 가능하며

넷째, 갖고만 있다면 한낮 작은 종이나 물건에 불과하겠지만 연구하고 발표하여 그 가치가 더욱 빛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각인된 안동김씨(시조 金宣平)는 숱한 명현과 충신을 배출하였음에도 조선조 말 세도정치(勢道政治)라는 틀에 갇혀 버려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 보이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에 필자는 안동김씨 하면 떠오르는 세도정치부터 알아보고자 합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유사 이래 한때를 주름잡았던 분은 후세에 의해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유의하여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을 평가할 때는 그 생존한 때로 한정하여야 하고 자신이 그때 모습 속으로 빠져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수없이 쏟아지는 오류투성이의 글을 보면서 깊이 있는 연구 없이 진실은 가려지고 세태(世態)에 편승하려는 글이라면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영안 부원군 김조순입니다. 그분은 자애(慈愛)로우며 곧고 밝은 분으로 정조의 유탁(遺託)에 의해 충심(忠心)으로 순조를 보필하시고 1832년(순조 32)에 별세하셨습니다. 알지도 못했을 철종 대왕 재위기간(1849~1863)의 부정적인 의미의 세도정치를 자꾸 김조순과 연결 지어 맑은 모습을 흐리려 함은 생존한 때로 한정하여야 하는 평가원칙을 무너트리고 이는 진실에 먹칠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영안부원군 김조순(1765~1832 | 자: 士源 | 호: 楓皐 | 시호: 忠文) 김조순의 순조대왕 보필 시(1804~1832) 정경(正卿, 정 2품 이상)을 하신 안동김씨 인사들의 출사모습은 어떠하였을까?

볼 곳: http://blog.daum.net/0113508344/4719142

 

-- 어릴 때부터 기량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성격이 곧고 밝아서 정조의 사랑을 받았다. 왕세자의 보도(輔導 : 보필하여 인도함)를 맡았고, 국구(國舅 : 왕의 장인)가 된 뒤로는 왕을 보필해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요직이 제수될 때마다 사양하는 것으로 보아 권세를 누리기 위해 노력한 인물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시벽의 당파나 세도의 풍을 형성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척족 세력들이 후일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출처: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그의 평가를 생존한 때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세도정치(勢道政治)

필자는 철종대왕 때(1849~1863)의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부끄러워합니다. 한 문중으로 나라의 모든 권력이 집중되었다는 것은 공평하여야 할 인사제도를 무너트렸으며 견제세력이 없는 정권은 결코 정의로울 수 없다는 가리킴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찬성공(贊成公 金達行)의 8대 종손으로서 머리 숙여 깊은 사죄를 드립니다. 그리고 저부터 정직한 삶 속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또 그렇게 다짐함으로써 국가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흥선 대원군 집권 이후의 안동김씨

많은 사람이 1863년 12월 흥선 대원군 집권 이후 안동김씨 세도가들을 조정에서 쫓아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크게 다릅니다. 연로(年老)하신 주류(金左根, 金興根)는 떠났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핵심 2세인 김병주(金炳㴤), 김병지(金炳地), 김병기(金炳冀), 김병시(金炳始), 김병덕(金炳德), 김병학(金炳學), 김병국(金炳國), 김병교(金炳喬), 김병필(金炳弼) 등과 그 후손인 김정규(金定圭), 김석규(金錫圭), 김용규(金用圭), 김용규(金容圭), 김종규(金宗圭) 등은 흥선대원군 집권 시절(炳 자 돌림)고종 친정 이후(炳, 圭 자 돌림)에도 계속 출사하여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인재는 계속 등용하려는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의도로 보입니다. 참고: 고종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비롯한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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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시조 태사공 김선평(金宣平)

신라말 고창(古昌: 지금의 안동)성주로 계셨으며 권행(權幸, 안동 권씨 시조), 장길(張吉, 안동 장씨 시조)과 더불어 삼태사로 불립니다. 고려 개국공신으로 고창 땅에 침입한 후백제 견훤의 대군을 병산(甁山) 전투에서 대파하여 그 이전까지 수세에 밀리던 왕건(王建, 847년 ~ 918년, 재위: 907년 ~ 918년)을 도와서 고려 개국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청백리와 충신의 반열(班列)에 오르다.

조선 초기, 10세인 김계행[金係行 1431(세종 13)~ 1517(중종 12) | 자: 取斯 | 호: 寶白堂 | 시호: 定獻] 선조님은 곧고 청빈한 삶으로 모두의 사표(師表)로 되셨으며 이외에도 수많은 문중 선현(先賢)이 계시지만, 필자의 직계와 그 형제분으로 한정하여 쓰겠습니다. 12세인 서윤공 김번(庶尹公 金璠 1479~1544 |자: 文瑞로 필자의 16대조)께서 오랜 세거지인 안동을 떠나 서울로 이주하면서 명문가로서의 발판을 마련하여 이른바 장동김씨(壯洞金氏)라는 토대를 닦았습니다. 그 집터[청와대 옆 무궁화동산 이웃인 궁정동 2번지(현 로마교황청 대사관)로 무속헌 터 라고 불립니다.)]와 묘소(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 마을)는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꼽히며 오늘날에도 많은 탐구자가 찾는 명소로 되었습니다. 그 후손에서 수많은 일꾼과 충신이 나왔는데 금관자 서 말이라는 말도 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서윤공의 증손자 대에 와서 15세 김상용(金尙容 1561~ 1637 | 자: 景擇 | 호: 仙源 | 시호: 文忠)과 김상헌(金尙憲 1570~ 1652 |자: 叔度 | 호: 淸陰 | 시호: 文正) 형제는 저희 문중을 조선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도약시킨 기초를 쌓으신 분입니다. 두 분은 병자호란의 국난에서 우국충정하신 분으로 잘 아시리라 생각되어 더 쓰지 않겠습니다.

 

文正公派

-始祖: 金宣平-----------15 世 13代祖 상헌尙憲---12代祖 광찬光燦(生父 尙寬)---|壽增, 壽興(出 伯父 光爀 后)| 11代祖 수항壽恒| 壽徵, 壽應, 壽稱, 壽能|---10代祖 창집昌集| 昌協, 昌翕, 昌業, 昌緝, 昌立|---9代祖 제겸濟謙| 好謙(出 從叔 昌肅 后)---|省行, 竣行(出 季父 好謙 后), 元行(出 從叔 崇謙 后)| 8代祖 달행達行| 坦行, 偉行|---7代祖 이기履基| 履中, 履慶|---6代祖 용순龍淳| 明淳(出 季父 履慶 后)|---5代祖 유근逌根(生父 祖淳)---高祖 병주炳㴤(生父 弘根)---曾祖 정규定圭---祖父 익진翼鎭---父親 조한朝漢---28世 철동澈東(本人)

 

청음 김상헌의 시호가 文正이며 정점(頂點)으로 그 후손을 문정공파라고 합니다. 필자는 13세손으로 직계조상님과 그 형제분 가문이 안동김씨를 대표적인 명문가로 인식하게끔 한 구심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사환국(己巳換局)과 삼수(三壽)의 수난

청음 김상헌의 손자이신 이른바 삼수(三壽)로 불리는 분이 [김수증(金壽增 1624~1701 | 자: 延之 | 호: 谷雲)] [김수흥(金壽興 1626~ 1690 | 자: 起之 | 號: 退憂堂, 東郭散人 | 시호: 文翼)] [김수항(金壽恒1629~ 1689 | 자: 久之 | 호: 文谷 | 시호: 文忠)] 삼 형제입니다. 숙종(1661~1720) 15년, 기사환국[1689년 후궁 소의 장씨(昭儀張氏) 소생 윤(昀)의 원자정호(元子定號) 문제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정국(政局)을 장악한 사건을 가리킴]으로 김수흥과 김수항 형제는 그 화를 피하지 못하시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때 100여 명의 서인이 사형, 유배, 삭탈관직당하였다고 합니다.

 

이를 후회한 숙종은 1694년 송시열, 김수흥, 김수항 등을 복권하고 김수증에게 출사를 종용하지만, 그분은 사화(士禍)로 점철되는 정국에서 오는 환멸과 형제를 잃은 슬픔으로 더는 출사하지 않고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삼일리와 용담리에 펼쳐진 곡운구곡(谷雲九曲)을 터전으로 하시고 문학을 연구하고 자연에 심취하셨는데 78세로 운명하시기까지 30년 가까이 은둔 생활을 하십니다. 곡운께서 별세하신지 300년이 지난 지금 화천군에서는 그 정신을 기리고자 유적지를 복원 중이고 문화유적 답사코스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신임사화(辛壬士禍)는 일묘사충(一廟四忠)을 불러왔다.

1720년 장희빈이 생모(生母)인 원자 윤(昀)이 33세로 숙종의 뒤를 이어 조선 제20대 왕으로 즉위하니 이분이 경종대왕입니다. 경종은 조용하시고 정이 많으시며 형제간에 우애가 깊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병이 많고 후사가 없는 불행하신 분 이 시기도 합니다. 노론은 연잉군(후에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건의하고 실행시켰으며 삼종의 혈맥을 지키라는 숙종의 유교(遺敎)를 받들게 되지만, 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세제 대리청정 문제로 1721년과 1722년에 걸친 신임사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김수항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사약을 받으신지 33년이 흘렀을 때로 직계(直系)이신, 3대(창집~ 제겸~ 성행)에 걸쳐 목숨을 잃는 화를 당하셨는데 이는 선대(김수항)까지 4대에 걸친 화(禍)로 명부조, 일묘사충, 4대불천지위, 4대충신(命不祧, 一廟四忠, 四代不遷之位, 四代忠臣)이라는 유일무이한 충절로 기록되지만, 흘린 피가 너무나도 커 슬픈 마음을 금 할 수 없습니다. 이때 참형(斬刑)을 받은 자가 20여 명, 장사(杖死)된 자가 30여 명, 그들 가족으로 교살(絞殺) 된 자가 13명, 유배된 자가 114명,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 연좌(連坐)된 자가 173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朝鮮王朝) 때는 서로 죽이는 사화(士禍)가 많이 일어났는데 이는 대의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이 없는 왕조국가에서 붕당정치(朋黨政治)가 낳은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몇 달 전인 7월 21일 국립 고궁박물관을 탐방한 바 있습니다. 그곳에서 숙종께서 김수항과 그 아들 김창집에게 써 준 돌판에 새긴 글을 보면서 두 분을 대하는 숙종의 따듯한 사랑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도록 김수항을 아끼고 사랑한 숙종이지만, 그 명에 의해 사약을 마셨고 뒤늦게 후회하는 마음을 아들 김창집에게 내렸습니다. 그러나 다음 대인 경종 2년(1722년)에 김수항의 대를 이은 김창집, 김제겸, 김성행까지 죽음에 이르는 화를 당하셨으니 이런 일묘사충의 피눈물이 흐른 가문사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보기: 아래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만난 숙종과 김수항: http://blog.daum.net/0113508344/4720053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만난 숙종과 김창집: http://blog.daum.net/0113508344/4720054  

 

육 창(六 昌)

문곡 김수항은 육 형제를 두셨는데 모두 당대의 대학자로 칭송되어 이른바 육 창으로 불립니다. 순서에 의해 김창집[金昌集 1648~1722 | 자: 여성 (汝成) | 호: 몽와(夢窩) | 시호: 충헌(忠獻)], 김창협[金昌協 1651~ 1708 | 자: 중화(仲和) | 호: 농암(農巖), 삼주(三洲) | 시호: 문간(文簡)], 김창흡([金昌翕 1653~ 1722 | 자: 자익(子益) | 호: 삼연(三淵) | 시호: 문강(文康)], 김창업[金昌業 1658~ 1721 | 자: 대유(大有) | 호: 노가재(老稼齋)], 김창즙[金昌緝 1662~ 1713 | 자: 경명(敬明) | 호: 포음(圃陰)] , 김창립([金昌立 1666~ 1683 | 자: 탁이(卓而) | 호: 택재(澤齋)]입니다.

 

석실서원(石室書院)

김상헌과 김상용의 도덕과 충절을 기리고자 1656년(효종 7)에 건립되고 1663년(현종 4) 石室祠라는 편액을 하사받고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저희 문중의 정신적 바탕이며 서울 경기지역 교육의 중심지인 이곳은 조선 후기, 학문연구와 교육을 통해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습니다. 진경 문화와 북학사상을 꽃피운 원천으로 오늘날 서울대학교가 연상됩니다.

 

직계조상 묘역 안내(굵은 표시는 직계)

●경북 안동시: 시조 김선평(金宣平)으로부터 11세 영수(永銖)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마을: 12세 김번~김생해~김대효~김상헌~김광찬 등 서윤공파 종계(宗系)와 문충공 김상용 종계, 이웃한 율석리는 휴암공 김상준 종계 ●위 이패동 돌누께 마을: 17세 김수항과 15세 김상관(金尙寬: 김광찬의 생부), 김수흥 ●여주군 대신면 초현리 아랫새재: 18세 김창집~김제겸등 문곡 김수항 종계 ●양평군 개군면 향리 아랫상골: 필자가 맡은 선영으로 20세 찬성공(김달행) 종계 ●개군면 계전리와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 21세 김이중~김조순(김유근의 생부) 종계 ●인천시 계양구 굴현동과 황해도 개성: 21세 김이경~김명순(혈통상 고조 김병주의 조부) 종계

 

양평군 개군면 향리 선영

청음 김상헌(13대조)으로부터 죽취 김제겸(9대조) 까지는 2009년 발행, -- 기증유물 도록에서 깊이 있게 글을 썼고 널리  알려진 분들입니다. 필자는 찬성공(김달행)의 8대 종손이고 그 후손들의 시대적 비중을 생각하고 기증된 유묵도 있어 모두 추적하고 싶으나 제한된 공간으로 직계중심으로 쓰고 구전(口傳)을 더 하고자 합니다.

 

시조 김선평(金宣平)

 

김상헌(金尙憲)-광찬(光燦)-수항(壽恒)-창집(昌集)-제겸(濟謙)-달행(達行)

 

20세 金達行(1706~1738)

21세
1738~1756
履中
1736~1793
 履基
1724~1790
22세 明淳
生父 履基

1759~1810
祖淳
1765~1832
龍淳
1754~1823
23세 興根 1796~1870 應根1793∼1863 弘根 1788~1842 左根 1797~1869 元根
1786~1832
逌根
生父 祖淳
1785~1840
24세 炳德
1825~1892
炳始 1832~1898 炳溎 1824~1855

炳冀
生父 泳根
1818~1875

炳地
1830~1888


炳㴤
生父 弘根
1827~1887

25세 宗圭 1862~1922 容圭 1864~1902 性圭 1846~1896 用圭 1867~1927 錫圭
生父 炳洙
1864~1905
定圭 1862~1903
필자의 曾祖

 

안동김씨 문정공파 김달행 가문 세계표(은 테두리필자의 직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찬성공(金達行)의 후손은 조선조 말 정치, 사회, 문화에서 차지하는비중이 막중합니다. 履자 돌림에서 보면 정조 때 외직으로 출사하신 김이기(광주목사)와 김이중(서흥부사)이 계십니다. 淳자 에서는 김용순은 정조, 순조 때 주로 지방관(황주목사 등)으로 근무하셨고 잘 아시는 김조순은 이미 기술(記述)하였습니다. 그리고 김명순은 정순왕후 수렴청정기인 1801년 급제하시고 1810년(순조 10) 함경도 관찰사로 근무 중 별세하셨습니다. 根자와 炳자 돌림이 세칭 세도정치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炳자 돌림에서 보면 32세(1855년)로 황해도 안악 군수로 재직 중 운명하신 김병계(金炳溎)를 빼놓고는 모두 흥선 대원군과 고종에 의해 재신임 되어 정경(正卿: 정 2품 이상)으로 조정(朝廷) 최일선에 서 계셨고 규(圭)자 돌림 또한, 출사(出仕)하고 있었음을 고종 실록은 전하고 있습니다.

 

향리 선영의 頂點이신 贊成公 金達行

1706년(숙종 32) 죽취 김제겸과 증 정경부인 은진송씨의 사이에서 넷째(위로 峻行, 元行께서 양자로 出家하셔서 계통상 둘째) 아들로 태어나시고 1738년(영조 14) 운명하십니다. 초장은 여주군 등신면(현 대신면) 초현리 선연으로 9년 만인 1747년(영조 23) 정묘년에 배(配) 한산이씨께서 운명하시자 북쪽 10리 거리인 추읍산하 향곡리(개군면 향리)로 이묘하고 합장 되시었습니다. 한산이씨는 목은(牧隱)의 후예로 감사 집(潗)의 따님이십니다. 

 

 

일묘사충과 8대조 김달행

일묘사충에 대하여는 필자가 직계조상님을 소개하는 글인 안동김씨 문정공파 기증유물 도록에서 일묘사충과 이어지는 기사환국, 신임사화에서 기술하였으므로 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찬성공(김달행)의 조부인 몽와(김창집)의 집은 연못으로, 그리고 가솔들은 7개 군으로 유배되었다고 하는데 할아버지께서는 강원도 흡곡입니다. 피맺힌 발자국마다 눈물 고였을 그때 모습이 아른거립니다.  

 

어디서 어떻게 사셨을까?

문곡(김수항) 후손들이 대대로 사셨다는 서울시 종로구 송석원 길 2, 3, 4, 5일대인 옥인동 47번지 육청헌(六靑軒) 자리일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이곳에서 공의 조부인 몽와 김창집, 부친 죽취 김제겸과 큰형님 김성행 이하 6형제가 사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로 가문은 몰락 직전에 놓여 있었습니다. 죽취(金濟謙)는 같은 해 4월 24일 유배지를 찾아온 셋째 아들(金元行)에게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깁니다. --- (내가 이제 죽게 되니) 달행(金達行)은 글공부가 끊기게 되어 가히 애닯지만, 장인 섬기기를 나를 섬기듯 하며 글을 배우도록 하여라. --- 그러나 수보(김달행의 자)께서는 가문의 화(禍)를 보시고 근원이 된 글공부는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김수항, 김창집, 김제겸, 김성행의 4대의 희생은 모두 복권되고 일묘사충(一廟四忠)으로 추앙받게 되지만 이로 말미암은 고통은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33세라는 짧은 삶을 사신 것도 증조(김수항) 이하 4대의 걸친 피눈물을 목격하신 마음의 병이 가져왔을 것입니다.

 

渼湖(金元行 1702~1772 | 자: 伯春 | 호: 渼湖 | 시호: 文敬)께서 향리 선영을 잡으시다.

문정공파 세보 김달행 편, 끝 부분에 兄渼湖公撰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조 대왕의 출사요구를 사양하고 석실서원에서 후진양성을 위해 일생을 보내신 미호(김원행)는 저의 8대조(김달행)의 바로 위 형님이십니다(그러나 농암 김창협의 대를 잇기 위해 당숙 김숭겸에게 입적되었습니다.). 미호께서는 생가의 선영인 여주군 대신면 초현리를 항상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미호집에서 보면 뱃길을 이용하여 여흥(여주)을 다니시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신임사화 때 돌아가신 생가(生家)의 조부(김창집), 부친(김제겸), 큰형님(김성행)의 묘소를 참배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운명한 동생(김달행)이 잠든 곳도 살폈을 것입니다. 이후 개군면 향리에 저희 선영이 자리 잡기까지 渼湖께서 주선하신 것으로 판단하는데 동생의 묘지 이장할 곳으로 미리 잡아둔 듯합니다(참고: 한국 중국 천하명당. 출판사 금란).

 

『수보(脩甫로 김달행의 字) 墓誌銘에 남긴 渼湖(김원행)의 글(출처 : 고전번역원 미호집)

나의 종제 수보는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달행(達行)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고려 태사(太師) 휘 선평(宣平)의 후예로, 좌의정 문정공(文正公) 청음 선생(淸陰先生) 휘 상헌(尙憲)의 5세손이며,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문곡 선생(文谷先生) 휘 수항(壽恒)의 증손이다. 조부인 영의정 몽와 선생(夢窩先生) 휘 창집(昌集)과 부친인 예조 참의 죽취공(竹醉公) 휘 제겸(濟謙)은 모두 임인년(1722, 경종2)의 사화(士禍)를 당하였다. 외조부는 의금부 도사 은진(恩津) 송공(宋公) 휘 병원(炳遠)이 바로 그 분이다.
군(君)은 병술년(1706, 숙종32) 12월 11일에 태어나 무오년(1738, 영조14) 6월 29일에 작고하니, 사망 당시 나이가 33세였다. 군은 자라면서 준엄한 기상이 있어 둘러대거나 악착같이 구는 사람을 보면 그 얼굴에 침을 뱉어주고 싶어 하였다. 성격이 통찰력이 있고 사리에 밝아 사물의 기능에 거의 막힘이 없었으며, 재주 있고 명민한 데다 심지가 굳어 일을 성사시켜 내었기에 아는 사람들은 모두 군을 유용한 인재라고 생각하였다.
군은 전부터 일찌감치 집안이 화를 당한 것을 이유로 벼슬길에 나갈 생각을 접어 평소 그다지 글을 읽지 않았지만, 그와 문자를 논하고 경서(經書)의 뜻을 담론해 보면 정미한 식견이 왕왕 보통 사람들을 능가하였다. 특히 고문(古文)과 예서(隸書)를 잘 써서 고법(古法)에 아주 가까웠는데, 여기에도 그다지 힘을 쏟은 적은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재주를 알 수 있으니, 제대로 배워서 성취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비록 그러나 그의 재주로 집안이 융성하고 국가가 태평한 날에 태어나 시운(時運)을 타고 자립하여 능력대로 역량을 펼칠 수 있었다면 어찌 그가 남만 못했겠는가. 그러나 영해(嶺海)를 떠돌며 고생만 실컷 하고 몹시도 가난하게 살다가 지극한 통한을 품고서 일생을 마쳤으니, 하늘이여!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죽고 나서 3개월이 지난 29일에 여주(驪州) 초현(草峴)의 묘좌(卯坐) 언덕에 안장하였으니, 몽와공과 죽취공의 묏자리 부근이다. 살아서 통한을 머금는 것이 죽어 지하에서 선인(先人)을 만나는 것만 못하니, 이 점은 그래도 낙으로 삼았을 것이다.
군은 황해 감사(黃海監司) 한산(韓山) 이공(李公) 휘 집(潗)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다. 아들 이기(履基)는 현재 상복(喪服)을 그대로 입고 상관(喪冠)을 쓰고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강보를 벗어나지 못했다. 딸은 장녀는 이득상(李得祥)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어리다.
종형 원행이 눈물을 훔치며 명을 쓴다.

 

원행은 눈물을 멈추고 다음처럼 새기노라.

여주 강물 북쪽이여, 우산ⓛ의 양지쪽이여

너는 재주 있었고 풍채도 뛰어났었구나.

원통한 가슴 속 한 품고 묻혔도다.

여기에 내 동생 수보가 숨어 있구나.

아! 슬프도다. 천 년 만 년이로다.

혹시나 농부들이 보고 아픔이 없겠느냐.

 

필자 주 

ⓛ : 여주시 대신면 초현리 몽와(휘 창집) 이하 4대의 묘역이 있는

출처 : http://blog.daum.net/baikchon001/12644308  제출한 원고에는 위 두 곳이 현 양평군 개군면 향리 현 묘소로 생각하였으나  후일 밝혀졌으므로 본란은 교정합니다(17, 6). 또한, 고전번역원의 묘지명을 전부 싣습니다(17, 10).

 

 

 

7대조 金履基[1724(경종 4)~1790(정조 14) | 자: 德汝]

贊成公(김달행)과 한산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찬성공을 향리에 모셔놓고부터 이곳은 저희 선영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한중록에 실려 있는 그때 모습을 보겠습니다.

- 어머니는 형제가 세 분인데 그 중 일찍 홀어머니가 되신 김생원댁(김달행의 부인)을 어머니께서 극진히 섬기셨다. 이모부(김달행)가 돌아가신 후에는 어머니께서 이종(김이기, 김이중, 김이경)들을 자식같이 불쌍하게 여겨 양식과 옷을 대여 주셔서 배고픔과 추위를 잊게 하였다. 그래서 이종들이 항상, “사람마다 어머니가 한 분이지만 우리는 두 분이시다. 라며 감격하였다. 이종 김이기씨는 신유년 늦봄에 외가에서 혼인을 했는데 그때 어머니도 가 계셨다. 막내 작은 어머니이신 이모 송참판댁 장녀도 외가에 가 계셧다가 그 혼인에 화려한 옷차림으로 참석하였다. 나는 그 때 상복 입을 나이가 되지는 않았다. 흰 옷을 입었더니 어머니는 나에게 , “남은 저렇게 곱게 입었는데 너도 저렇게 입어봐라, ” 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 나는 할아버지 상복을 입어야 하니까 다른 아이들과 같이 빛깔있는 옷을 입어서는 안 되지요.” 나는 문밖에도 나가지 않고 몸가짐을 삼갔다. 지금 생각하니 그런 것도 보통 때 가르친 교훈 때문인 것 같다. - 출처: 지경사 발행, 한중록 PP11~ 12.

 

위 내용으로 보아 당시 삶이 상당히 어려우신 것 같았습니다. 영안 부원군(김조순)의 풍고집에서도 어린 시절 집이 가난해서 큰 아버지(金履基)에게 의존했다고 하는데 7대조(김이기)께서도 위 한중록에서 살펴본 바 가문의 경제를 이모[혜경궁 홍씨의 친정어머니]인 한산이씨, 그리고 외가인 한산이씨 댁의 많은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아 상당히 어려운 삶을 이어가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출사하셨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견인차 역할을 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머님은 말씀하시기를 할아버지께서 공부하실 때 스승님이 얼마나 엄격하셨는지 훼초리로 종아리를 맞으시면서 공부에 매진하셨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피가 나고 곪아 터져 구더기가 생기면서까지 공부하는 끈을 놓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기의 집은 가난해서 겨울에 추우면 이기는 두 동생을 옆구리에 끼워 추위를 녹였다 기록되어 있다. -- “미호 김원행이 굶주린 사람을 만나면 이런 말을 건넸다고 한다. 어찌 우리집으로 가지 않는가? 우리 집안중에도 내조카 이기가 제일 어진 사람일세. ” -- 출처: http://blog.daum.net/candor77/112

 

6대조 김용순[金龍淳 1754(영조 30)~ 1823(순조 23) | 자: 施伯]

7대조(김이기)와 청해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1777년(정조 1) 진사시에 합격하고 여러 외직을 거치면서 1821년(순조 21) 황주목사를 마지막으로 귀경하시고 잠시 공조 참의에 이르렀습니다.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4촌 동생인 영안 부원군(김조순)의 장자(김유근)로 하여금 종계(宗系)를 이었음은 당시 종가의 위치와 영안 부원군의 품성을 바로 말해줍니다. 어디에서 태어나시고 성장하고 어떻게 생활하셨을까? 추정 1815년(순조 15)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133번지에 영안 부원군의 옥호정이 있기 전 근처인 삼청동 25번지에 백련사가 마련되었다는데 이곳을 아들(김유근)과 함께 생활 근거지로 삼으셨을 것입니다.

참의공(參議公은 김용순을 가리킴)은 4촌 동생인 영안 부원군(김조순)보다 먼저 출사(出仕)했고 정경(正卿: 정1, 종1, 정2품)을 하실 학덕(學德)과 식견(識見)이 있었음에도 외직으로 전전하시고 끝으로 실권 없는 공조 참의 밖에 이르지 못한 점과 정치 일선에 나서지 않은 점은 무엇을 뜻할까요? 대를 이은 아들(김유근)을 영안 부원군 못지않게 사랑하셨습니다(참고: 김용순이 김유근에게 보낸 편지 1~10). 

 

5대조 김유근[金逌根 1785(정조 9)~1840(헌종 6) 자: 景先 호: 黃山 시호: 文貞]

영안 부원군(김조순)과 청양부부인 청송심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셨으나 찬성공(김달행)의 종계(宗系)를 잇기 위해 종백부(김용순) 앞으로 입후하였습니다. 1832년(순조 32) 이후 한때 군국의 사무를 짊어지셨던 황산은 그러나 학문과 예술을 더 사랑하신 것 같습니다. 정치보다는 천주교 신자로서 그리고 시서화 삼절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필자는 황산이 짓고 추사가 쓴 묵소거사자찬(黙笑居士自讚)이 보물 제1685-1호로 지정되었으며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에 포함된 것을 자랑스러워합니다. 또한, 일본에서 500년 만에 돌아온 유물 중의 하나인 소림단학도(踈林短壑圖)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어 후손으로서 자긍심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황산께서 고사를 읽고 연구하셨던 1800년대 초반 속으로 스스로 빠져들기도 합니다. 황산의 문우들인, 신위, 권돈인, 김정희, 김경연, 유본학과 초의선사도 떠올려봅니다. 또한, 효명세자의 편지와 황산의 글을 통해서 두 분 사이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소망이 있다면, 흩어진 유품들을 한데 모아 연구하였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현실의 벽이 높아만 보여 후손으로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하셨던 황산께서도 삶의 굴곡(屈曲) 속에서 잘못한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깊이 참회(懺悔)하시고 1839년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시고 1840년 12월 17일 운명하셨습니다.

 

고조 김병주[金炳㴤 1827(순조 27)~ 1887(고종 24) | 자: 範初 호: 小山 | 시호: 孝文]

김홍근[金弘根  1788(정조 12)∼1842(헌종 8) | 자: 毅卿 | 호: 春山 | 시호: 文翼]과 정경부인 해평윤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종계(宗系)를 잇기 위해 黃山(김유근) 앞으로 입후하였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랜 관료(官僚)생활에서 오는 엄격함, 불의를 용납 못 하시는 성품과 대쪽같은 분이셨다고 합니다. 저희는 할아버지를 훈동 대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훈동 대신일까? 훈동에 사셔서 그렇게 부른 걸까?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구 휘문고등학교 자리가 할아버지 사시던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삼청동의 백련사(5대조 황산께서 사셨던 곳)는? 이는 연구하여야 할 과제입니다.

 

그때도 아주머니들이 광주리에 물건을 담아 각 가정을 방문 판매하는 그런 행상(박물장사로 필자도 어릴 적에 보았음)이 있었던가 봅니다. 하루는 떡을 파는 박물장사가 할아버지 집에 들어오다가 할아버지와 마주쳤습니다. 그 위엄에 놀란 박물장사는 머리에 인 광주리를 땅에 떨어트리고 혼비백산하였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그 떡 장사를 안심시키시고 땅에 흐트러진 떡을 다 사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지탄합니다. 저는 이에 대하여 후손으로서 깊이 사죄드리고 나아가야 할 마음가짐을 밝힌 바 있습니다. 小山(김병주)도 이 시기 출사한 분이니 세도정치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문중에서 태어나셨다면 어떤 모습이셨을까?

 

小山의 1851년 급제 소식을 들은 순원왕후의 술회입니다. -- 교관[김병주]은 오늘 급제하니 든든합니다. 이전에는 마음이 더 늙어 미리 어떠하였으리라 못하나 아직은 이런 일을 기대하지도 아니하였더니 -- 오늘 옥당에 제수하자는 말이 있으나 그럴 묘리가 없고 내가 조심스러워 그렇게 아니합니다. 옥당을 못할 사람이겠습니까? 잠시 운영입니다. 잘 가르쳐서 남의 무리에 빠지지 않고 집안과 나라가 태평, 영화롭게 지내기를 바랍니다. -- (돌아가신) 두 오라버님[金逌根과 金弘根]도 아시는지 비감합니다. -- 출처:『순원왕후의 한글편지(푸른역사) p282-283. 수신인은 金興根(김병주의 숙부)』

 

철종 때는 정2품까지 이르렀습니다. 다음은 고종실록에서 정리한 흥선 대원군 집권 이후의 小山(김병주)의 출사 모습입니다. 간추리면 고종 즉위년인 [1663년 종첩집사], [고종 1년 향관],  [고종 3년 형조판서, 판의금부사, 병조판서], [고종 7년 형조판서, 예조판서], [고종 9년 형조판서], [고종 10년 판의금부사, 이조판서], [고종 12년 판의금부사, 한성부 판윤]. [고종 13년 한성부 판윤, 판의금부사, 홍문관 제학], [고종 14년 의정부 좌참찬], [고종 20년 예문관 제학, 공조판서], [1885년(고종 22) 판돈령부사]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小山께서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을 맞이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이를 군총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임오군란에 대하여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아래와 같이 쓰고 있습니다.

보기: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49166

 

그때 小山께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어머님의 말씀을 옮깁니다. 모두가 불안 속에서 하룻밤이 지나갔습니다. 날이 새고 아침 일찍 어느 벙거지를 쓴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말하기를, 대감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저희는 존경하고 있습니다. 하고 물러갔습니다. 그러나 정국은 불안한 나날로 얼룩졌습니다. 소산(小山 김병주의 호)은 가솔들과 함께 잠시 피신하기로 하였습니다. 개군면 향리 선영 근처 여강(驪江 남한강의 여주군 경계 안의 강)가인 앙덕리에는 황산(김유근)의 별장(別莊)이 있었습니다. 불안한 서울보다는 그래도 선영 근처인 시골이 안전하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동안 앙덕리에 계셨습니다.  

 

1882년 6월 9일 발발한 임오군란은 그해 7월 16일 종식되었으니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여진(餘震)이 계속되던 어느 때인가? 하나의 큰 무리가 앙덕 나루로 집결하고 있었습니다. 또 한 번 불안이 엄습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난 무리에서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대감마님께 전해주십시오. 저희는 강을 건너기 위해 이곳으로 집결하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안심하십시오. 다시 한번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어떻거나 소를 잡고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도강(渡江)하여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 쪽으로 향했습니다. 이런 불안한 정황(政況) 속에서도 저희 가문은 안전했습니다.

 

그리고 小山께서는 곧 상경하여 출사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1883년(고종 20) 6월 4일 예문관 제학. 같은 해 7월 9일 공조판서. 1885년(고종 22) 판돈령부사 직책을 내렸다고 고종실록은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887년 임종하시기 1년 전인 1886년경 앙덕리로 낙향하신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는 심순택[沈舜澤, 1824~1906 | 자: 치화(穉華), 시호: 문충(文忠)]이 지은 김병주의 가장, 시장(家狀, 諡狀)에서 晩年驪江之仰德村居 라고 쓰여있기 때문입니다. 고조께서는 1887년 6월 12일 파란만장한 생을 여강가인 앙덕리에서 마감하십니다.

 

증조 김정규[金定圭 1862(철종13)~1903(고종 40) 자: 戒前 | 호: 兼山]

고조(김병주)와 정경부인 풍천임씨 사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兼山(김정규)께서는 18세인 1879년(고종 16) 식년시 병과로 급제하시고 출사하시어 1883년(22세로 고종 20년) 선교관(宣敎官)으로 임명되시었습니다. 이때 당숙인 김병덕(金炳德 1825~1892 | 자: 聖一 | 호: 約山 | 시호: 文獻)이 보내온 편지에 의하면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국역본(國譯本) -- 도성 행차를 했으며 선교관(宣敎官)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축하의 뜻이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보다 훨씬 크다. 이미 특지(特旨)를 받았느냐? 기뻐하며 감축할 일이나, 어린 나이에 단계를 뛰어넘어 승진했으니 그 두려움 또한 상상할 수 있겠다. 내가 외직에 있어서 즉시 가서 소식을 듣지 못하니 매우 답답하다. 내가 통정(通政)이 된 것이 나이 27세 때였다. 벼슬을 빨리 시작하여 조정에 반열에 든 것은 서 보국(徐輔國), 자명(子明) 대감, 그리고 나 모두 세 명뿐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 칭송했다. 그런데 지금 네 나이는 이것에 비교해도 또 5년이 빠르니, 더욱 스스로 힘써서 실질에 부응해야 한다. 어떻게 실천할 계획이냐? --

 

1886년(고종 23) 여주목사, 1890년(고종 27) 성균관 대사성, 1891년(고종 28) 사간원 대사간, 1893년(고종 30) 이조 참의, 1899년(고종 36) 종이품 가선대부 궁내부 특진관에 이르렀습니다. 1903년(고종 40) 7월 28일 졸(卒)하심으로서 42세라는 짧은 생을 마감하십니다. 임오군란, 동학농민운동, 갑신정변 등 구한말(舊韓末)을 거쳐오시면서 문호개방이라는 여명기를 격동 속에서 지나온 것입니다. 왜 이렇게 짧은 삶을 사신 걸까? 1904년 가문에선 동생 되시는 휘 인규께서 습격을 받아 돌아가셨는데 이 이야기는 모친을 통해서 들었지만 그 세세한 내막은 어제(17, 7, 2) 알았습니다. 여기에서 증조할아버지(휘 정규)께서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향곡(개군면 향리 160)에 일시 머무셨나 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이 추리하는데 필자의 고조 할아버지(휘 병주로 주인공의 부친)께서 살던 훈동집을 정리하고 새집을 마련하기까지 인듯한데 진행되어 빈 공간을 향곡에서 머무신듯 합니다. 1901년 서울 용산으로 이사하셨고 1903년 재산을 뺏으려는 하인들에 의해 비극을 맞이하였음도 알았습니다. 운명하신 후 그때부터 저희 가문은 선영(양평군 개군면 향리)에서의 생활이 이어졌다고 판단합니다. 볼 곳 : 아래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609815&cid=59133&categoryId=59141 ] 

 

할아버지 김익진[金翼鎭 1884(고종 21) - 1943] 자: 文述 |호: 香山居士]

증조(김정규)와 증정부인 남양홍씨 사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구한말과 일본 강점기를 거쳐오시고 영능참봉의 임무를 수행하시면서 여주군 개군면 하자포리(현 양평군 개군면 소재지)에서 교육사업에 매진하셨는데  망국의 설움을 민족교육으로 승화하셨습니다. 여주군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고 이는 어머님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일제 강점기인 1927년 介軍面(河紫浦) 私設學術講習會第四會卒業紀念으로 앞줄 가운데가 할아버지(金翼鎭으로 그때는 44세)로 추정된다. 어린이를 상대로 한 개군면 최초의 체계적인 민족 교육이다.

 

 

 

『 -- 또한, 야학회는 아니지만, 김익진(金翼鎭) 등은 1922년 7월에 교원 2명과 학생 35명으로 하자포학술강습회(河紫浦學術講習會)를 설립하였다. --  출처: 아래 http://www.yeoju.go.kr/history/jsp/Theme/Theme.jsp?BC_ID=a0279 』

 

필자는 할아버지를 보지 못했지만, 어머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적 주위에선 저희 집을 참봉댁으로 불렀습니다. 일본 강점기 때도 참봉은 존속? 했었는가 봅니다. 할머니(1886~1915)는 풍양조씨 조창하(趙昌夏 1847 -1897)의 따님으로 조실부모하여 중모(仲母)인 이정숙[李貞淑 1858~1935, 여성교육의 선구자로 엄비의 후원 아래 숙명 여학교를 설립하시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숙명여고에는 이정숙 기념관이 있어 그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부군은 조영하(趙寧夏)] 여사의 집에서 자라시고 교육을 받으셨으며 할아버지의 배필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필자의 아버지 네 살(홍종표씨에게 출가하신 고모님은 한 살) 때인 1915년 삼십 세를 일기로 운명하셨습니다.

서울 박동의 이정숙 여사댁을 1933년경 찾은 어머님은 인력거를 타셨다고 합니다. 대동한 아기이셨던 김임동 큰 누님(1932년 생)을 안으시며 동희(할머니)의 며느리고 손녀냐고 감격해 울컥하셨다고 합니다. 저희는 또 한 분의 할머니인 용인이씨를 모시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김조한(1913~1967), 어머님은 풍산홍씨(1911~1985)입니다.

아버지께서도 교육사업에 매진하셨는데 일본 강점기에 원덕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고 개군면 자연리의 강습소, 그리고 6, 25로 제때 배우지 못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공민반 교육도 도맡으셨습니다. 이후 문맹 퇴치에 앞장서시고 1967년 운명하시었습니다. 어머니 풍산홍씨는 고종 때 암행어사로 유명하신 홍철주의 손녀로 여 군자 이시고 유약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문의 멍에를 짊어지셨습니다. 일본 강점기와 해방, 6, 25와 이후를 거쳐오시면서 숱한 가시밭길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과 지도자로서의 담대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필자는 제가 쓰는 글에서 어머님께서 들려주셨던 고사를 필요시에는 인용하고 있습니다. 풍산홍씨는 어떤 분이실까? 보기: http://blog.daum.net/0113508344/4720009  

 

- 직계로 부모님까지의 흔적을 구전(口傳)까지 더해 위와 같이 쓰고 향리 선영 贊成公(達行) 후예 속에 단편적이긴 하지만, 아랫글로 저의 심경(心境)을 담아보고자 합니다.

 

 

하옥[荷屋은 金左根(1797~1869)의 號] 할아버지께 드립니다.

할아버지! 오늘은 큰마음 먹고 할아버지께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별세하신지도 142년이 흘렀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어머님인 풍산홍씨로부터 가문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 왔습니다. 60년 세도정치 그 말미를 장식하셨던 할아버지를 동경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5대조이신 황산(黃山 金逌根) 할아버지와 연관하여 생각도 하였습니다.

 

세도정치라는 부정적 의미의 모든 굴레를 짊어지신 하옥 할아버지! 그러나 이는 저희 가문의 본모습이 아니었습니다. 1856(철종 7년)년 4월 10일부터 5일간 여주 목(驪州 牧, 지금의 여주읍)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집 1,000여 호가 소실되었습니다. 이때 아들이신 사영 김병기 할아버지를 여주로 급파하시고 가진 것 모두인 양곡 1,000석을 내놓아 휼민(恤民)들을 구제하였고 그들과 아픔을 함께하였습니다. 이것이 저희 가문의 참모습입니다. 저는 어머님으로부터 당신의 증 종손이신 세마 할아버지(金升鎭)께서 일본 강점기에 어렵게 사는 이웃을 위하여 나누는 봉사정신과 조상님을 향한 열절하신 사랑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습니다.

 

군국의 사무(軍國 事務)를 짊어지셨던 황산 할아버지로부터 그 기개(氣槪)와 가풍(家風)을 이어받으신 하옥 할아버지! 제가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내촌리 소일마을을 처음 찾은 것은 군 입대전인 1964년경 이었습니다. 여주군 흥천면 효지리 황산 할아버지 묘하에서 십리 정도로 가까운 곳인데도 늦게 찾아갔지요. 그때 신씨 할머니(승진 할아버지 후처)께서 종손이 왔다고 그렇게 좋아하시고 순서에 의해 하옥 할아버지, 당신의 아들이신 사영 김병기(思潁 金炳冀), 손자이신 김용규(金用圭), 증손자 김승진(金升鎭) 할아버지의 묘소, 그리고 나합 할머니 묘소까지 소개받고 참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어느 할아버지인가? 기일 이어서 현손(玄孫: 고손)이신 광한(廣漢) 아저씨는 못 오시고 마을에 일가 되는 분하고 제례를 올리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99칸 집의 규모나 주위의 풍광이 향리 선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곳! 그러면서 작은집이 큰집을 압도하는구나! 하는 쓸데없는 자괴심에 빠져들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좁은 제 소견 탓이었습니다. 조선은 김씨의 나라이지 이씨의 나라가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도정치(勢道政治)로 나라의 발전을 후퇴시켰다는 이런 저희 가문을 향한 질타 속에서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세칭(世稱) 안동김씨 60년 세도정치 그 중심에 저희가문이 있습니다.

 

永安府院君 金祖淳~黃山 金逌根~豊恩府院君 趙萬永~永恩府院君 金汶根~荷屋 金左根으로 이어지는 계보(系譜)를 보면서 오늘을 생각합니다.

 

저희도 많은 풍파를 겪었습니다. 약한 마음을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저는 황산(黃山) 할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린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옥 할아버지! 오늘날 저희 가문의 현실이 역사의 수레바퀴인가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급박하기에 모든 것에 앞서지 못하는 조상공경을 자탄하게 합니다. 양평군 개군면 향리 선영으로 옮겨진 황산 할아버지의 묘소와 비석을 끌어안고 어찌할 줄 몰라 좋아하시던 당신의 현손(고손)이신 광한 아저씨! 소일 선영의 그 크나큰 묘역의 잡초를 뽑기 위해 손잡이 용 쇠꼬챙이를 지참 얼마나 열심이셨는지 손가락이 꼬부라지신 아저씨를 생각합니다.

 

별다른 재주도 능력도 없는 제가 그래도 가정,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 장삿길에 나섰습니다. 행선지 중에는 소일도 포함됩니다. 하옥 할아버지! 그때 항아리가 유리뚜껑이 왔습니다. 사과차가 왔습니다. 하는 차량방송 소리를 들으셨지요. 할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열심히 살아라. 그리고 선영을 잘 지켜다오! 하신 말씀이 메아리가 되어 제 마음속에 박혀 버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냥 하나의 장사꾼으로 보았겠지요. 사영 할아버지가 부친인 당신 묘소를 지키고 만년을 보내 시기 위해 지었다는 99칸짜리 그 집 입구까지 갑니다.

 

세도정치라는 낱말에서 오는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를 덮어 씌워지신 하옥 할아버지! 그런 모습으로 평하는 글들을 수없이 봅니다. 저는 어머님으로부터 영안 부원군(김조순) 할아버지의 곧고 맑은 모습을 들었습니다. 지방을 잠행하시던 어느 날 할아버지는 그곳 지방관과 밥상을 마주하였습니다. 그 지방관은 보리밥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옆에서 맛있게 먹는 분이 마주앉은 분이 영안부원군 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 후 영안 부원군 할아버지의 이런 모습에 감동한 그 지방관은 크게 뉘우치고 훌륭한 관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2007년 만주의 지안에 있는 그 옛날 고구려 19代 王 광개토대왕릉을 답사하였습니다. 대왕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돌판 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돌판뿐 그 위에 있어야 할 대왕의 유골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광개토대왕을 생각하면서 하옥 할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저희 가문의 수호신으로 되신 하옥 할아버지! 하늘나라에서 평안히 쉬 십 시요.

 

맺는 말

 

조선 제26대 왕이며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 때(1863~1907 재위)부터는 총체

적인 격변(激變)으로부터 오는 국란(國亂) 속에서도 우리 민족이 긴 잠에서 깨어나는 여명기(黎明期)이기도 합니다. 숱한 가시길을 걸어오면서 현대의 민주주의가 정착하기까지 그 속에서 전통 관료 사회의 모습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을까? 저희 직계(고조 김병주 이하)의 발자취를 따라 투영(投影)하였는데 산 역사의 한 장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글을 써 내려옴에 짧은 지식 속에서도 진실을 담으려고 온 힘을 다했습니다. 혹 미비하고 교정할 부분이 있다면 일깨워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역사를 추적함은 곱씹어 얻어지는 교훈이 두고두고 지침으로 삼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천혜의 자연을 보유한 양평군을 정의롭고 풍요로운 삶의 터전으로 만들어 후대에 물려주어야 합니다. 1등 양평을 만드는 일에 우리 모두 힘을 모읍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