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본 블로그 그리스도교 박해와 안동김씨, 순원왕후의 슬픔에서 저희 가문과 천주교에 대하여 글을 쓴 바 있습니다. 저희 가문은 성리학을 신봉하고 사대부가의 전통을 이어오는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관료 가문입니다. 그런 가문에서 어떻게 그리스도교 신앙이 싹 텃을까? 저는 어머님으로부터 단편적이긴 하나 가문에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왔습니다. 황산 할아버지께서 운명하실 때 대세(代洗: 司祭를 만나지 못하거나 병환 등으로 위급할 때 대행자로부터 세례를 받는 것)를 받고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라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때만 해도 어렸었고 교회사에 대하여는 전연 몰랐으므로 음! 그러셨구나 그렇게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때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다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보다 7살 연상의 증조할머니인 貞夫人 청해이씨(증조 할아버지 김정규의 후취부인)께서 생존해계셨습니다. 증조할머니의 천주교 신앙은 아주 열심이셔서 아주 작은 지식이나마 聖敎會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구전과 가톨릭 청년, 경향잡지와 국사 교과서의 내용을 통해서 조선에서 천주교 박해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당시 한때나마 군국의 사무를 짊어지셨던 황산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천주교에 입교하셨을까? 이를 역사의 기록을 통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황산 할아버지께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 드린 역사를 추적하였습니다.
황산 할아버지도 성리학을 기초로 한 전통 관료였습니다. 영안 부원군 김조순의 순조 대왕 보필할 때는 천주교에 관대한 입장을 취하였고 신앙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것은 생명존중과 기본권을 중시하는 영안 부원군 할아버지의 뜻이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832년(순조 32) 김조순이 별세한 이후, 부친의 정신을 계승한 순원왕후와 황산 할아버지께서는 당시 천주교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보이고 계셨을까?
한국 천주교회사와 모든 역사적 기록은 안동김씨와 천주교에 대하여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필자는 아래의 기록을 안내합니다.
보기: 아래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29823
서울六百年史 기해교난의 경위: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sidaesa/txt/4-7-4-1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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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5대조이신 황산 할아버지께서 천주교를 접하는 정황이 단편적이긴하나 순교자의 나라 3, 4권에 비교적 자세하게 나와있습니다.
보기: 아래(순교자의 나라 3권. 김유근 검색)
http://book.daum.net/detail/preview/list.do?bookid=DGT4808959132072&barcode=4808959132072
보기: 순교자의 나라 4권. 김유근 검색)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59132089
위 책 순교자의 나라에 의하면 황산 김유근 할아버지는 추사 김정희의 소개로 유진길을 알게 되었고 1835년경으로 추정되는 해에 삼청동의 백련사(김유근의 집. 지금의 삼청동 25번지, 현 국군 서울지구 병원)에서 추사 김정희와 함께 유진길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서양이라는 넓고 큰 세상을 알게 되고 진지한 모습으로 견문을 쌓아갑니다. 그 이전부터도 천주교에 유연한 정책을 폈던 할아버지는 차츰 신앙의 깊이를 더하고 이는 당시 군국의 사무를 짊어지셨던 정책에 반영되었을것입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우주란 무엇이며 생명의 근원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서양이라는 넓고 깨어 있는곳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깊은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추정하여 진리를 탐구하고 깨달아가기 3년째인 1837년(推理하면) 황산 할아버지는 병을 얻고 실어증까지 겹치게 됩니다(조선왕조실록에는 1837년까지 여러 직책을 받고 출사한 기록이 나옵니다.). 중풍으로 실어증까지 겹쳐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유명한 묵소거사자찬은 이때 탄생합니다. 이를 통한 황산과 추사 두 분의 가슴 뭉클한 우정은 2006년 추사 서거 150주년 기념전에서 새롭게 조명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기해박해의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하는 1839년 5월 황산 할아버지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중병 속에서 유진길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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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기록에 의하면 이때 추사도 세례를 받기로 했다는데 박해의 광풍과 다음 해인 1840, 9 제주도로 유배당하므로써 기회를 잃은 것 같습니다.
- 생략. 김대건 신부를 위시하며 당시 교우들이 전하는 구전에 의하면 진길은 당시 섭정인 대왕대비 김씨의 오라버니 황산 김유근과 문 인이요 명필인 추사 김정희에게도 전교하려 했다고 한다.
황산이 병이들자 진길은 자주 그를 권면하여 죽을 때 세를 붙였 다고 하며, 이 때 추사도 같이 입교할 뜻을 갖고 있었으나 뜻밖에 제주도로 유래되는 바람에 입교는 실현되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하 생략.--
출처 : 한국의 성인들(성 유진길편)
http://gregorykorean.org/library/saint/103/yoojk.htm
1840, 7 기해박해의 광풍이 주춤하긴 했으나 여진은 계속되었습니다. 절친한 벗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1840, 9)되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그 후 3개월여, 황산 김유근은
12월 17일 운명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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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김유근이 건강하였다면 하고 가정을 하여봅니다.
우리는 소현세자가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면 하고 가정을 하여봅니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그곳에서 벽 안의 아담 샬 신부를 만납니다. 그리스도교(천주교) 신앙과 서양문물을 일찍 접한 소현세자는 조국을 발전시킬 큰 꿈을 안고 1645년(인조 23) 귀국하지만 부친인 인조로부터 미움을 당하고 두달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소현세자 가족도 같은 비극을 맞습니다.)우리는 소현세자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소현세자가 대통을 이어받았다면 역사는 크게 달라지고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먼저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었을 것입니다.
소현세자를 생각하면서 황산 할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이는 1834년 11월 등극한 8세의 손자 헌종을 대신하여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하였고 이를 적극적으로 보필한 분이 황산 김유근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황산은 추사와 함께 유진길로부터 천주교의 진리와 넓고 큰 세상을 듣고 깨닫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였습니다. 1837년 병환으로 은퇴하였지만, 그 보이지 않는 힘은 1838년까지 박해의 방패막이가 된 것입니다.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는 황산 김유근의 병환이 심하여 움직이지도 못하고 사경을 헤매일 때 안동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조만영 일파가 일으킨 것임을 생각합니다.
만약 황산 김유근 할아버지께서 건강하셔서 계속 정국을 이끌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첫째, 황산 할아버지 생전은 어쩔 수 없이 천주교 문제는 잠복하고 그렇게 세월은 전과 같이 흘러갔을 것이다.
둘째, 천주교의 신앙은 최소한 박해는 없었을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한 열린 마음으로 프랑스를 접하고 개화사상에 눈뜨게 되어 근대화가 앞당겨졌을 것이다.
셋째, 아직 깨어 있지 못한 시대이고 반대세력도 상당하였음으로 황산 김유근은 순교하고 천주교는 더욱 철저히 박해의 늪으로 빠져들고 쇄국정책으로 문호는 굳게 잠겼을 것이다.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오늘은 황산 할아버지의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하여 추적하고 조명하여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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