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저희 가문과 신앙

신앙의 맥은 이어지고

추읍산 2009. 9. 26. 22:51

황산 김유근 할아버지께서 싹 틔운 진리는 그 후 어떤 과정을 거처 뿌리내리게 되었을까? 두꺼운 성리학에 기초한 가문의 전통은 황산 할아버지께서 운명하신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유교사상에 기초한 가문의 전통은 하느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그런 모습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조상님 받드는 모습은 따로 기억하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증조 할아버지를 낳아주신 고조 할머니인 정경부인 풍천임씨(1841~ 1911, 고조부 김병주의 3취부인으로 초취는 평산신씨, 재취는 파평윤씨)는 천주교 신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황산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5대조 황산 할아버지께서 싹 틔우신 천주님 신앙은 고조할머님 풍천임씨에게로 다시 증조 할머니인 청해이씨에게로 이어졌습니다.


증조할머니 청해이씨의 신앙

저희 집에는 증조할머니인 청해이씨께서 계셨습니다. 저희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모두가 세상을 떠나신 이후에도 제가 중학교 때인 1950년대 말까지 사신 증조할머니 정부인 청해이씨 할머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증조할아버지는 金定圭(1862~1903 | 字: 戒前 |號: 兼山 | 1900년 가선대부 궁내부특진관 임명되심.---할아버지를 낳으신 증조할머니는 정부인 남양홍씨)입니다. 당시로써는 꽤 장수하신 증조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7살 연상이시라고 합니다. 낳아주지 않은 어머님께 할아버지는 지극한 효성을 다하셨습니다.


 1950년대 말까지 함께한 증조할머니의 기억은 연로하셔서 보행도 못하시고 귀도 잘 듣지를 못하셔서 성당에는 나가지 못하시고 늘 집에서 성서읽기와 기도로 보내셨습니다. 할아버지를 낳아주신 남양홍씨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증조 할아버지의 후취부인이 되신 할머니는 처음에는 개신교회를 다니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성교회라고 불리는 천주교 신자가 되셨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7살 연상의 어머니를 위해 가능하면 원하시는 것 모두를 해 드렸다고 합니다. 제가 할아버지는 보지 못했지만, 어머니 풍산홍씨의 이야기와 증조할머니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정시절은 참으로 어려운 시절입니다. 일정 초기라고 생각합니다. 천주교에는 교무금 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1년에 증조할머니의 교무금은 쌀 7가마라고 합니다. 또한, 당시 원하시는 신앙생활에 도움되는 월간지 가톨릭 조선, 경향잡지, 가톨릭 청년의 월간지와 옛날 활자체로 된 각종 종교서적, 그리고 요리강녕이라는 신, 구약을 설명하는 큰 그림책, 프랑스 원본인 칼라로 된 수많은 상본(그림)이 집에 있는것은 할아버지의 효성이 가져온 결과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경제력은 작은 힘이나마 감당할 수 있었던가 봅니다. 그리고 귀한 패물들도 성당에 드린 것으로 들었습니다. 천주(天主)님께 드리는 것이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제가 태어나기도 전 증조할머니의 용문의 마내성당(양평군 현 용문성당 근처인 용문산 입구 옆마을)을 다니시는 이야기를 구전에 의해 기록하고자 합니다. 일정 초기라고 생각합니다. 당시만 해도 주위에선 대감댁, 정부인 마님으로 불리워진 시절이니 조선시대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당시의 여주군(현 양평군) 개군면 향리와 양평군 용문면 사이에는 추읍산이라는 큰 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리는 10km 정도의 산길입니다. 당시만 해도 버스도 없던 시절로 걸어 다녔던 때입니다. 성당에 다니시려면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겠지요. 구전에 의하면 그곳 성당에 가실 때는 가마를 타고 다니셨다는 것입니다. 개방적인 사고로 걸어 다니지 못하고 왜 가마를 타고 다니셨을까? 만민 평등을 부르짖는 교회에서 이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기 위하여 적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상이 조선시대 모습 그대로 임을 말씀드립니다. 일정시절 그 중기로 그리고 일정 말로 넘어오면서 그 어려움은 일본의 수탈로 말미암아 양식마저도 이어지지 못하는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고 저희 집도 비켜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풍산홍씨인 어머님의 삯 바느질로 그 어려운 시절을 넘겼다고 합니다. 저는 1944년 12월 27일생입니다. 제가 태어나고 그 다음해인 1945년 8, 15 해방이 되었습니다. 제가 증조할머니를 기억하기는 제 나이 6살 전후부터입니다. 1950년대 초 6, 25의 전쟁 와중에서도 늘 기도하시는 증조할머니가 생각납니다.


또 한 분의 용인이씨 할머니

6, 25때는 또 한곳의 선영인 여주군 흥천면 효지리로 피난하였는데 저의 할머니인 용인이씨(할아버지 김익진의 후취부인, 아버지를 낳아주신 분은 풍양조씨로 일찍 운명하셨습니다)께서 사셨습니다. 이때는 이미 할아버지께서 운명하신 이후입니다. 용인이씨 할머니도 증조할머니로 의 영향을 받으셨는지 성교회를 다니셨고 늘 기도하시는 기억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용인이씨 할머니는 전쟁의 와중에서 병으로 돌아가시고 함께한 기간이 짧아서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증조할머니 청해이씨께서는 여전히 정정하셨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증조할머니를 모시고 개군면 향리 선영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양평군(당시는 여주군)개군면 향리의 저의 집은 22칸으로 조선 개와 집이었습니다.

ㄷ자 집인 저희 집은 안방과 대청을 사이로 건넛방이 있습니다. 그곳에 계셨던 증조할머님 방에는 그 벽에 칼라로 된 프랑스제 성화(聖畵)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천지창조, 14처의 십자가의 길 등 신 구약 성서내용을 기초로한 상본(그림)이 방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리강녕 이라고 하는 그리스도교 성화와 그 해설로 이루위진 꽤 큰 책이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나 일가분들이 오면 그야말로 시청각 교실입니다. 할머니는 귀가 먹고 말씀도 하기 힘드십니다. 그러므로 저나 어머니가 설명합니다. 교리지식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요리강녕이라는 큰 책자는 시청각 교재로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늘 기도하시는 증조할머님의 모습은 추억의 아름다움으로 길이 남을 것입니다.


저희 집은 조상님의 제사를 모시는 전통적인 사대부가입니다. 이는 당시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증조할머니만 유일한 천주교신자이시고 부모님과 형제들은 여전히 오랜 관습에서 깨어나지를 못 하였습니다. 그러니 당시로써는 동서양의 믿음이 한 집안에 공존해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나 조상 모시는 제사는 신앙이 아닌 효의 실행입니다. 증조할머니는 보행을 통 못하시니 방에서 신공이라고 하여 천주님께 늘 기도하는 생활로 매일매일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성모님 공경하시는 모습을 아름다움으로 기억합니다. 저희는 할머님의 가르침 속에 성교회(聖敎會)를 흠모하게 되었습니다.


봄 가을 용문의 마내 성당(용문산 입구 마내 마을에 있었음. 지금은 용문 시내에서 지평으로 가는 삼거리 언덕 위 있고 용문 성당이라고 합니다.)의 김 신부님은 추읍산을 넘어 20리가 넘는 산길을 걸어서 저희 집에오십니다. 일행 몇 분하고요. 그때는 대문에서 대청마루 앞까지 예단을 깔고 신부님을 영접하였던 생각이납니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저희 집을 오시는 것이니 큰 영광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제가 개군 초등학교에 다닐 적입니다. 하얀 수염을 휘날리고 오시는 김신부님은 예수님의 모습을 하신 거룩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을 극진히 대접하였습니다. 그때는 증조할머님만 교우였는데 왜 그렇게 설렘과 기쁨이 넘쳤을까요. 신부님은 할머님 방에서 한참을 계십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기에 왜 그렇게 오래 계시는 것일까? 그냥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후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안 사실이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성탄과 부활절 전에 행하는 판공성사였습니다. 그동안 잘못한 죄를 깊이 뉘우치고 천주님 앞에서 신부님께 고백성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성체를 하신 할머님은 그제야 신부님과 함께 대청마루로 나오십니다. 그리고 신부님이 저희 집을 오시는 것은 할머니가 보행을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봉성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신부님은 저의 집에서 하룻밤을 주무시고 다음날 3km의 거리인 개군 쪽으로 걸어서 가십니다. 가시는 도중에 계속 다른 교우 집에도 들리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양평을 거쳐 용문으로 이동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성교회를 거룩함 자체로 동경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천주님을 향한 믿음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친구들이 저희 집을 놀러 오면 증조할머니 방에 걸린 칼라로 된 성화를 보고 신기해합니다. 난 교회지식도 없으면서 커다란 요리강녕이라는 성경을 주제로 한 큰 그림책을 꺼내놓고 나름대로 설명을 합니다. (증조할머니는 귀가 먹으셔서 듣지를 못하십니다.)


황산 김유근 할아버지께서 뿌린 신앙의 씨앗은 고조할머님인 풍천임씨, 증조할머님인 청해이씨, 할머니 용인이씨로 이어지고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대세를 받으셨습니다. 어머니는 세례명이 마리아로 1970년대 말 서울 창동 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님에게 세례를 받고 열심인 신앙생활을 하시고 1984년 선종하셨습니다. 2009년인 이제 저희 부모의 5남매 가정은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로 되었습니다. 둘째 누님은 재속 프란시스코회 회원으로 그 열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넘쳐나고있습니다. 작은아버지는 개신교에 다니시는데 얼마나 신앙생활이 열심이신지 중년이후 평생을 장로로서 봉사하시고 80세 연세에도 키르키즈스탄에 선교활동을 몇 년째 하시고 작년 가을에 귀국하셨는데 지금도 예수님 사랑의 그 사명을 다하고 계십니다. 처남은 여의도 순복음 교회 목사로 미국에 거주하면서 한방 의료 선교로 온 세상을 누비고 다닙니다. 이 모두가 5대조이신 황산 김유근 할아버지께서 뿌린 신앙의 씨앗을 싹트고 자라게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직도 모든 면에서 부족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많은 잘못을 지은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하느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하나하나 온 힘을 다하여 바른 생활을 할 것을 다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우리가 함께 머무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