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그리움은 강물처럼

탄생과 유년기

추읍산 2009. 10. 11. 15:57

1944, 12, 27경기도 여주군(현 양평군) 개군면 향리 산 42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는 해방 8개월 전입니다.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동남아까지 전선을 확대하였고 진주만을 폭격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미국의 참전으로 수세에 몰리어 발악하던 때입니다. 1945년 일본은 핵폭탄, 두 개를 얻어맞고 드디어 그해 8월 15일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에 항복하였습니다. 패망 직전의 일본이 발악하던 시기에 제가 태어났으니 그 어려움은 극에 달했다고 생각합니다.

 

본향은 추읍산 아래 향곡리로 60여 호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향리 저수지 자리로 개군뜰을 수리안전답으로 만들기 위한 공사는 1942년경 완공시켰는가 봅니다. 당시 저수지 안에 있었던 마을, 대대로 이어져온 정다운 이웃은 떠나지 않을 수 없었고 마주잡은손 만날것을 기약했겠지요. 우리 집은 묘 막으로 약 40칸 정도의 옛날 기와 집이었을겁니다. 그 살던 집을 뜯어 축소하여 8대조 묘역 옆에 옮겨 22칸 집을 지었습니다. 간직하기 어려운 고옥 엉성하게 맞추어 비는 새고 기울어 20여년전 헐어버리고 저수지입구 언덕위에 마련하였고 시간날적 찾곤하지요. 현재 저희 마을의 집(舊屋)들은 당시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는 일부 사람들이 뜯어 옮긴 것인데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고향에선 옛분 몇 안돼요.

 

제가 태어날 때 저를 받아주신 할머니를 삼 할머니로 불렀습니다. 그분은 마을 위쪽에 사시던 강씨댁인데 영분 엄마라고 주위 분들은 불렀습니다. 그때는 새로 옮긴 집이 삶의 근거지가 된 이후입니다. 저는 어렸을 적 삼 할머니를 매우 따랐고 할머니도 저를 사랑으로 감싸 안으신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기였을 때의 추억

 

사람의 기억은 어디까지일까요? 사람마다 틀리겠지요. 제가 아기였을 때 꽤 울었는가 봅니다. 밤새 울고 보챘다는데 12년 위인 큰 누나가 업어 달랬다고요. 아련히 아기였을 때 걸으니까 좋아하던 주위 분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다섯살 때 하루는 놀다 집으로 들어가는데 삼 할머머니(?)가 엄마가 아기 낳았어, 어서 가봐 하는 거여요. 방문여니 과연 엄마가 아기를 보고 계셨어요. 첫 마디가 엄마 ~ 아기를 어디로 낳았어? 엄마는 배꼽으로 낳았단다. 하신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 궁금증은 이후에도 몇 번에 걸쳐 물어보았고 그때마다 엄마는 배꼽으로 낳았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다섯   살이고 말을 배울때이까요! 동생이 있으면서도 놀다 와서 엄마 젖을 먹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유년기

 

6살 때일것입니다. 마을에는 또래 여럿 있었고 놀던 모습을 생각나는 데로 적어보고자 합니다. 마을 가운데는 다랑논 여섯 마지기(한 마지기는 200평) 있었습니다.  작은 우물 하나 있었고 떠 세수도 하고, 어울려 물고기 잡는다고 채로 훓고 헤집기도 하였습니다. 생이와 미꾸라지 몇 마리 신기하게 바라보았죠. 저희 집 앞에는 심승은아라는 한약국을 하시던 분이 계셨습니다. 약재를 뜨락에 펼쳐 말리곤 하였습니다. 하루는 또래 모였는데 펴놓은 감초가 보이는 거여요. 한 움쿰씩 집어들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였는데 들키지 않을려는 지혜?는 어디서 배웠는지요? 단맛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짧은 글로 그때를 올린 바 있습니다. 꼬맹이 주제에 산으로 칡뿌리 캔다고 다녔고 진달래꽃 아름따다 허기도 달랬습니다. 그렇게 즐겁게 뛰어놀았는데 1950년 내 나이 7살 때 전쟁이 터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