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그리움은 강물처럼

6, 25전쟁 속의 어린 시절

추읍산 2009. 10. 12. 12:54

해방이 되었습니다.

 

조선말과 일본강점기를 거쳐오면서 가문의 경제는 많이 기울었고 어머님의 삯바느질로 일정을 보냈다고 합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었지만 3, 8선의 장벽으로 조국은 분단되었습니다. 작게 남은 농토는 그나마 1947년 농지 분배로 거의 없어졌고 극히 일부의 위토만 남게 되었습니다. 일정 때부터 저희 집에는 소련제 재봉틀이 있었습니다. 고추 모양의 북을 썼는데 일명 고추 북 재봉틀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삶은 여전히 어려웠고 어머님의 삯바느질은 계속되었습니다.


유년기를 거쳐 7살인 1950년 6, 25사변이 터졌습니다. 그때 그 어렵던 시절 기억을 되살립니다. 저희  집인 양평군(당시는 여주군) 개군면 향리에는 당시 증조할머니 청해이씨, 심신이 허약하신 아버지, 안팎살림을 도맡아 하시는 어머님과 위로 세 분의 누님과 저, 그리고 남동생 이렇게 대가족이 함께 살았습니다.


제2 선영인 여주군 흥천면 효지리에는 할머니 용인이씨께서 두 분의 숙부님과 아직 출가 안 한 고모님의 생활 근거지로 되었습니다. 참으로 살기 어려운 그 시절이었습니다.


향리에서 기억하는 미군과 중공군

저는 6,25전쟁 속에서 국군과 인민군 생각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군과 중공군 생각은 납니다. 먼저 미군 생각을 떠올려 봅니다. 그러니까 1, 4 후퇴 전 피난 가기 전으로 생각됩니다. 저희 집은 미군의 향리 지역 지휘부가 된 것 같습니다. 미군에게 안방과 건넛방, 사랑방까지 내어주었습니다. 저희는 뜰 아랫방이라고 하는 작은 방에서 살았습니다. 미군이 우리를 놀리기 위해 방문에서 소리 지릅니다. 저희는 무서워서 쩔쩔매었습니다. 왜 그렇게도 짓궂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은 미군들이 무동을 태우고 당시로써는 보기 어려운 활동사진(영화)을 보러 갔습니다. 참 즐거웠습니다. 십자 성호를 그었습니다. 그들도 교우였습니다. 어머님께선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증조모방인 건넛방! 이곳에서 천주교 상본, 십자가 등 그리스도교를 알리는 여러 성물을 보고 미군들은 탄성을 질렀습니다. 당시 미군들은 가톨릭, 개신교신자들로 이루어 저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의범절이 반듯했습니다. 신앙의 힘은 전쟁 속에서도 사랑으로 꽃피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때 일까? 미군은 파사성(여주군 대신면 천서리 막국수촌 근처인 파사산에 있는 성)이 본부이고 중공군은 추읍산(양평군 개군면과 용문면에 걸쳐 있는 산)이 본부였다고 합니다. 약 10리(4km) 거리의 두 곳을 근거지로 저희 마을 주변에는 낮에는 미군들이 밤에는 중공군이 판을 칩니다. 능안 산속에는 방공호가 있었습니다. 좁게 팬 그곳은 폭격으로부터 피신용이었습니다. 마을 사람 증언에 의하면 미군과 중공군의 전투장면을 이렇게 전합니다. 눈이 쌓인 겨울 추읍산에 있던 중공군은 산에서 내려와 새상골쪽 집너머 산에서 하얀색으로 위장하고 납작 엎드려 당매산의 미군을 향해 총을 쏘아 댑니다. 미군은 겁도 없이 뻣뻣이 서서 중공군 쪽을 향해 총을 쏩니다. 수세에 몰리는 미군 같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미군의 포차가 나타납니다. 지금의 하향 입구 버스 타는 곳에서  집 너머 쪽 중공군을 향해 포를 쏘아댑니다. 중공군은 혼비백산 추읍산쪽으로 도망치기에 바쁩니다. 이는 당시 미군과 중공군의 군 장비의 우열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입니다.

 

하루는 낮에 미군이 마을에 나타났습니다. 능안쪽에 숨어 있던 중공군은 미군을 생포하여 추읍산 쪽으로 데리고 갔다 합니다. 그 미군은 그 후 어찌 되었을까요? 전쟁은 비참함을 부릅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는 심신의 상처가 앙금이 된 체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합니다. 미군들은 물자도 흔했습니다. 그리고 구호물자가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초콜릿, 쓴 커피, 껌으로 대변되는 그들의 먹을거리는  고고한 우리 민족의 정신까지도 좀먹어 갔습니다.


그러면 중공군 생각을 떠올려보겠습니다. 그해는 몹시도 추웠습니다. 마을의 울타리 나무들이 뜯겨 밤을 환하게 합니다. 저희 집은 큰 뒤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중공군 추위를 녹이는데 땔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때 저희 집으로 피난왔던 외사촌 형의 증언에 의하면 집에 있던 고문서, 고책 등 많은 유물이 땔감으로 중공군 추위 녹이는데 사용 되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 한자 문화권의 근거지인 그들에게도 전쟁은 이성마저 잃게 하였나 봅니다. 그들은 성냥을 달라고 중국어로 무어라고 말합니다. 하루는 닭들을 잡아서 요리를 만들었는데 저희 집 어른께 드린다고 닭고기 가져오던 생각도 납니다. 예의범절이 반듯한 중국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고마움의 김도흠(김홍국 씨 부친) 아저씨

저희는 6, 25를 거치면서 그 어려움 속에서도 이웃집인 김홍국 씨댁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피난생활도 함께했고 생사고락을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향리에선 땔감이 없어 어머님이 나무까지 때론 하시면서까지 고통의 연속이었고 양식이며 입을 거며 얼마나 많은 고생이었겠습니까? 그런 속에서도 김도흠씨는 집에 땔감을 제공해 주었고 때론 양식도 구해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집으로 피난온 외가집 가족

그 전쟁 와중에서 향리에 있을때 외가집 가족들이 향리 집으로 피난왔습니다. 외할머니와 외삼촌 부부, 그리고 외사촌들과 함께하던 생각이 납니다. 얼마 동안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후 외가 가솔들은 어디론가 길을 떠났습니다. 1, 4 후퇴 때는 우리는 여주군 흥천면의 효지리로 피난하였습니다.


일본강점기와 6, 25 그리고 가문의 문화재

우리 집은 주지하다시피 문화재의 보고였습니다. 이는 영안 부원군 김조순(諱 祖淳) 할아버지께서 갖고 계셨던 가장 좋은 것들은 비록 큰댁으로 양자를 보냈지만, 큰아들이고 가장 사랑하는 황산 김유근(諱 逌根)할아버지에게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5대조 황산(휘 유근), 고조(휘 병주)할아버지께서 당시 정치 일선에 서 계셨음을 생각합니다. 상당량의 고서와 유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소산( 할아버지 낙향할 때 한강의 뱃길을 이용하여 이삿짐을 실어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 속에는 많은 유물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유물들은 일정과 6, 25의 전쟁으로 수난당했습니다.


일본강점기에는 유기(놋그릇) 공출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집에는 상당량의 유기로 된 제기(祭器)가 있었습니다. 어머님의 구전에 의하면 그들은 구석구석 뒤져 모든 유기는 압수당하였다고 합니다. 가마니에 담아 그 다음 날 가져가기로 하였는데 어머님께서 밤중에 둘째 고모님과 같이 몰래 일부를 빼내어 감추었다고 합니다. 이는 2006년 양평 박물관에 기증하였고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유기(鍮器)와 제례( )연구에 자료로 활용될 것입니다.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6, 25때 집안의 어느 대고모 할머니가 오셔서 조상님의 영정과 고서들을 태웠다고  합니다. 전쟁이 나면 양반들은 첫 번째 표적이 된다는 게 이유였다고 합니다. 여러  장의 영정(影幀)도 함께 불탓다고 하는데 그 속에는 황산 할아버지의 영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황산의 절친한 벗인 추사 김정희의 영정이 온전히 전하여짐을 볼 때 이는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고조 김병주(諱  炳㴤)할아버지의 1888년도에 고종 황제로부터 받은 시호 교지(홍패)가 그 두껍던 교지가 얄게 뜯어져 있던 것으로 보아 불 속에 넣어지기 직전 생각을 바꿔먹은 덕택에 남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대고모 할머님 인지는 들었어도 잘 기억에 나지 않지만 왜 막지를 못했을까요?


1, 4 후퇴 때에 여주군 흥천면 효지리로 피난하였습니다.

피난가면서 고서류는 방공호에 유기, 명기들은 우물 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흥천면 효지리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증조할머니를 모시고 가는 피난길입니다. 향리 집을  나와 우리 가족은 저수지 뚝 아래를 지나는데 물 내려오는 콘크리트관(지름 130cm 정도, 녹깡이라고 불렀습니다.)속에 사람들이 꽉 차있는 거여요. 폭격을 피해 그곳을 은신처로 하였던 모양입니다. 주막거리에서 개군 쪽을 바라보니 마을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도토도 고개 넘어 계전리 묘막(영안 부원군 휘 조순 부친인 휘 이중 묘역이 있는 곳 입니다) 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당시 김창규라고 하시는 증조 학렬의 일가분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곳 종손이신 정한 아저씨는 아니 계셨습니다. 일가분에게 관리하게 하셨는데 지금도 같습니다. 조선 기와집인 그곳에 도착하여 가장 귀한것이라고 가져갔던 가보(家寶)들을 대청마루 한 가운데를 뜯고 파묻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리고 저희는 흥천면으로 피난길을 떠났습니다. 피난길에는 탱크가 굉음을 내면서 달리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당시 여주군 이었던 개군면 향리는 흥천면의 효지리와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30리 거리입니다. 그때는 추울 때로 생각됩니다, 어느 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넜는지 아니면 꽁꽁 언 강을 걸어서 도강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어떻든 우리 가족은 흥천면 효지리로 피난하였습니다. 그곳에는 제2의 선영으로 용인 이씨 할머님께서 그곳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피난 갈 적에 많은 향리 주민들이 저희와 함께하였는데 거처할 곳이 없어 헛간 등에 임시로 살 곳으로 정한 분이 많았고 일부는 근처인 귀백리의 뱅골 등으로 이동하기도 하였습니다. 향리 이웃집인 김홍국 씨댁과는 생사고락을 같이 했습니다. 그곳에는 이성관 할아버지인 이영희 씨가 저희 일을 도맡아 관리하고 계셨습니다. 양식과 땔감이 떨어지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하셨습니다.


1951년 내 나이 8세, 흥천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전쟁 와중에도 우리 꼬맹이들은 뛰어놀았습니다. 효지리 마을 앞 건너편 낮은 산에는 6대조이신 참의공 김용순(諱 龍淳), 5대조이신 황산 김유근(휘 유근)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산소터라고 불렀습니다. 산자락을 끼고 양쪽에 자리한 묘역은 그 제절 앞이 꽤 넓었습니다. 효지리 마을 아이들은 이곳에서 공(집 뭉치에 새끼로 감아 만든 공)으로 축구를 하고 즐겁게 뛰어놀았습니다.


전쟁에 와중에도 어머님은 양 선영을 부지런히 오갔습니다. 한번은 어머님께서 향리에 다녀오셨습니다. 먼저 다녀올 때 비가 많이 와서 고서들과 유물들을 넣어두었던 방공호가 물이 차서 젓어 있던 것을 말리기 위해 대청마루 등에 펴 놓고 흥천면으로 오셨는데 얼마후 개군면 향리를 다시 방문하니 고서들은 어지렵혀 있었고 웬 피난민이 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있는 고책중에서 일부 낙질 된 것이나 황산 유고도 1권만 남은 것은 전쟁의 와중에서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전쟁의 와중에서 개군면 계전리의 묘막이 불탔습니다. 그리고 그때 피난가면서 대청마루 가운데를 뜯고 묻은 가보도 함께 불탔습니다. 나중에 꺼내왔는데 불에 녹고 일그러진 각종패물의 모습이 선합니다. 황산 김유근 할아버지의 용트림 한 벼루도 불에 탓고 조각, 조각나서 전흔으로 남아있었는데 지금은 이나마도 없어졌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추사 김정희는 절친한 벗인 황산의 벼루에 새겨넣을 "발(發)" 자 하나를 쓰기 위하여 14번이나 다른 글씨체로 연습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습한 쪼가리 종이는 보물 547호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이 불에 탄 벼루지만 보이지 않음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추기 2012년) 벼루에는 글자가 새겨져 아른거리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친구의 시구를 채우다


- 생략

또 이런 경우도 있다. 황산은 일찍 죽은 친구 담화() 심자순()이 준 벼루에 시와 글씨를 새겼다. 담화는 심의직(, 1774~1807)이란 요절한 문장가이다. 기발하게도 담화가 미완성으로 남긴 시구를 자기가 마저 채워 한 작품으로 완성하였다. 벼루에 새긴 내용 전문은 다음과 같다.

 

가을이라 절로 탄식하노니
흰 이슬은 난초 언덕에 내리네.
강 위에 달은 예전과 똑같건마는
그대 그리워 마음 홀로 괴롭네.

첫 두 구절은 옛 친구 담화 심자순의 시이다. 예전에 어울리던 일을 생각하고 아래 구절을 채워 절구 한 수를 짓고 그가 준 벼루 뒤에 새겨 넣는다. 황산거사(, , , . ).


작은 벼루에 새긴 사연이 뭉클하다. 그런데 황산은 글을 쓰고 추사에게 맡겨 글씨를 쓰게 했다. 추사가 벼루에 새길 글씨를 여러 서체로 연습한 종이가 지금껏 남아 있다. 아쉽게도 벼루 실물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추사의 연습 글씨에는 쓸쓸하고 잔 우정이 잔영을 남긴다.


출처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5640&cid=59020&categoryId=59034 에서 「친구의 시구를 채우다」 편

 

개군면으로 복귀와 외가댁의 수난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53년 봄, 저희 가족은 개군면 향리로 복귀하였습니다. 저는 개군 초등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였습니다.

하루는 어머님이 머리를 풀으시고 목 노아 우셨습니다. 외가 집이 전쟁의 와중에서 수난당하신 것입니다. 한때 향리로 피난왔던 외가집입니다. 언제인가 되돌아갓고 그렇게 시간은 갔습니다. 그때는 1, 4 후퇴 때라고 합니다. 외가집 가솔들은 수원 근방 군포로 피난하였는데 그만 미군 폭격으로 외할머니, 외숙모와 외사촌(몇 분?)과 저의 마을에서 함께 간 승제 누님이 운명한 것입니다. 중공군이 있었다고 생각한 미군 전폭기의 폭격이었다는데 외삼촌과 큰형은 집앞 논두렁 쪽으로 뛰어 두 분만 살고 나머지 가족은 방공호로 피신하였는데 그 집이 폭격 맞는 바람에 방공호에서 모두가 부등켜안고 함께 운명한 것입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총성은 멈추었습니다. 이 작은 한반도에서 피아간에 많은 병사가 죽어갔고 많은 사람이 장애인으로 되었습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백성의 피가 온 강산을 피로 물 들였습니다. 저희 마을도 이웃 마을도, 온 강산을 피로 물 들인 이 비극으로 반목의 골은 깊어졌고 치유하기 어려운 마음의 응어리가 되었습니다. 전흔은 엄청난 국토 폐해로 이어졌습니다.


이제 6, 25의 전쟁이 끝난 지도 56년이 되었습니다. 세월이라는 약은 전흔의 아픔을 많이 치유하였습니다. 엄청난 경제발전도 이루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진실이라는 바탕 위에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늘진 곳이 없는 밝은 세상!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이 아닐까요. 정의 안에서 사랑이 한반도에 넘쳐나고 평화통일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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