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증유물 도록/황산유고

화영(華營)1) 공관에서 경미(景渼)가 보내준 시에 차운하다.

추읍산 2009. 11. 12. 19:29

黃山遺稿 券之三 詩 황산유고 권지삼 시


華營公館 次景渼見 奇韻 화영공관 차경미견 기운


화영(華營)1)공관에서 경미(景渼)2)가 보내준 시에 차운하다.

 


김유근(金根 1785~1840)


 

山樓心逐北雲飛 산루심축북운

樓上寒風吹客衣 루상한풍취객

此日逢春家局遠 차일봉춘가국원

一行爲史友朋稀 일행위사우붕희

 

산의 누각, 마음은 북쪽 구름 따라 날아가는데

누각 위, 싸늘한 바람 나그네 옷에 불어오네

이 날 봄을 맞았지만 집과 도성은 멀고

함께 지내는 자들은 관리들이라 벗이 적구

 

聽殘官角燈無焰 청잔관각등무염

叫盡村鷄月有輝 규진촌계월유휘

屋裏梅花窓下竹 옥이매화창하

誰憐隔歲未言歸 수련격세미언귀

 

아련히 들리는 관각(冠角)3) 소리에 등불은 가물가물

동네 닭 모두 울었는데도 휘영청 밝은 달

집 안에는 매화, 창가엔 대나무

한 해 지나도록 귀향 못 하는 나를 누가 불쌍히 여길까

 

 

1) 화영(華營): 수원 화성(華城)을 이른다. 순조(純祖)가 1828년(순조 28, 작자 44세) 건릉(健陵)과 현륭원(顯隆園)에 나아가 배알했는데 ,이 때 김유근은 화성유수(華城留守)를 맡고 있었다. < "국조보감(國朝寶鑑)" 순조 28년 2월>

2) 경미(景渼): 작가의 동생 김원근(김원근 1786~ 1832)의 자(字)이다.

3) 관각(冠角): 관청에서 시간을 알리기 위해 부는 호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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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글

김유근이 수원 유수(화성 유수)로 재직할 때인 1828년 이른봄인 음 2월경에 쓴 시로 생각한다. 필자는 그때를 상상하여 보았다. 서울 도성에서 먼 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갈 수도 없었다.  바쁜 공무 중 기나긴 겨울이 가고 입춘도 지나 꽃피고 새우는 새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루는 바로 아래 동생인 김원근(1786~ 1832 자: 景渼 | 호: 翠庭)에게서 서신이 도착했다.

 

오래간만에 집 소식을 들으면서 그날 밤, 그 속에 쓰인 동생의 시를 감상하고 집 생각에 젖어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등불을 켜놓고 책을 읽으면서 상념을 달래고 있었는데 어느덧 새벽을 알리는 관각 소리와 첫닭 울음소리가 새벽이 왔음을 알린다. 책을 읽던 작가가 문득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 밖은 휘영청 밝은 달이 감영 뜨락을 비추고 사방은 정막 속에 잠겨져 있었다. 이런 정경이 동생이 보내준 글을 생각하면서 작가의 시심을 자극했는가 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수원 유수 직책을 맡게 되었을까? 이를 추적하고자 한다.


김유근은 1827년 4월 27일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기 위해 행차도중 황해도 서흥에 당도하여 일행 여러 명이 살상을 당하는 불행한 일이 있었다. 이 일로 충격을 받은 김유근은 체차(사직)를 청하고 허락받아 귀경하였다. 이때 대리청정하던 효명세자는 귀경한 김유근에게 공조판서 직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김유근은 상당한 마음의 괴로움을 당하고 있을 때이므로 사직상소를 올리고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효명세자는 병조판서 등 여러 직책을 제수하고 출사하도록 종용하였으나 계속 사직상소를 올리고 시골집[지금의 성북구 장위동 동교송계(노가재 김창업 살았던 집)]에 내려가서 칩거하고 있었다.


1827년(순조 27) 윤5월 4일 순조실록에 실린 효명세자의 하령을 보자. 병조 판서 김유근이 상서하여 사직하니, 답하기를, “내가 경을 보지 않은 지 이미 몇 개월이 되었고, 경이 또 시골집에서 기거하면서 아직도 조정에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이때에 그리움이야말로 금하지 못하겠다. 그런데 어제는 얼굴마저 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말이 되는가? 나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우리 중전의 우애(友愛)의 정리가 더욱 어떻겠는가? 경이 문안한 지도 오래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천리와 인정상 차마 할 일이겠는가? 지금 다시 의리로 처신하라고 경에게 독촉하지 않겠다. 경이 만약 나의 고심을 생각하고 중전의 지극한 정을 본받는다면, 두 말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출사할 것이다. 경은 다시는 이전처럼 고집하지 말고 곧바로 들어와 내가 직접 유시하는 것을 듣도록 하라.” 하였다.


이후에도 효명세자의 거듭하는 간곡한 출사요구를 사양하고 사직할 뜻을 굽히지 않자

6월 10일의 효명세자는 김유근이 서연에도 참석지 않음을 질책하면서 외직인 수원부 유수로 임명하였다. 이는 외삼촌인 김유근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면서 도성을 떠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라는 효명세자의 배려로 생각한다.

 

다음 해인 1828년(순조 28) 4월 17일 김유근을 이조 판서로 삼음으로써 10개월에 걸친 수원 유수의 직책을 수행하고 귀경하였습니다. 그러나 1827년 평안도 관찰사로 가던 중 서흥에서의 불행은 마음의 병이 되어 치유되지 못하였는가 봅니다. 계속 출사를 종용하던 효명세자는 드디어 5월 13일 김유근의 사직소를 허락하였습니다. 정계를 은퇴하고 전원생활을 실행할 준비에 나서게 됩니다. 동교송계(지금의 성북구 장위동)의 초막을 수리하여 花水亭이라고 명하고 누에를 치면서 전원생활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8월 11일 生母인 청양부부인 심씨께서 운명하십니다.



추기 ; 2020, 2, 16

아래 이미지는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이 주체가 되고 이성민씨가 옮긴 한글 해제본 풍고집1(2019, 12, 31 발행) p451에서 사진 찍었음을 밝힌다. 내용으로 보아 윗글 황산유고가 연관됨을 알 수 있다. 본글 위 옮긴이의 글을 읽어보면서 두 분(김조순 부자)을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