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증유물 도록/황산유고

지지대(遲遲臺)를 지나며 감회에 젖어 삼가 짓다

추읍산 2009. 11. 16. 21:47

過 遲遲臺 感懷恭賦


지지대(遲遲臺)9)를 지나며 감회에 젖어 삼가 짓다

 

김유근(金根 1785~1840)

 


遲遲昔日此臺前  지지석일차대전  예전 이 지지대 앞에서 머뭇거리며

宸慕凝鑾望寢園 신모웅란망침원  임금께서 수레 멈추고 능묘(陵墓 , 현륭원)를 바라보셨지

追本有辭情極地  추본유사정극지  부모 추모하는 간절한 말씀, 그 마음 땅에 사무치고

爲君無樂慟窮天  위군무락통궁천  임금 되어도 즐거움 없고 원통함 하늘에 사무치셨지

臣民巨割庚申夏  신민거활경신  신하와 백성 경신년 여름10) 크게 상심하고

聖闕空悲甲子年  성궐공비갑자년  도성 사람 갑자년11)에 괜스레 슬퍼했지

子弟新豐今己老  자제신풍금기노  신풍(新豐)의 자제12) 지금 이미 늙어버려

歌風一曲淚澘然 가풍일곡루산연  노래 한 곡조에 눈물만 흐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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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지지대(遲遲臺) : 지지대는 정조(正祖)가 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 : 사도세자)의 원침인 현륭원(顯隆園)을 배알하고 환궁하는 길에 미륵현(彌勒峴)을 넘으면서 멀리서나마 현륭원을 바라보며 떠나기를 아쉬워했다는 곳이다. 후에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고 본받기 위해 1807년(순조 7) 12월에 화성 어사 신현(申絢)이 그곳에 비석을 세웠다.


10) 경신년 여름 : 경신년은 1800(정조 24)년인데, 이 해 6월 정조가 사망했다.


11) 갑자년 : 갑자년은 1804년(순조 4)이다. 정조의 생모이자 사도세자의 비(妃)인 혜경궁(惠慶宮) 홍씨가 쓴 "한중록(閑中錄)에 근거하면 , 한유(韓鍮)의 상소로 아버지 홍봉한(洪鳳漢)이 실각하고 , 삼촌 홍인한(洪麟漢)과 동생 홍낙임(洪樂任)이 사사(賜死)되는 원인이 된  이른바 정유역변의 연루된 것은 홍국영(洪國榮)의 개인적인 원한풀이 때문이고, 말년에는 외가에 대해 많이 뉘우치고 정조가 70세 되는 1804년에는 예전에 외가에 내렸던 처분을 풀어준다고 언약했다 한다. 그러나 결국 정조는 1800년에 죽어 외가에 대한 처분을 풀어주지 못하고 죽었는데, 아마 이 일을 말한 듯 하다.


12) 신풍의 자제 : 주 5) 참조, 여기서는 작가 자신을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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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글


10개월에 걸친 수원 유수 직책을 수행한 김유근은 조정에 명에 의해 이임하고 귀경길에 올랐다. 그 행차가 지지대에 도착하여 옛 정조 임금님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생각하면서 잠시 감회에 젖어들어 시 한수를 지었다.


정조의 아버지인 장헌 세자(사도 세자 1735~1762)는 정쟁에 희생되어 뒤주 안에 갇혀 죽은 분이다. 이를 어린 시절 목격한 정조는 이 한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1752년(영조 28) 왕위에 오른 정조는 그 부친의 억울함을 바로잡는 한편 매년 화성 현륭원(사도 세자의 묘역으로 고종때 융릉으로 개칭)을 참배하였다. 정조 대왕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은 장엄한 화성의 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한 행차로 이어졌는데 이에 대하여는 많은 사람이 아는 사항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어렸을 적 어머니인 풍산 홍씨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옮긴다. 어머니는 사도세자를 뒤주 대왕이라고 불렀다. 봄이 한참 무르익어 여름으로 넘어가는 6월경으로 생각한다. 그때 정조 대왕은 화성의 현륭원 참배 길에 올랐다. 일행이 현륭원에 도착하였는데  현륭원을 감싸는 소나무에 송충이들이 득실거려 솔잎을 갉아먹고 있었다. 이에 정조는 손으로 송충이 한 마리를 잡아 산채로 입에 넣고 씹어 삼켰다.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현륭원(고종때 융릉으로 개칭)을 에워싸는 소나무 위에 떨어졌다. 그 많던 송충이들이 모두 땅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이는 정조 임금님의 효심이 하늘에 이르른 것으로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당시 정조대왕의 부친을 향한 효심이 어떠하였는가를 가리켜주는 하나의 일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