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 西將臺 志感
서장대(西將臺)13)에 올라 감흥을 기록하다
김유근(金逌根 1785~1840)
北風吹客袂 북풍취객몌 북풍이 나그네 소매에 불어오는데
斜日기高臺 사일기고대 석양에 높은 서장대에 기대어 섰네
羅격山川迴 라격산천회 산과 강은 연이어 빙 들러 있고
飛騰歲月催 비등세월최 세월은 날아가듯 서두르네
繁華如過夢 번화여과몽 파릇파릇한 청춘 꿈처럼 지나가고
父老有餘哀 부노유여애 남은 것은 늙은이의 슬픔
滿日登臨意 만일등임의 사방의 경치를 굽어보는 내 마음
悲歌一引杯 비가일인배 슬픈 노래 부르며 술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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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장대(西將臺) : 화성 행궁의 최북단에 있는 전망루인데, 정조가 직접 쓴 화성장대(華城將臺)가 편액으로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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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글
지은이는1828년 3월 이임을 명받아 서울로 올라오기 전, 수원(화성) 유수 재직 시 어느 날 화성행궁을 바쳐주는 팔달산 정상, 서장대에 올랐는가 보다. 감회를 시로 남겼다. 그러면 정조 대왕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깃든 화성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화성(華城)
정조(1752~1800)는 뒤주안에 갇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후에 장헌세자로 고종 때 장조로 추존되었다.)의 비통함을 안고 세손 시절을 보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1777년 조선 제22대 왕으로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등극하였다.
정조의 부친을 향한 효심은 양주 배봉산(拜峰山) 아래에 있던 장헌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花山) 아래로 이장해 현륭원(顯隆園 후에 융릉隆陵)을 조성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지극한 효심으로 수원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화성(華城)을 1794(정조 18)에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서장대, 화성행궁(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 화산릉에 능행차할 때 거처하던 곳으로 화성 유수의 관아로도 쓰였다. 규모는 657칸으로 국내 최대 규모였으나 일본강점기 때 파괴됐다. 1996년부터 복원사업을 벌여 현재는 482칸이 복원됐다.),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이 있고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창룡문, 장안문, 화서문, 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화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서장대
팔달산 정상에 있는 화성의 첫 관문이다. 일명 화성장대라고도 한다. 팔달산 정상에 있는 지휘본부로써 동서남북 모든 방향에서 벌어지는 전투나 군사훈련을 총지휘하고 정보를 얻는 지휘본부다. 정조대왕께서 능행차시 이곳에서 직접 군사훈련과 불꽃놀이를 참관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증층 누각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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