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증유물 도록/황산유고

화성(華城) 가는 도중에

추읍산 2009. 11. 17. 19:41

華城道中


화성(華城)14) 가는 도중에

 

김유근(金根 1785~1840)


非霧非烟颺晩風  비무비연양만풍   안개도 아니고 연기도 아닌 것이 저물녘 바람에 날리며

和霜和雪墮晴空  화상화설타청공   서리처럼 눈처럼 맑은 하늘에 퍼지는데

一行百里南州路  일행백리남주로   남쪽 고을 가는 백리 길

盡日瓊林玉樹中  진일경림옥수중   온종일 아름다운 숲으로 이어지네


----------------------------------


14) 화성(華城) :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성이다. 1789년(정조13) 정조가 생부인 장헌세자의 능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읍치소(邑治所)는 물론 주민들을 팔달산 아래로 집단 이주 시키고 1794년(정조 18) 2월부터 축소하기 시작하여 1796년 9월에 완공했다.


----------------------------------


옮긴이의 글


이 글은 김유근이 수원유수(水原 留守, 華城 유수) 직을 수행 중인 1828년(순조 28) 2월 20일경 상경하여 순조 임금님의 화성 능행을 보좌하여 함께 화성(수원)으로 내려오면서 지은 글로 생각한다.


그때는 음 2월 22일로 판단되는데 이는 지금의 3월 20일경이 되었을 것이다. 필자(추읍산)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봄철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중국에서 계절풍을 타고 오는 황사가 온 강산을 덮었는가 보다. 그리고 순조 임금님의 화성 능행길 위 하늘도 온통 황사로 덮였다. 글을 지을 때가 저물녘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아침에 떠난 순조 대왕 행차가 화성(수원)이 가까운 지지대 근처까지 온 것은 아닐까? 그때 황사가 저녁나절에 농가의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와 어우러져 하늘에 운무를 뿌려놓은 것 같이 느낀 것은 아닐까? 아니면 무엇일까? 안개, 연기도 아니고 서리처럼 눈처럼 하늘에 퍼지는 것은?


 

그러면 1828년(순조 28) 2월에 실린 이와 관련된 순조실록을 보자!

2월 22일 : 화성(華城)의 행궁(行宮)에 나아가 경숙(經宿)하였는데, 왕세자가 따라갔다.


2월 23일 : 건릉(健陵)과 현륭원(顯隆園)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친제(親祭)하였는데, 왕세자가 아헌례를 행하였다. 화령전(華寧殿)에 돌아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는데, 왕세자는 아헌례를 행하였다. 제조 김유근(金逌根)에게 숭정(崇政)을 가자(加資)하고, 그 나머지는 시상하였다. 화성의 유생과 무사들을 명일에 시취(試取)하라고 하령하였다.


2월 24일 : 화성 성 안에 사는 사서(士庶)들 중에 나이 70세 이상된 사람과, 사서인 중에 39세【경술생(庚戌生)인 임금과 같은 나이.】된 사람 40명에게 각각 쌀과 고기[米肉]를 주라고 하령하였다.

 

 

수원과 화성에 대하여

수원을 화성이라고 하는데 이는 헷갈리기도 한다. 그러면 언제부터 수원이 화성으로 되었을까? 이를 추적하기로 한다.


정조 17년(1793) 1월 12일 수원의 호칭을 화성(華城)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화성(華城)'이란 명호(名號)는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천봉(遷奉)한 "화산(花山)"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 이름에는 장수(長壽), 부귀(富貴), 다남(多男) 등 도시번영을 위한 송축(頌祝)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곳의 지방관을 승격시켜 부사(府使)에서 유수(留守)로 되었다.


정조 대왕이 1794년(정조 18년) 1월에 화성(수원)에 직접 행차하여 시작한 화성성역(華城城役)공사는 34개월 만인 1796년(정조 20년) 10월 16일 낙성연(落成宴)을 치렀다. 이 모든 것은 정조 대왕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이 가져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순조 대에도 여전히 수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1827년 9월 15일 효명세자가 당시 화성 유수 직을 수행 중인 김유근에게 내린 영서(令書)를 보면 서두에 "令正憲大夫水原府留守兼摠理使金逌根書" 라고 되어 있어 수원과 화성을 병행하였던  것 같다.


추기 ; 2020, 2, 16

아래 이미지는 성균관대학교 대동대동문화연구원이 주체가 되고 이성민씨가 옮긴 한글 해제본 풍고집1(2019, 12, 31 발행) p450에서 사진 찍었음을 밝힌다. 내용으로 보아 윗글 황산유고가 연관됨을 알 수 있다. 본 글 아래 옮긴이의 글을 읽어보면서 두 분(김조순 부자)을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