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증유물 도록/황산유고

새 집이 완성되었다

추읍산 2009. 11. 19. 21:41

새 집이 완성되었다

 

김유근(金根 1785~1840)

 

屋宇告功 制作仍舊 但高者低而狹者廣 視昔爲稍異 通敞深邃 便於起居此余數十年來初有也  卽日入處  遂成近體一首  以識之  斯干之詩  張老之頌 窃有取於他日云爾

[옥우고공 제작잉구 단고자저이협자광 시석위초이 통창심수 편어기거차여수십년래초유야  즉일입처 수성근쳉일수  이식지  사간지시  장노지송   절유취어타일운이]

---------------------------------

 

새 집이 완성되었다. 옛 모습 그대로 지었는데, 다만 높은 곳은 낮추고 좁은 곳은 넓혀 옛집과 약간 달라졌다. 사방으로 통하게 하고 깊숙하게 지어 생활하는 데 편리하게 했다. 이것은 내게 수십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완성된 날 즉시 입주하고는 근체시 한 수를 지어 기록한다. 「사간(斯干)시21)와 장로(張老)의 노래22)가 검소함에 대해 강조한 뜻을 삼가 취하였다.

-------------------------------

 

一朝堂宇煥然開  일조당우환연개  하루아침에 집이 찬란히 완성되니

三月辛勤訖役纔  삼월신근글역재  삼 개월 고생 끝에 이제야 일 마쳤네

仍舊刱新須主劃  잉구창신수주획  옛 모습에 새로움 더한 것은 주인의 계획이요

扶傾苴漏藉羣才  부경저누자군재  기운 것 지탱하고 새는 것 막은 것은 목수의 기술

門楣善頌寧求福  문미선송령구복  집 규모는 잘 노래했으니 23) 어찌 복을 달리 구하며

莞簟安斯庶遠灾  완점안사서원재  부들자리 대자리에 편히 잠들며24) 재앙을 피하기를 바라노라

差喜告功迨未雨  차희고공태미우  비 오기전 미리 집 지어 기쁜것은

應綠暇日預鳩材  응록가일예구재  한가한 날 미리 재목을 구한 덕분이네

 

---------------------------------


21) 「사간(斯干)시 : 「시경(詩經)」 : 「소아(小雅)에 속한 편명이다.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궁실을 완성한 것에 대한 축하 가사 인데, 후일 검소하게 짓는다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22)장로(張老)의 노래 : 장로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나라 대부 장맹(張孟)의 별칭이다. 진나라 헌문자(獻文子)가 궁궐을 완성했는데, 장로가 그 화려하고 사치스런 것을 보고 노래를 불러 풍자했다. <「예기(禮記)」 「단궁(檀弓)」하>


23) 집-----노래했으니 : 「예기」 「단궁」하에, 장로의 풍자에 대해 군자가 "노래를 잘 했다. [善頌]" 고 평가했다.


24) 부들자리-----잠드니「시경」「소아사간」에, "아래는 부들자리요 위에는 대자리이니, 여기에서 잠이 편안하리라. [下莞上簞 乃安斯寢]" 했다.


-----------------------------------------------------------------------

 

옮긴이의 글

 

저는 본 장에서의 집 수리기록이 삼청동의 김유근의 백련사로 이해하였고 이에 의해서 추리하여 글을 쓴 바 있습니다. 그러나 황산유고를 읽다 보니 복차전운(復次前韻 . 황산유고 번역 및 영인 편. p369)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정합니다.


49) 동교 : 노가재(老稼齋  ) 김창업(金昌業)의 집이 있던 곳으로, 현 성북구 장위동이다. 작가가 무자년(1828, 순조 28, 44세)에 이 집을 개수하여 거처했다. <김유근 「화수정기(花水亭記)」>


황산유고의  화수정기편을 읽어보면 1828년에 노가재 선조의 옛집을 수리하여 그 이름을 화수정(花水亭)이라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이 길어 이와 관련되는 황산유고의 복차전운 편의 글 일부를 인용합니다.


向卜東郊宅   향복동교택    지난날 동교에 집터를 정하고는

逝將志願諧   서장지원해    장차 뜻대로 되려나 생각했지

農桑勤大本   농상근대본    농사와 양잠하며 큰 근본에 힘쓰고

魚鳥娯衰懷   어조오쇠회    물고기 새와 어울려 쇠잔한 마음 달래려 했는데

無暇身空縶   무가신공질    겨를 없어 몸은 부질없이 매여 있고

有愁骨可埋   유수골가매    시름 생겨 뼈를 뭍을만 하구나

所嗟心跡異   소차심적이    마음이 행적과 달라 한숨만 나오니

遲暮媿同儕   지모괴동제    늘그막에 벗들에게 부끄럽구나


위에서 보면 김유근은 5대조 몽와 김창집의 넷 째 동생인 노가재 김창업이 살았던 한양의 동교송계(東郊松溪 서울 성북구 장위동) 고택을 인수받아 수리하여 농막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작가의 5대조 김창집 6형제는 모두가 대학자로 칭송되어 이른바 6창으로 불립니다. 참고할 곳 : http://blog.daum.net/0113508344/4719150

 

그때 노가재 김창업이 살았던 집은 누가 관리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화수정기에서 보면 집은 퇴락했고 수목들이 황량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선조님이 사시던 뜻깊은 곳이고 서울 삼청동에서 그리 먼 거리도 아니니 산수를 벗 삼아 그곳에서 말년을 양잠(養蠶)과 농사를 지으면서 산천을 벗 삼아 살고자 했는가 봅니다. 그리하여 그 집을 마련하고 수리용으로 목재 등도 미리 준비하여 놓았을 것입니다.

 

수원 유수 직책을 마치고 귀경한 1828년(순조 28) 봄, 평생의 숙원사업인 전원에서 살고픈 마음은 서둘러  집 수리에 들어갔나 봅니다. 그리고 장마가 오기 전인 음 5월 말(지금의 6월 말)경 수리를 마치고 입주하면서 그 감회를 글로 남긴 것입니다. 집은 견실하되 검소하게 지어졌음은 윗글「사간(斯干)시와 장로(張老)의 노래가 검소함에 대해 강조한 뜻을 삼가 취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견실하되 검소하게 고쳐 지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전원주택 겸 별장으로 활용하였고 관리자를 두었겠지만 때로는 양잠과 농사일에 직접 참여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는 곳은 주로 삼청동의 백련사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