延慶墓 中秋亭 石感 念華城臨辛時事 恭賦一律 以志悲懷
연경묘 중추정 석감 염화성임신시사 공부일률 이지비회
팔월 한가위에 연경묘(延慶墓)25)에서 제향하였다. 저녁에 감회에 젖어 화성(華城)에 오셨을 때의 일26)을 생각하여 삼가 율시(律詩) 한 수를 지어 슬픈 마음을 기록한다
김유근(金逌根 1785~1840)
霜露厩零草木衰 상로기령초목쇠 이미 서리 내려 초목 시들었으니
滄桑此日竟誰期 창상차일경수기 세상은 변화무쌍, 이 날을 누가 예견했으랴
傷心東郭行香夕 상심동곽행향석 마음 아프네, 이곳 연경묘에서 향불 사르는 저녁
回首南州拱帳時 회수남주공장시 화성(華城)에서 잔치하던 때 생각나네
一死人間留宿債 일사인간유숙채 한 번 죽어 인간세상에 묵은 빚을 남기고
千秋地下有餘悲 천추지하유여비 영원한 지하세계에서 남은 슬픔 있으리
知應天際明明月 지응천제명명월 하늘 가 밝고 밝은 달빛
却向哀誠照不私 각향애성조불사 정성 쏟는 이를 비추어 사사롭지 않구나
----------------------------------
25) 연경묘(延慶墓) : 경기도 동구릉(東九陵)에 있는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묘이다. 효명세자는 순조의 적장자로 자 덕인 (德寅). 호 경헌(敬軒)이다. 1809년(순조 9)에 태어나 1812년 왕세자에 책봉되고 1819년 풍양조씨 조만영(趙萬永)의 딸과 결혼했다. 1827년 대리청정을 시작했으나 1830년 5월 6일 22세의 나이로 죽었다.
26) 임금께서-----일 : 순조가 1828년(순조 28) 2월 23일 화성에 있는 건릉(健陵)과 현능원(顯隆園)에 나아가 친제(親祭)하였는데, 왕세자가 아헌례를 행하였다. 화령전(華寧殿)에 돌아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는데, 왕세자는 아헌례를 행하였다. <「국역조선왕조실록」>
----------------------------------
옮긴이의 글
김유근(諱 逌根)이 연경묘(延慶墓)를 찾은 것은 몇 년도일까? 필자는 순조 30년인 1830년 음 8월 15일 일 것으로 추리합니다. 한가위 날인 그때는 생질인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난 지도 3개월이 지났습니다. 그 효명세자가 잠든 연경묘를 찾고 슬픈 마음을 글로 남겼습니다. 그날은 추석날로 집에서 차례를 지내느라고 오전은 그렇게 흘러갔고 상념에 젖어 지난날들을 생각하는데 그속에 자리한 효명세자를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오후에 세자가 잠든 연경묘를 찾았습니다. 해가 넘어갈 무렵인 오후 늦게 그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지금의 성북구 석관동인 양주 천장산에 있는 연경묘를 찾은 것입니다[그 후 1846년(헌종 12) 양주 용마산으로 옮겨졌고 다시 1855년(철종 6)에 지금의 구리시 동구릉(東九陵)안으로 천릉(遷陵)하였고 수릉(綏陵)이라고 합니다]. 세자의 명복을 빌면서 지난날들의 일들이 주마등같이 작가의 머리에 스칩니다. 그렇게 한참을 묵상하고 있는데 어느덧 한가위의 밝은 달은 연경묘 위를 밝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작가와 효명세자하고는 세자가 어린 시절부터 작가를 무척이나 따랐고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세자가 유년기적 보내준 당과를 맛있게 먹었으니 더 보내달라고 보챘고 필요한 물목을 적어 보내달라고 하던 세자입니다 (효명세자로부터 받은 간찰이 8장이 남아있습니다). 유난히도 총명했던 세자가 1827년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작가가 평안도 관찰사로 명받아 가는 도중 서흥에서 있었던 불행을 위로해주던 세자는, 외삼촌인 작가가 사직상소를 올려 그렇게도 쉬고 싶어 했는데도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출사(出仕)를 독촉했던 생질인 세자를 원망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자는 외삼촌인 작가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였고 그 상처를 치유시키기 위해 수원 유수로 보내 머리를 시킬 시간을 주었습니다. 그 후에도 사직하고픈 작가의 사직상소를 이해하여 1828년 5월 13일 이를 허락한 세자입니다. 외가(外家. 작가의 生家)의 박루(朴陋)함을 아시고 탁지(호조)에 명하여 견평방 본 집에 당을 한 채 지어 주신 세자입니다(참고 : 김조순 신도비). 1828년 8월 28일 외조모 청양 부부인 심씨의 상(喪)에 왕가의 전례를 깨면서까지 찾아오셔서 슬픔에 젖어 있었던 세자입니다.
정이 들을 때로 들었던 세자입니다. 학문을 좋아하고 예술적 감각이 탁월했던 효명세자가 1827년 2월 18일 대리청정을 시작하여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는 등댓불이 되어 나라의 나아갈 길을 밝힌 지, 만 3년여인 1830년 5월 6일,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작가가 수원 유수로 재직 중인 1828년 2월 23일 화성 능행차 오신 세자와 하룻밤을 같이 보내면서 음식을 나누고 따듯한 정을 나누었던 게 엊그제 같았는데 이 세자가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뜬 것입니다. 그런 훌륭한 세자였기에 슬픔이 더욱 컷을 것입니다.
'기증유물 도록 > 황산유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질없이 읊다 (0) | 2009.11.24 |
---|---|
제향(祭香)하는 곳에서 종촌(樅村) 농가로 들어가다 (0) | 2009.11.22 |
새 집이 완성되었다 (0) | 2009.11.19 |
감회를 쓰다 (0) | 2009.11.19 |
서둔촌(西屯村)에서 (0) | 2009.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