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증유물 도록/서적

선원유고(仙源遺稿)

추읍산 2009. 11. 30. 00:31

양평 친환경농업박물관 <역사관> 소장.       (도록 p135)

 

 

 

 선원유고(仙源遺稿)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문집. 필사본. 6권(卷) 2책(策)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1은 『선원유고』원집(原集), 책2는 「선원속고(仙原續稿)」, 보유(補遺), 세고(世稿), 후지(後識)로 구성되어 있다. 원집의 책머리에는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쓴 서(序)가 있고 이어서 목록이 있다. 『선원유고』권1, 2는 시(詩), 권3은 잡저(雜著), 권4는 의(議), 소차(蔬箚)이다. 「선원속고」권1은 시, 권2는 의(議), 차(箚), 보유는 시 2수, 「기몽설(記夢設)」, 「제식유훈(祭式遺訓)」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유 뒤에는 김상용의 후손들인 수북공(水北公), 증참판공(贈參判公), 난곡공(蘭谷公), 모주공(茅洲公), 필운공(弼雲公) 등의 시를 모은 세고(世稿)가 있으며, 이어서, 1767년 칠대손(七代孫) 김응순(金應淳)이 쓴 「후지(後識)」, 마지막으로 「선원선생 연보」가 있다.


------------------------------------------------------------------------

 

필자(추읍산)가 쓰는 글


필자의 13대조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1652 |자 : 숙도(叔度) |시호 : 문정(文正)]의 형님이시다. 그는 병자호란 때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빈궁 강씨와 원손,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그 때 청군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남문루에서 순절하였다. 김상용은 누구인가? 이를 서울 六百年史에서 옮긴다.


김상용(金尙容) 


홈 > 인물 > 조선중기 > 문신 > 김상용(金尙容) 

 

【성 명】 김상용(金尙容)

【생몰년】 1561(명종 16)∼1637(인조 15)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경택(景擇), 선원(仙源), 풍계(楓溪), 계옹(溪翁)

【시 호】 문충(文忠)

【저서·작품】 《가곡원류(歌曲源流)》, 《선원유고(仙源遺稿)》, 《독례수초(讀禮隨抄)》, 〈오륜가(五倫歌)〉,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 〈숭인전비(崇仁殿碑)〉(글씨), 〈장인정비(張麟禎碑)〉(글씨)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1561(명종 16)∼1637(인조 1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 · 풍계(楓溪) 혹은 계옹(溪翁)이다. 장령 김번(金풃)의 증손이며, 돈녕부 도정 김극효(金克孝)의 아들이고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형,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외손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병자호란 때의 순절인(殉節人)으로 서울 중구 회현동 1가 14번지에서 태어났다. 선조 15년(1582) 진사가 되었고, 159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 ·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화 선원촌(仙源村 : 지금의 강화군(江華郡) 선원면(仙源面) 냉정리(冷井里))으로 피난하던 중 양호 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과 판서 김찬(金瓚)의 종사관으로 있었다. 그 뒤 병조 좌랑 · 정언 · 수찬 · 응교 등을 역임하고, 원수(元帥)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남부지방을 왕래하기도 하였다. 선조 31년(1598) 그간의 공으로 승지가 되어 왕의 측근에서 전란 중의 여러 사무를 보필하였으며, 그해 겨울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에 귀국하였다.

1601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북인의 배척으로 정주 목사(定州牧使)로 좌천된 이후 지방관에 계속 머물다가 광해군 즉위년(1608) 잠시 한성부 우윤 · 도승지를 지낸 뒤 계속 한직에 있었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여 관직을 버리고 원주로 거처를 옮겨 화를 피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집권당인 서인의 한 사람으로 판돈녕부사에 기용되었고, 이어 병조 · 예조 ·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서울을 지켰다. 인조 8년(1630)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노령으로 관직의 사퇴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1632년 우의정에 임용되었으나 거듭 사임을 청원하여 마침내 허락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 묘사주(廟社主)를 받들고 왕족을 수행하고 강화(江華)로 피난했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으로 글씨에 뛰어났고, 서체는 이왕체(二王體)를 본뜨고 전(篆)은 상체(象體)를 겸하였으며, 평양의 〈숭인전비(崇仁殿碑)〉 및 풍덕 군수 〈장인정(張麟禎)의 비〉에 전액(篆額)을 남기고 있다. 또 시조로 유고(遺稿)에 〈오륜가(五倫歌)〉 5편,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 9편과 《가곡원류(歌曲源流)》 등에 여러 편이 실려 있다. 강화의 충렬사, 양주의 석실서원, 상주의 서산서원, 안변의 옥동서원, 정주의 봉명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 《선원유고(仙源遺稿)》 7권과 《독례수초(讀禮隨抄)》가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孝宗實錄, 海東名臣錄, 國朝榜目

【관련항목】 김광현 (金光炫) 김상복 (金尙宓) 김수홍 (金壽弘) 장유 (張維) 정유길 (鄭惟吉) 성혼 (成渾) 김만중 (金萬重) 김응순 (金應淳) 김정균 (金鼎均)


출처: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inmul/jojoong/1/118.html 

------------------------------------------------------------------------


필자의 블로그에도 소개하였다.

 

보기 : http://blog.daum.net/0113508344/4719148 




 

 

'기증유물 도록 > 서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풍고집(楓皐集)  (0) 2009.12.06
백육애음(白六哀吟)  (0) 2009.12.05
삼당선생집(三塘先生集)  (0) 2009.12.03
농암속집(農巖續集)  (0) 2009.12.03
농암집(農巖集)  (0) 2009.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