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庶尹公의 후예

조상님의 자취를 찾아서

추읍산 2011. 4. 11. 20:36

 

 

4월 9일 아침, 망우동에 계시는 김준한 아저씨로부터 선조님의 살던 곳을 찾아보자는 전화가 왔다. 필자는 항상 마음에는 있었지만, 아직 실행을 못 하였는데 아둔한 저를 일깨워 주셔서 감사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길을 나서면서 안국동 근처에서 글방을 운영하시는 문중 인사인 김천일씨에게 동행을 청하였고 안국동역 앞에서 세 사람은 합류하였다. 가까운 곳부터 찾기로 하였고 김천일씨의 안내를 받았다.

 

 

 

제일 먼저 하옥 김좌근 할아버지께서 사셨던 곳을 바라 보았다. 인터넷에서는 경운동 66번지라고 소개되고 있는데 동행한 김천일씨는 우측 건물 있는 쪽을 가리키고 있어 그곳이 경운동인지는 모르겠다. 현대화에 물결에 밀려 자취는 찾아볼 수 없고 마음속으로만 그때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서울에서의 모습은 흔적마저 없어졌지만, 이천시 백사면 내촌리에는 아들 사영 김병기 할아버지가 지으셨다는 별서를 볼 수 있다. 서울대학교로 기증되었는데 99칸 중, 남아 있던 42칸의 안채를 보수하고 새로 단장하였다. 없어진 나머지도 복원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동녕위(東寧尉) 김현근과 순조의 장녀인 명온 공주께서 사셨던 곳은 종로구 관훈동 198번지로 하옥 할아버지 집터 근처이다. 동녕위는 허약체질이고 정신질환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속에서 명온 공주는 오죽했을까? 꽃다운 나이인 23세에 요절하셨고 최근 두 분의 묘소 사진을 보니 관리가 안 되고 있어 서글펐다.

 

 

숙명 여학교는 1906년 엄순헌 황귀비가 설립하고 초대교장으로 이정숙 [李貞淑 ] 여사가 취임하였다. 여성교육의 선구자로 지금도 학교에는 이정숙 기념관이 있어 그 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정숙 여사는 조 대비의 친정 조카인 조영하(趙寧夏, 1845~1884)의 부인이다. 부군인 조영하는 갑신정변 [ 甲申政變 ] 때 생을 마감하시는데 홀로 가문을 이끄시며 그 노고가 크셨을 것이다.

 

 

필자의 어머니 풍산홍씨께서 이정숙 여사의 모습을 전해주셨는데 가계를 적으면, 저의 할머니(조동희)는 풍양조씨이고 조창하(趙昌夏)따님이시다. 조강하(趙康夏), 조영하(趙寧夏), 조창하(趙昌夏) 삼형제중 조영하는 조인영(趙寅永)의 대를 잇기 그 손자로 입적하셨다(양부는 조병기).

 

이정숙 여사는 조동희(필자의 할머니)의 중모로 조영하의 배필이시다. 조실부모한 저의 할머니는 중모 이정숙(남편 조영하씨는 1884년 세상을 뜨셨다.)여사 댁에서 성장하시고 교육을 받으셨는데 숙모의 각별한 사랑 속에서 성장하셨다고 한다. 양쪽 집안을 보살펴야 하는 이정숙 여사의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저희 할아버지(金翼鎭)의 배필이 되신 할머니(조동희)는 명이 짧으시어 저의 아버지와 두 분 고모님을 낳으시고 일찍 세상을 뜨셨는데 저희 부모님 혼사(婚事) 전이다.

 

 

 

필자의 어머니인 풍산 홍씨께서 일정시절 어느 날 박동? 이정숙 여사댁을 방문하셨다고 한다. 서울에서 인력거 [ 人力車 ]를 타셨는데 아기였던 큰 누님(1932년 12월생)을 데리고 가셨다고 하셨으니 1933~1934년일 것이다. 그때 이정숙 여사께서 감격해 하시던 모습을 들려주셨다. 필자는 1980년대 어느 날 월간 여성중앙을 본 기억이 있는데 그 속에서 여성교육의 선구자로서의 이정숙 여사를 소개하고 있었고 가족사진은 저희 집에서 보관하고 있던 할머니의 모습과 같은 사진이 나와 감회가 남달랐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숙명 여자고등학교에서 이정숙 여사의 흔적을 찾고 싶은데 여건이 허락할지 모르겠다.

 

 

숙명 여학교 터를 나와 광화문 앞에 이르렀는데 옛 병사들의 행렬 모습이 재현되고 있었다. 역사를 되살리고 기림은 문화사랑으로 자긍심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뜻깊은 옛 모습을 보게 되어 날짜를 잘 선택 한 것 같았다.

 

 

백세청풍(百世淸風)은 종로구 청운동 52~94에 있으며 선원 김상용께서 즐기셨던 청풍계의 한 곳으로 추정한다(사진이 흐미한데 잘 나온 사진은 등록이 안 된다). 좌측 중간 보도 위에는 동판 안에 각자 된 안내 글이 쓰여 있다. 원래는 선원 할아버지께서 大明日月百世淸風 이라고 각자하고 그 일대의 풍광에 심취하셨는데 일정 때 없어지고 지금은 百世淸風이라는 각자만 남았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 남문루에서 순절하신 할아버지는 필자의 13대조 청음 김상헌의 생가 큰 형님이시다. 그러면 김상용은 어떤 분일까?

보기: http://blog.daum.net/0113508344/4719148

 

 

백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각자가 역사문화의 현장임을 알리고 있는데 이를 소개하는 현판이 도로 위에 설치되어 있다. 각자 옆에는 현판을 세울 공간이 충분함에도 이를 뭍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하였으니 왜일까? 때 타고 더러워진 모습으로 어떻게 후세를 교육할 것인가?

   

 

이규태 코너에서 조선 초고의 집터로 소개된 곳은 至近의 궁정동 2번지 교황청 대사관 자리이다. 김준한 아저씨, 필자, 김천일씨이다. 

 

 

청와대를 배경으로 하였다. 좌측부터 김준한 아저씨, 필자, 김천일씨이다.

 

 

청음 김상헌의 집터로 소개되고 있는 이곳은 청운동 94~2번지라고 한다. 표석에는 궁정동 2번지로 그자리는 교황청 대사관이 자리하고 있어 근처인 이곳에 세웠나 보다.

 

 

청음 집터로 소개하고 곳 앞이다. 좌로부터 김천일씨, 필자. 김준한 아저씨이다.

 

 

삼청동 133번지 앞으로 길 좌측은 옥호정 터이고 우측은 백련사가 있었던 곳이다. 삼거리는 가려 보이지 않는데 우측길은 감사원 쪽이다. 보도 위, 좌측 소나무 있는 곳에 옥호정 표석이 있다.

 

 

표석 좌측이 영안 부원군 김조순의 옥호정이 있었던 곳으로 이곳에 표석이 세워졌다.

 

 

옥호정 있었던 곳 입구로 추정한다. 안쪽을 바라보았는데 사진을 찍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전체적인 모습을 담을 수 없어서 아쉬웠고 현재 살고 계시는 분에게 양해를 얻어 그 모습을 추적하고 싶은데 어떤 분 이실까? 만나보고 싶다.

 

 

다음 목적지인 백련사를 찾아보고 고균 김옥균 집터 쪽으로 가는 길 한쪽에서 바라보았다. 중앙 붉은색 지붕 일대가 옥호정이 있었던 곳이다. 옥호정은 동향(東向)으로 변화된 오늘이 있기까지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었을까? 그때(1815~1840)의 영안 부원군과 황산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옥호정에서 아주 가까운 이곳은 5대조 황산 김유근(金逌根 1785~1840) 집터 입구이다. 삼청동 25번지를 황산 할아버지의 집터인 백련사로 소개되고 있는데 한국 교육과정 평가원이 있었던 곳이다. 근래에 국군 서울지구 병원으로 바뀐 것 같았다.

 

 

정문에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주목적은 백련사 표석이지만 주위도 함께 담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 친절한 국군 아저씨는 대신 백련사의 표석을 찍어 오셨는데 고마움을 여기에 쓴다. 국군 아저씨 감사합니다.

 

 

황산 할아버지의 집터를 밖 도로변에서 보았다. 어느 할아버지 때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긴 것인지 궁금하다. [고조 김병주(金炳㴤 1827~1887)도 삼청동 백련봉 근처에 사셨다고 서울 600년사에 쓰여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훈동대신이라고 부르셔서 고조 때 이곳에서 훈동으로 이사하신 것 같다. 그렇다면 훈동은 어디란 말인가? 휘문중고등학교 자리가 사셨던 곳으로 들었는데 지금의 현대사옥이라고 한다. 이는 더 알아보아야 할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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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할아버지께서 사셨던 곳 백련사를 뒤로하고 고균 김옥균 집터를 찾았다. 안내하신 김천일 종인께서 아래 곳을 가리켜 주고 약속한 시간 관계상 먼저 자리를 뜨셨다.

 

 

김옥균 [ 金玉均 ] 선조님의 집터는 종로구 화동 260번지(정독도서관, 구 경기고등학교)라고 소개되고 있는데 표석을 배경으로 하였다.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는데 조선조 말 근대화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웅대한 꿈을 키우셨던 선조님을 생각하였다.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甲申政變 ] 이지만 만약 성공하셨다면 우리나라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고 세계 앞에 우뚝 서지 않았을까 생각되어 못내 아쉬웠다. 

 

 

김옥균 집터 옆에는 겸제 정선을 기리는 기념탑(아래 사진)이 서 있고 그곳에 각색된 현판이다.

 

 

 

고균 김옥균 집터 옆에는 정선 [鄭敾, 겸재 정선, 1676 ~ 1759] 이 인왕산을 바라보며 그린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가 우람한 기념탑에 각색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면서 위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겸제 정선은 우리 문중과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는 분으로 감회가 남달랐다. 마침 그 자리에는 문화유적을 답사하는 팀이 있었는데 해설사인 어느 여사는 이미 답사하였을 운현궁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인상 깊었다. 이곳을 나온 김준한 아저씨와 나는 운현궁으로 향하였는데 다음 편에서 안내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