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증유물 도록/편지

김조순(金祖淳)이 김유근(金逌根)에게 보낸 편지 3

추읍산 2009. 12. 21. 17:50

 

양평 친환경농업박물관 <역사관> 소장.     도록, p67

 

 

 

37 × 24

 

13. 김조순(金祖淳)이 김유근(金逌根)에게 보낸 편지 3


見書  知無擾過夜  慰喜  而聞仲家新乳  漸難支保云  造物之意  實不可知也

견서  지무요과야  위희  이문중가신유  점난지보운  조물지의  실불가지야


吾夜眠安檼  與久嘗居停之地無異  早起推窓  峯巒巖石 羅列几案 此是那中未

오야면안은  여구상거정지지무이  조기추창  봉만암석 나열궤안 차시나중말


有之事 但念竭來之故 令人有大不可堪之情 而汝輩之懷事 亦可推知 然此則稍

유지사 단념갈래지고 령인유대불가감지정 이여배지회사 역가추지 연차칙초


久  自然  與曾前壺中之留無異矣  飯后可下去也  不宣

구  자연  여증전호중지유무이의  반후가하거야  불선


卽 生父

즉 생부


편지를 읽고 별 탈 없이 밤을 넘겼다는 것을 알고 기뻣다. 둘째 집의 새로 낳은 갓난 아기가 점차 보전하기 어려워진다고 들었다. 조물주의 뜻은 실로 알기 어렵다. 나는 밤에 편안히 잘 잤다. 오래도록 머물러 온 곳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면 봉우리와 바위들이 책상 앞에 죽 펼쳐지니, 이것은 그곳에는 없는 것이다. 다만 힘들여 온 까닭을 생각하면 크게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너희들의 생각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도 조금 오래 되면 자연히 이전에 머물렀던 곳과 다름이 없게 될 것이다. 밥 먹은 후 내려가겠다. 이만 줄인다.


즉(卽) 생부(生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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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추읍산)가 쓰는 글

 

서울의 종로구 삼청동 133번지는 김조순이 1815년?에 입주한 옥호정이 있다. 바로 이웃인 삼청동 25번지의 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자리에는 큰 댁으로 입적한 김유근의 집인 백련사가 있었다. 이웃하여 있으므로 자주 왕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론 편지를 인편으로 보내 시기도 하였는가 보다. 둘째 집의 새로 낳은 갓난아기가 점차 보전하기 어려워진다고 하신 것으로 보아 이는 김용순이 김유근에게 보내는 편지 10번에서의 천연두를 앓는 갓난아이를 이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다면 1721년(순조 21) 2월 경인데, 둘째 집으로 부르고 계신다.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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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 2012, 9, 8

[추기 2012, 9, 8 안동김씨 문정공파 세보를 보면 김조순의 4촌 형님 김용순은 친아들인 김손근(金遜根 1800~1833)이 있었는데 황산 할아버지(김유근)보다 15년 연하이다. 불행하게도 서자로 태어났으므로 그때 법도에 따라 김조순의 장자인 황산(김유근)께서 종계를 이었는데 그때 손근 선조님과 배 창원황씨(1801~1827) 사이에서 태어나신 아기일 것으로 추리하고 글을 쓰겠습니다.. 족보에는 손근 선조님까지만 나오므로 아마도 위 편지에서 걱정하고 계시는 아기는 마마로 세상을 뜬 것 같다.] 옮기면 아래와 같다.

 

子 遜根 字景言 庚申生 武通政 海美縣監 癸巳十月二日卒

○ 配贈淑夫人昌原黃氏 辛酉生 丁亥四月卄三日卒 父昌城尉仁點

○ 墓利川牟田子坐合窆

 

김손근 선조님과 배 창원황씨는 짧은 삶을 사셨는데 황원황씨께서는 1827년 황산 할아버지께서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차 행차도중 서흥에서 일행 여러명이 살상되는 흉변이 있었는데 이때 동행하셨고 그만 세상을 뜨셨다. 창성위 황인점의 따님으로 손근 선조님의 배필이 되셨는데 이로 말미암은 마음의 병이 있었음일까? 손근 선조님도 이 사건 이후 6년을 더 사시고 운명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