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증유물 도록/편지

김원근(金元根)이 김유근(金逌根)에게 보낸 편지 7

추읍산 2010. 1. 26. 17:50

 

 양평 친환경농업박물관<역사관> 소장          도록 p78

 

 

51 ×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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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김원근(金元根)이 김유근(金逌根)에게 보낸 편지 7

(1827. 5. 14)


金同知來  伏承下書  伏審侍中體侯  連爲萬安  而父主諸節  一向太平

금동지래  복승하서  복심시중체후  연위만안  이부주제절  일향태평


伏切慰慕之至  此中慈候  與昨書所達  別無加減之可言  然腹冷頗

복절위모지지  차중자후  여작서소달  별무가감지가언  연복냉파긴


似因木綿子湯  過冷之致也  故問於盧引儀  次問李南陽  則皆云  藥則宜有一

사인목면자탕  과냉지치야  고문어노인의  차문이남양  칙개운  약칙의유일


試  而腹冷雖動  此則易治之証也  勿爲間斷  從其言  盡用十貼可也云矣

시  이복냉수동  차칙이치지정야  물위간단  종기언  진용십첩가야운의 



其言雖如此  憧憧不不  難以繼進耳 兩司停達事  偶然仰稟於兄主矣

기언수여차  동동불불  난이계진이 양사정달사  우연앙품어형주의


至承一不可曉之敎  悚惶無地也  不可曉者  果指何  境而爲敎耶  伏菀伏菀

지승일불가효지교  송황무지야  불가효자  과지하  경이위교야  복완복완


充賓亭子  二次懇乞  終以難處而辭  故己爲罷計  聞巡撫使亭子  非徒往來便

충빈정자  이차간걸  종이난처이사  고기위파계  문순무사정자  비도왕래편


好也  且無江上風氣之惡濕氣之萃  故昨夜委見景國  往復己借  回期之的在

호야  차무강상풍기지악습기지췌  고작야위견경국  왕복기차  회기지적재


何日  豫爲下敎如何  充賓則其意可知也  渙發一笑耳  封書果爲詳覽耶

하일  예위하교여하  충빈칙기의가지야  환발일소이  봉서과위상람야


其中有禮判云云之敎  故呈覽次胎呈而  非誤入也  下諒伏望耳

기중유예판운운지교  고정람차태정이  비오입야  하량복망이   


昨夜於國令座見景○  則匪久當有騎判特除之擧矣  然則勢將治疏矣 

작야어국냉좌견경○  칙비구당유기판특제지거의  연칙세장치소의 


預爲搆草以侍云云  故玆以仰達耳  餘姑不備達

예위구초이시운운  고자이앙달이  여고불비달


丁亥五月十四日  弟  元根  上書

정해오월십사일  제  원근  상서


김(金) 동지(同知)가 와서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어머니 모시고 계속 편안하시며 아버지께서도 한결같이 평안하심을 아니 위로와 그리움이 간절합니다. 이곳 어머니는 어제 보낸 편지에서 말씀드린 것에서 더 나아지거나 나빠진 것이 없어 더 알려드릴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배가 찬 것이 약간 심한데, 목화씨 탕을 복용하여 지나치게 차게 만들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노(盧) 인의(引儀)에게 문의하고 또 이(李) 남양(南陽)에게 물으니, 둘 다 '약은 계속 써야 할 것이며, 배가 찬 증상이 일어난다 해도 이는 고치기 쉬운 증상이니, 중단하지 말고 처방을 따라 10 첩을 다 써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말이 이렇다고는 해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아 약을 계속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양사(兩司)에서 계달(啓達)을 정지한 것은 형님께 우연히 말씀 드렸는데, '전혀 깨우칠 수 없다'는 말씀을 듣기에 이르렀으니 황송하기 그지 그지 없습니다. '깨우칠 수 없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까? 매우 울적합니다. 윤빈(允賓)의 정자는 거듭 간절히 애걸했지만 끝내 난처하다며 사양했으므로 정자 빌리는 것은 그만 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순무사(巡撫使) 정자가 왕래가 편리 할 뿐만 아니라 강가의 나쁜 기운이나 습기가 보이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제 경국(景國)을 만나 흥정하여 빌렸습니다. 돌아오시는 것은 정확히 언제입니까? 미리 말씀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윤빈의 뜻은 짐작할  만합니다. 도리어 웃음만 나올 뿐입니다. 봉서(封書)는 자세히 보셨습니까? 그 가운데 예판(禮判: 예조판서) 운운하는 말씀이 있어 보여드리기 위하여 동봉한 것입니다. 잘못 넣은 것이 아니니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어제 국령(國令)의 자리에서 경○(景○)을 만났더니 '머지않아 기판(騎判: 병조판서)을 특별히 제수할 조짐이 있다. 그러면 형편상 상소를 써야할 것이니 미리 초안을 잡아두고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말씀드립니다. 나머지는 이만 줄입니다.


1827년 5월 14일 제(弟) 원근(元根)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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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추읍산)가 쓰는 글

 

김원근이 큰 형님에게 보내는 편지는 이로써 마칩니다.

영안 부원군 김조순과 청양부부인 청송심씨 사이에서 1786년 둘째 아들로 태어나신 취정 김원근(翠庭 金元根 1836~ 1832) 할아버지는 그러나 장자인 김유근이 종백부 김용순 앞으로 입적되었으므로 김조순의 대통을 잇게 됩니다.


1827년(순조 27) 정시 문과 병과로 급제하고 1832(순조 32)년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같은 해 12월 27일 47세로 짧은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더구나 1832년은 4월 3일 부친께서 별세하셔서 같은 해에 당한 슬픔이었습니다.


인후(仁厚)하고 충근(忠勤)한 덕으로 늘 과묵하시고 세상 밖의 시끄러움이 있어도 燕坐超然不出門( 제비처럼 초연히 앉아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하신 할아버지이셨습니다. 그 모습은 운명(殞命) 이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에 있는 묘소에서도 드러난다. 영안 부원군 할아버지의 묘소와 작은 능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 잡은 취정 김원근 묘역은 비석 하나 없이 상돌에 김원근 묘소임을 알리는 글자가 각자 되어 있을 뿐이다. 묘소 또한 일반인들과 비슷한 크기의 묘역으로 되어 있어 이 또한 당시의 검소한 가풍이 나타난 결과라고 생각한다. 할아버지는 본 블로그 [문정공파, 贊成公(達行)의 후예] 편에서 소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