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증유물 도록/편지

김홍근(金弘根)이 김유근(金逌根)에게 보낸 편지 5

추읍산 2010. 3. 18. 08:53

 

양평 친환경농업박물관<역사관> 소장          도록 p90

 

 52 ×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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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록 p317

36. 김홍근(金弘根)이 김유근(金逌根)에게 보낸 편지 5     

(1823.4.24)


再昨上書 想己入照矣 日來侍餘哀體候連護萬支 伏溸伏溸  弟在塗無恙  所見

재작상서 상기입조의 일래시여애체후연호만지 복소복소  제재도무양  소견


諸處 玆以錄上 惟在更審處之 而如福大洞者 似不易得 甚可幸也 方向利川講堂

제처 자이록상 유재갱심처지 이여복대동자 사불역득 심가행야 방향이천강당


基麥田 明日似可入去耳 益之奴子適有上去者 故先報其聞所見 而其詳都在面達

기맥전 명일사가입거이 익지노자적유상거자 고선보기문소견 이기상도재면달


姑不備白

고불비백


癸未四月卄四日朝 從弟 弘根 上書

계미사월입사일조 종제 홍근 상서


그저게 올린 편지는 이미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즈음 상중에 어머니 모시고 계속 평안하신지 매우 그립습니다. 저는 근근이 탈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둘러 본 여러 곳에 대해 여기 기록해서 올려드립니다. 살펴보시고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 복대동(福大洞)과 같은 곳은 쉽게 얻을 수 없는 곳 같으니 매우 다행입니다. 지금 이천(利川) 강당(講堂) 터의 맥전(麥田)으로 가고 있는데 내일 들어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익(益)의 노(奴)중 마침 올라가는 자가 있어 그 동안 본 것을 일단 대략 썼습니다. 자세한 것은 만나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1823년 2월 24일 종제(從弟) 홍근(弘根)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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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추읍산)가 쓰는 글


도록 집필진은 해제 편 p38에서 『김홍근이 김유근에게 보낸 편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또한  김홍근의 편지 4, 5, 6에는 당시 이 집안의 사정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김유근의 아버지 김용순은 1823년 4월 14일에 사망한다. 각각 1823년 4월 22일과 24일에 쓴 김홍근의 편지 4와 5는 당시 집안의 종손인 김용순의 사망 사실을 자세히 말하고 있으며, 분주히 다니면서 살펴본 묘 자리들에 대해 김유근에게 보고하고 의견을 묻고 있다. 편지 4의 첫 머리에서 김홍근은 김유근의 안부를 물으며 '시여애체(侍餘哀體)' 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시여(侍餘)는 어른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고 '애체(哀體)는 상중에 있는 사람의 안부를 물을 때 쓰는 말이다.


이어서 [김홍근이 김유근에게 보낸 편 4와 5]를 기재


김유근을 대신하여 열심히 묘 자리를 보러 돌아다니고 있는 김홍근의 모습이 눈에 잡힐 듯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런 내용은 당시 양반 상가(喪家)의 풍경을 엿보는 데도 유용한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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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6대조 김용순은 1821년 2월 근무지인 황주에서 목사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고 귀경하여 삼청동 백련사에 머무르시면서 잠시 공조 참의(推理 하면)의 직책을 수행?하시고 1823년 운명하셨습니다. 황주에 계실때 1821년 1월 10일(편지 8) 아들 김유근에게 보낸 편지에서 광주목사의 운명(殞命)을 한탄하시며 연로하여 유한한 삶을 슬퍼 하시던 할아버지께서 2년여 생을 더하시고 1823년 4월 14일 운명한 것입니다. 영안 부원군 김조순의 가장 촉망받는 아들이며 장자인 김유근으로 대통을 잇게 하시고 풍산 홍씨 할머님을 뒤로하시면서 별세하신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1777년(정조 1) 진사시에 합격하고 출사(出仕)하셨는데  이는 4촌 동생인 영안 부원군 김조순보다 먼저입니다. 또한, 정경(正卿: 정1, 종1, 정2품)을 하실 학덕(學德)과 식견(識見)이 있었음에도 실권 없는 공조 참의 밖에 이르지 못한 점과 당시 정치 일선에 나서지 않은 점은 무엇을 말해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