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증유물 도록/편지

김성근(金聲根)의 편지

추읍산 2010. 6. 3. 17:15

 

 양평 친환경농업박물관<역사관> 소장         도록 p92

 

 

41 ×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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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김성근(金聲根)의 편지                    

(미상년. 4. 그믐)                                                                       도록 p318~319


頃有二書 幷己抵覽否 間雨俱有助於秧與麥矣 侍履卽辰安勝 渾眷均穩 靈山敎

경유이서 병기저람부 간우구유조어앙여맥의 시이즉진안승 혼권균온 령산교


官 間往菊峰 再昨始還 旌善亦伴行 而見挽落後 槪聞近信 情境多不忍聞 又增

관 간왕국봉 재작시환 정선역반행 이견만락후 개문근신 정경다불인문 우증


懷而己 山地占得於寢楸局內云 神雖允愜 而不知形便如何 誰能裁穴 襄日在來

회이기 산지점득어침추국내운 신수윤협 이불지형편여하 수능재혈 양일재래


初四云 凡具雖曰準備 似甚窘迫 初二引行 從木路 草五可返虞也 從疝苦 近亦

초사운 범구수왈준비 사심군박 초이인행 종목로 초오가반우야 종산고 근역


肆動 劇歇無常而 視祟日甚侵昏 今便爲靑盲觀也 因是而火發 不可堪也  姑閣

사동 극헐무상이 시수일심침혼 금편위청맹관야 인시이화발 불가감야  고각

 

 

 

四月晦日 聲從

사월회일 성종


전에 보낸 두 편지는 모두 받아 보았는지요? 그 사이 비가 내려 모와 보리에 모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어른 안부는 지금 평안하시고 권속들도 모두 잘 있는지요? 영산(靈山) 교관은 그 새 국봉(菊峰)에 갔다가 그제 비로소 돌아왔는데, 정선(旌善)도 따라 가다가 만류 당하여 뒤에 쳐졌습니다. 근자의 소식을 대략 듣자면 차마 들을 수 없는 정경(情境)이 많으니 생각만 많아질 뿐입니다. 산소를 침추(寢楸)의 국(局) 안에 정했다고 하는데, 귀신에게 실로 흡족할지라도 형편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무덤을 마름할 수 있습니까? 장례일이 다음 달 4일이라고 하는데, 모든 장비가 준비 되었다 할지라도 몹시 군색하고 부대낄 것 같습니다. 2일 날 발인은 목로에 따르며, 5일에는 반우(返虞)할 수 있습니다. 저는 산증(疝症)20)이 근자에 도져 더했다가 덜했다가 일정치 않으며, 눈병도 날로 심하여 눈이 점점 어두워져서 청맹과니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화기(火氣)가 발(發)하여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4월 그믐 성종(聲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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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산증(疝症) : 생식기와 고환이 붓고 아픈 병. 아랫배가 땅기며 통증이 있고 소변과 대변이 막히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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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추읍산)가 쓰는 글

 

김성근(金聲根)의 편지라고 도록 집필진은 쓰고 있는데 이는 고종 때의 김성근(金聲根 1835~1918 | 호 : 海士)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그분은 저의 13대조 청음 김상헌의 친 형님, 선원 김상용의 후손으로 가까운 일가는 아닌데(가까운 일가가 기록된 족보에서 金聲根을 찾지 못하였다) 장례 일에 관여하시는 것으로 보아 큰 의미의 문중 일로서 특별히 친밀하게 지내셨는가 보다? 병자호란때 강화도 남문루에서 순절하신 김상용의 8대손인 김성근은 고종 때에 출사하신 분으로 저의 고조 김병주(金炳㴤 1827~1887)와 증조 김정규(金定圭 1862~1903) 때인데 날짜가 미상년 4월 그믐으로 되어 있어 어느 조상님의 장례 일인지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이를 추적하였는데 1887, 6, 12일 운명하신 고조부 김병주의 장례를 치를 때는 아니고 그렇다면 고조부의 초취부인 평산신씨는 庚戌  6월 25일, 재취부인 파평 윤씨는 乙未 2월 15일, 그리고 삼취부인 풍천임씨는 辛亥 2월 21일 돌아가셨다. 김성근의 편지라고 소개한 그때에 운명(殞命)하신 분은 누구 실가? 고종 때에 출사한 김성근에 대하여 naver 백과사전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본관 안동(安東). 자 중원(仲遠). 호 해사(海士). 1862년(철종 1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 벼슬을 거쳐 도승지(都承旨) ·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이조참판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혁명 때 다시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1901년에 장례원경(掌禮院卿)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 ·규장각학사(奎章閣學士) ·홍문관학사를 지냈으며, 1902년 탁지부대신이 되었다. 1904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910년 국권피탈이 되자 자작(子爵)이 되었다. 청렴결백하고 서예에 뛰어났으며 필체는 미남궁체(米南宮體)였다. ---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3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