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증유물 도록/편지

김홍근(金弘根)이 김유근(金逌根)에게 보낸 편지 6

추읍산 2010. 3. 22. 15:57

 

양평 친환경농업박물관<역사관> 소장         도록 p91

 

 58 ×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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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록 p317~318

 

  37. 김홍근(金弘根)이 김유근(金逌根)에게 보낸 편지 6

(1837. 4. 24.)

 

 

日來氣體侯萬安 伏慕伏慕 弟昨午抵此 今向驪邑 明堂還出 而微泄忽成痢漸

일래기체후만안 복모복모 제작오저차 금향여읍 명당환출 이미설홀성리점


腹痛殊緊 固知一時滯祟 略疏  似卽差矣 開金井與出樞 汝學則自前以推擇爲當

복통수긴 고지일시체수 약소  사즉차의 개금정여출추 여학칙자전이추택위당


昨日利於開金井云 故先去封墳 以舊壙天灰倣樣造新機而爲之 出樞則卄八日申

작일이어개금정운 고선거봉분 이구광천회방양조신기이위지 출추칙입팔일


時爲吉云 家內望哭之節 以此日時爲之 前一日有祠堂告由 來時使吉甫書置告辭

시위길운 가내망곡지절 이차일시위지 전일일유사당고유 래시사길포서치고사


臨期使行之伏望 啓壙審每若無他盧 則欲旋覆橫帶 加覆油芚等物 上又設幕 臨

임기사행지복망 계광심매약무타노 칙욕선복횡대 가복유둔등물 상우설막 임


時奉出爲計 未知如何 無論祭廳與廬舍 三位停樞過耳 兩夜極多小心難更之端故

시봉출위계 미지여하 무론제청여려사 삼위정추과이 양야극다소심난갱지단고


耳 雖旋掩覆 纔啓玄 便是出樞 則祭尊등절 欲於壙前設幄而行之矣 新占處

이 수선엄복 재계현상  편시출추 칙제존등절 욕어광전설악이행지의 신점처


自 是局內正中之地 而代木開基 宛然有尊重之像 有湖中老人之素稱亭眼者 爲

자 시국내정중지지 이대목개기 완연유존중지상 유호중노인지소칭정안자 위


汝學邀來 而亟稱佳吉 大可慰耳 餘姑不備白

여학요래 이극칭가길 대가위이 여고불비백


丁酉四月卄四日 從弟 弘根 上書

정유사월입사일 종제 홍근 상서


요즈음 평안하신지요? 매우 그립습니다. 저는 어제 낮에 이곳에 와서 지금은 여주(驪州)로 가고 있으며 내일 돌아가는 길을 출발할 것입니다. 그런데 약간 설사가 나더니 갑자기 심해졌고 복통이 특히 심했습니다. 일시적으로 체한 병이라는 것은 알지만 대략 써서 알려 드립니다. 아마 곧 나을듯 싶습니다. 금정(金井)을 여는 것과 관을 들어내는 것에 대해 여학(汝學)은 이전부터 미리 택일해놓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었는데, 어제가 개금정(開金井)에 좋은 날 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리 봉분을 제거하고 구광(舊壙)을 본떠 새 무덤의 틀을 만들었습니다. 관을 꺼내는 것은 28일 신시(申時)가 길하다고 합니다. 집안의 망곡(望哭) 절차는 이 일시(日時)에 행하고 하루 전에 사당에 고하며, 올 때 길보(吉甫)를 시켜 고하는 글을 써서 두었다가 관을 낼 시간에 맞추어 행하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무덤을 열고 살펴 별다른 염려거리가 없으면, 곧바로 횡대(橫帶)를 덮고 그 위에 유둔(油芚) 등의 물건을더 덮을것입니다. 위에는 다시 장막을 설치하여 임시로 봉출(奉出)할 계획인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제청(祭廳)과 여사(廬舍)를 막론하고 세 위(位)의 관을 두기엔 벅찹니다. 이틀밤 동안 조심스럽고 불편한 일이 매우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덮는다 해도 현경(玄扃: 무덤)을 열자마자 곧바로 관을 꺼내면, 음식을 차려 제사 지내는 등의 절차는 구덩이 앞에 휘장을 치고 행하려 합니다. 새로  점찍은 곳은 국내(局內)의 정중앙 자리인데, 대목(代木)하여 터를 여니 완연히 존중(尊重)할 만 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평소 형통한 눈으로 유명한 호중(湖中) 노인을 여학(汝學)이 맞이하여 왔더니, 길하고 좋다고 자꾸 칭찬하여 크게 위로가 됩니다. 나머지는 이만 줄입니다.


1837년 4월 24일 종재(從弟) 홍근 (弘根)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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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추읍산)가 쓰는 글


김홍근이 김유근에게 보낸 편지는 이로써 마칩니다.

조상님 묘의 이장을 하기 위하여 그때의 모습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분의 묘소를 이장하기 위함인지는 언급이 없습니다. 물론 두 분(김유근, 김홍근)과 그때의 집 안에서는 알었겠지만, 편지를 보는 지금은 그렇습니다. 때문에 묘표 등의 기록을 통해서 알아야 하는데 그 자료가 양평박물관에 있고 이 또한, 연구하여야 할 과제이므로 필자는 그때의 모습일 것으로 생각되는 어머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옮깁니다.


필자의 8대조 김달행(金達行 )은 아들이 셋 있는데 큰아들은 김이기(金履基 7대조), 둘째는 김이중(金履中 영안 부원군 김조순의 부친), 셋째는 김이경(金履慶 위 편지 쓰는 김홍근의 조부)이다. 그때 현 양평군(그때는 여주) 개군면 향리 산 42에는 정 중앙에 8대조 김달행의 묘역이 조성되었고 그 오른쪽 산기슭에는 7대조 이기, 왼쪽 산기슭에는 둘째인 이중의 묘역이 있었다(셋째로 위 편지 쓰는 김홍근의 조부 김이경 묘역은 부평에있다).

 

1837년 4월 24일에는 김유근은 병이 왔으나 깊어지지 전이므로 공조 판서(憲宗 3년, 1月 19日 명받다)로 그 직책을 미약하게나마 수행하였을 것이다.  어떻든 신체상으로 온 병은 대소 간에 집안사에서 6촌 동생인 김홍근이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김유근이 병환으로 식물인간처럼 된 것은 1839년부터 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머님의 구전은 이렇다. 이장을 하기 위하여 김이중의 광중을 파니 그 안에서 빛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 좋은 자리를 이장를 하다니 어떻든 김이중의 묘역은 이웃인 개군면 계전리 이묘하고 그 자리에는 큰아들이며 필자의 7대조인 김이기의 묘역을 옮겨왔다. 위 편지에서 보면 세 위를 말하고 있는데 이는 김이중의 이장할 때를 기록한 것으로 추리한다. 위 편지에서 세  위(位)란 김이중과 초 취부인 평산신씨(김조순을 낳으신 분), 재 취부인 함평이씨 이렇게 삼위를 일컬음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