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 床銘은 황산유고(2009년 양평군 발행, 안동김씨 문정공파 기증유물 도록, p488~489)에 나와있다. 그리고 이 글은 김유근이 벗 김경연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쓴 글로 추리(推理)하고 이에 의해서 글을 쓰겠습니다. 글의 문맥으로 보아 김경연을 가리키고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황산 김유근(黃山 金逌根 1785~1840), 이재 권돈인(彝齋 權敦仁 1783∼1859) ,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년 ~ 1856년), 동리 김경연(東籬 金敬淵 1778~1820)은 세교를 통한 유대와 어렸을 적부터 함께 어울린 부랄 친구임은 본 블로그『그리운 사람』에서 소개한 바 있다. 김경연은 김정희와 함께 1816년(순조 16) 7월 북한산 비봉의 고비(古碑)가 신라 제24대 왕인 진흥왕(534~576)의 순수비임을 확정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완당전집을 보면 황산, 이재, 추사, 동리가 함께 어울린 자취가 곳곳에 나온다. 그는 영의정 김재로(金在魯(1778~1820)의 증손자이며 경학(經學)과 역사에 통달하고 금석, 시문에서도 각기 일가를 이루었다고 한다. 편저로 『동리우담(東籬偶談)』이 있다.
김경연이 1820년 43세의 중년 나이로 운명(殞命) 후 인천에 묻혔음은 아래 글(床銘)을 통해서 알 수 있다(인천시 남동구 운연동에 묘소가 있다고 한다.). 그때 황산, 이재, 추사는 얼마나 슬픔에 젖었을까! 그리고 본 글(床銘)에서 보면 황산, 추사, 이재가 동리의 인천 묘소를 찾아가지 않았나 생각되는데 얼마나 슬퍼하였을까! 그때 床銘을 남겼을까? 동리 김경연의 묘소 앞에 있는 상돌에 이 세 분의 글이 남아있지 않을까? 확인하고 그때를 연구하는 자료로 활용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床銘상명
상(床)에 대한 명
北山峩峩 북산아아 북쪽 산은 우뚝하고
淸溪潾潾 청계린린 맑은 시내는 투명하네
昔我故人 석아고인 옛날에 내 벗이
爰宅溪濱 원댁계빈 시내가에 터를 잡았는데
奕世公卿 혁세공경 대대로 그 집안 공경(公卿)들께서는
不厭其貧 불염기빈 가난을 마다하지 않으셨지
及余之幼 급여지유 나는 어릴 때에
相與比鄰 상여비린 그와 이웃해 살았고
及余之長 급여지장 장성해서는
幸得相親 행득상친 다행히 가까운 사이가 되었지
羣分類萃 군분류췌 끼리끼리 모이는 것이 세상 이치인지라
和光同塵 화광동진 그대와 나 속세에 묻혀 재주 감췄지
以我之故 이아지고 나 때문에
逢人之嗔 봉인지진 사람들의 분노를 사서
坎坷多年 감가다년 여러 해 동안 곤경에 빠졌는데도
不皺不嚬 불추불빈 태연히 괴로워하지 않았지
朝廷大用 조정대용 나라에서 그에게 중요한 일 맡겨
爲鳳爲麟 위봉위린 봉황이나 기린처럼 되었는데
旣豐而嗇 기풍이색 재주 많고 뜻 컷지만 수명이 짧아
壽纔中身 수삼중신 중년 나이에 세상을 버렸네
西望仁川 서망인천 서쪽으로 인천(仁川)을 바라보니
墓草己陣 묘초기진 묘소의 풀은 더부룩하겠지
言議風采 언의풍채 사리에 맞는 논의, 위엄 있는 풍모
誰識其眞 수식기진 누가 그의 참 모습을 알까
秋史元春 추사원춘 추사(秋史) 원춘(元春)373)과
彛齋敦仁 이재돈인 이재(彛齋) 돈인(敦仁)374)과
我銘其床 아명기상 내가, 그 상에 글을 새기니
永世不湮 영세불인 영원히 보존되리라
------------------------------------------
373) 추사(秋史) 원춘(元春) : 추사는 김정희의 호이고, 원춘은 김정희의 자이다.
374) 이재(彛齋) 돈인(敦仁) : 이재는 권돈인의 호이다.
'남기고 싶은 글 > 황산과 그 문우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석교(石交) 사이 (0) | 2010.06.07 |
---|---|
추수백운속도(秋樹白雲續圖) (0) | 2010.06.03 |
제 연산도(題 硏山圖 ) (0) | 2010.02.24 |
김유근이 그린 연산도(硯山圖) (0) | 2010.02.24 |
묵소거사자찬(黙笑居士 自讚) (0) | 2010.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