善竹橋 書感 선죽교 서감
선죽교(善竹橋)108)에서 감회를 쓰다
김유근(金逌根 1785~1840)
當時天意眷眞人 당시천의권진인 그 때 상제께서 참된 사람 사랑하신 것이니
未必前王姓是辛 미필전왕성시신 전왕(前王)이 신씨(辛氏)109)라는 확증은 없네
揖讓唯聞歸舜禹 읍양유문귀순우 요(堯)임금은 순(舜)에게, 순임금은 우(禹)에게 나라 양보했고
謳歌不見屬朱均 구가불견속주균 백성은 단주(丹朱)와 상균(商均) 찬양하지 않았지110)全生地下應無面 전생지하응무면 구차히 목숨 부지하면 지하에서 뵐 면목 없기에
一死橋邊願贖身 일사교변원속신 선죽교에서 죽어 속죄하길 원한게지
莫把故都看逆旅 막파고도간역여 옛 도읍을, 머물다 가는 여관으로 보지 말라
祖先自昔悉臣民 조선자석실신민 자고로 선조들이 모두 신민(臣民)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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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선죽교(善竹橋) : 경기도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돌다리로,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가 이방원(李芳遠)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 4, 5인에게 피살된 곳이다.
109) 전왕(前王)이 신씨(辛氏) : 고려말에 혁명 세력들은 우왕(禑王)이 신돈(辛旽)의 자식이라 하여 인정할 수 없다 했다.
110) 백성은...않았지 : 단주는 요임금의 아들이고, 상균은 순임금의 아들이다. 순이 요임금을 보필한 지 28년에 요임금이 죽었는데, 3년상을 마치고 순이 요임금의 아들 단주를 피하여 남하(南河)의 남쪽으로 갔다. 그런데 제후들은 단주에게 가지 않고 순에게 갔고, 옥사를 송사하는 자들이 단주에게 가지 않고 순에게 갔으며 , 덕을 노래하는 자들이 단주를 노래하지 않고 순을 노래했다. 우가 순임금을 보필한 지 17년에 순임금이 죽었는데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맹자』 「만장(萬章)」상 5,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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