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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소주(韋蘇州)의 시에 차운하여 번민을 달래다

추읍산 2011. 1. 24. 17:03

 

次韋蘇州韻 遺悶 차위소주운 유민


위소주(韋蘇州)의 시112)에 차운하여 번민을 달래다

 

김유근(金逌根 1785~1840)


茫茫宇宙間 망망우주간 아득한 우주에

大抵百年客 대저백년객 누구나 백 년 사는 나그네 신세

百年尙未到 백년상미도 백 년도 살기 어려우니

渺如海投石 묘여해투석 미미한 존재 바다에 던져진 돌과 같거늘

何況凡人見 하황범인견 어째서 보통 사람 식견은

朝復不謨夕 조복불모석 아침에 저녁을 헤아리지 못하는가

慨然發長喟 개연발장위 개연히 긴 탄식을 하며

圖存身後迹 도존신후적 사후 자취 보존할 일 도모하네


過去尙何論 과거상하론 지나간 일 말한들 무엇 하리

現在猶是客 현재유시객 지금도 여전히 나그네 신세

立志謝芬華 입지사분화 뜻를 세워 화려함 사절하고

丁寧矢金石 정령시금석 진정 금석 같은 굳은 맹세 다짐했지

百死不如學 백사불여학 백 번 죽더라도 배움만이 가치 있으니

朝聞死可夕 조문사가석 아침에 도를 개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네113)

殷勤對方冊 은근대방책 은근히 서책을 대하고서

力追古人迹 력추고인적 힘써 옛 현자의 자취 찾아보네


少年不經事 소년불경사 소년은 경험이 부족하여

傾身憙結客 경신희결객 힘 다해 교제 맺기를 좋아하지만

平昔無所失 평석무소실 평소에 잘못한 일 없거늘

居然爭下石 거연쟁하석 서슴없이 앞 다투어 돌을 던지네114)

畏約竟何時 외약경하시 두려움에 위축된 신세 어느 때나 벗어날까

睥睨非一夕 비예비일석 흘끔흘끔 엿보기 하루 이틀이 아니었네

蓋棺有定論 개관유정론 관 뚜겅 덮으면 틀림없는 평가 있으리니

試看心與迹 시간심여적 한 번 마음과 자취를 살펴보라

 

子房天下士 자방천하사 천하의 훌륭한 선비 자방(子房)은

東見滄海客 동견창해객 동쪽에서 창해군(滄海君)을 만나고115)

從容步圯上 종용보이상 한가로이 다리 위를 거닐다가

屈身事黃石 굴신사황석 몸을 굽혀 겸손히 황석공(黃石公)을 섬겼지116)

四百漢家業 사백한가업 사백년 한 나라 왕업이

肇自陳留夕 조자진유석 진류(陳留)의 저녁에서 시작되었는대117)

決意從赤松 결의종적송 적송자(赤松子) 따르기를 결심하고

一朝遂斂迹 일조수렴적 마침내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추었네118)


常愛孔文擧 상애공문거 문거(文擧)는 항상 선비들에게 사랑 받아

樽酒對座客 준주대좌객 술자리 마련해 손님과 마주하고는119)

兒戲視老瞞 아희시노만 노회한 아만(阿瞞)120)의 짓거리 애들 장난으로 여겼으니

忠義可泐石 충의가륵석 그 충성과 의리 비석에 새길 만하건만

德祖儘輕薄 덕조진경박 덕조(德祖)는 참으로 경박하여

奇禍不竟夕 기화불경석 하룻밤 사이 기막힌 재앙에 걸려들었지121)

借問操觚者 차문조고자 묻노니, 문인(文人)들이여

論人貴執迹 논인귀집적 인물 평가에 행적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


帝胃思匡恢 제위사광회 황실 후손 유비(劉備)는 한나라 부흥 생각하여

三顧南陽客 삼고남양객 남양(南陽)의 제갈량(諸葛亮)을 여러 번 방문했지

丁寧託孤語 정녕탁고어 어린 아들 부탁한 간곡한 유언122)

誠信貫金石 성신관금석 그 진심은 금석(金石)도 뚫었네

心殫六出師 심탄육출사 온 정성 다해 여섯 번 출정했는데

星霣五丈夕 성운오장석 오장원(五丈原)에 별 떨어져 최후를 맞이했으니123)

悠悠千載下 유유천재하 아득한 천년 뒤

曠感君臣迹 광감군신적 세월이 멀어도 군신간의 자취 감동을 주네


五侯擅漢政 오후천한정 오후(五侯)124)들이 한나라 정권 독점하여

門多遊設客 문다유설객 그 집은 유세객으로 문전성시 이루었지

杜谷稱名士 두곡칭명사 두곡(杜谷)125)같은 자가 훌륭한 선비라 칭해졌으니

誰能辨玉石 수능변옥석 누가 옥석(玉石)을 구분할 수 있었겠는가

經術誤人事 경술오인사 경학을 빌미로 인사(人事)를 그르치고

傳會前對夕 전회전대석 임금 뵙는 저녁에 견강부회하여126)

遂令嗜利徒 수령기이도 마침내 모리배들로 하여금

紛然起接迹 분연기접적 어지럽게 일어나 그 자취 잇게 하였네


博陸識治體 박륙식치체 박륙후(博陸侯)127)는 다스림의 근본 알아

屏絶遊談客 병절유담객 유세객을 물리치고 끊어 버렸네

忘身殉大計 망신순대계 자신을 돌보지 않고 큰 계책만 생각해

措國同磐石 조국동반석 반석위에 국가를 올려 놓았네

漢宣自少恩 한선자소은 한선제(漢宣帝)는 신하에게 은혜 적어128)

? 昧長定夕 ? 매장정석 어두 컴컴한 밤에 긴 계책을 정했지

瀟魏傾險士 소위경험사 소위(瀟魏)129)는 험벽한 자들이니

千載難掩迹 천재난엄적 영원히 그 자취 감추기 어려우리라

 

賈生眞才子 가생진재자 가생(賈生)130)은 진정 재주 있는 인물이니

吳公能好客 오공능호객 오공(吳公)은 진정 빈객 좋아할 줄 알았네131)

明時憂聖主 명시우성주 태평한 때 임금을 걱정하여

至言似藥石 지언사약석 훌륭한 충고 약석(藥石)과 같았네132)

賦鵩長沙日 부복장사일 장사(長沙)에서 복조부(鵩鳥賦)를 지었고

問鬼宣室夕 문귀선실석 선실(宣室)에서 귀신의 본질 아뢰었지133)

懷哉澤畔人 회재택반인 그립구나 연못 배회하던 굴원(屈原)이여

先後同其迹 선후동기적 앞뒤로 그 행적 같구나134)


漢廷多新貴 한정다신귀 한나라 조정에 새로운 귀족 많아져

宸心懷舊客 신심회구객 임금님은 옛 사람 그리워했네

緬仰一絲風 면앙일사풍 아득히 한줄기 바람 맞으며

若將居木石 약장거목석 자연 속에 묻혀 살려 했네

臣主兩漁名 신주양어명 임금과 신하 모두 명성 낚아채려 하니

殆哉同臥夕 태재동와석 위태롭구나 함께 누워 있는 저녁이여

所以東京士 소이동경사 이 때문에 낙양(洛陽)의 선비들

依樣慕遺迹 의양모유적 전처럼 남긴 행적 흠모했지


司隷負盛名 사례부성명 사례 교위(司隷校尉) 훌륭한 명성 높아

輻湊天下客 복주천하객 천하의 명사들이 몰려 들었네135)

風栽雖自任 풍재수자임 강직한 풍도 자임 했으나

激禍如湍石 격화여단석 바위에 부딪쳐 거세진 물결처럼 재앙을 초래해

善類一朝盡 선류일조진 착한 선비들 하루아침에 모두 죽었으니

國亡詎終夕 국망거종석 나라 멸망이 바로 코앞이었네136)

嗟嗟東林士 차차동림사 아, 동림(東林)의 선비들137)

尙鑒成敗迹 상감성패적 성패의 자취 거울로 삼았어야 했는데

 

子政懷帝室 자정회제실 자정(子政)은 왕실을 걱정하여

痛恨王氏客 통한왕씨객 왕씨 집 손님을 통열히 원망하고138)

直言感少主 직언감소주 직언으로 어린 임금 감동시키니

信美他山石 신미타산석 미덥고 아름다운 타산지석이었네

發憤著灾異 발분저재이 힘써 천재지변의 원인 밝히고

達朝思兼夕 달조사겸석 밤낮으로 노심초사 하며

卅載處下位 삽재처하위 삼십 년 동안 하위(下位)에 있으면서도139)

跬步不欺迹 규보불기적 행적이 반걸음도 어긋난 적 없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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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위소주(韋蘇州)의 시 : 위소주는 소주 자사(蘇州刺史)를 지낸 당나라 위응물(韋應物)이다. 그 시는 「기전초산중도사(奇全椒山中道士)」인데, 본문은 다음과 같다. "今朝郡齋冷 忽念山中客 澗底束荆薪 歸來煮白石 浴持一瓢酒 遠慰風雨夕 落葉滿空山 何處尋行跡"


113) 아침에...괜찮네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침에 도(道)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 [子曰 朝聞道 夕死 可矣] <『논어』「이인(里仁)」>


114) 돌을 던지네 : 무정한 인심을 비유한 말이다. 한유(韓愈)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에, "술 마시면서 어울리는 친구들은 작은 이해관계 때문에 하루아침에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되고, 한 명이 함정에 빠지면 구해주기는 커녕 도리어 함정으로 밀어넣고 또 돌을 떨어뜨리기까지 한다." 했다.


115) 천하에...만나고 : 자방은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을 도운 장양(張良)의 자(字)이다. 장양은 전국시대 한(韓)의 재상 집안의 후예로,진(秦)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자 동쪽으로 가서 창해군(滄海君)을 만나 대역사(大力士) 한 사람을 얻었다. 진시황(秦始皇)이 동방을 순시할 때에 그들은 박랑사(博浪沙)에 매복하고 있다가 암살하려 했는데 실패하고 하비(下邳)로 달아났다. <『사기』55 「유후세가(留侯世家)」>


116) 몸을...섬겼지 : 장랑이 하비의 다리를 거닐고 있었는데, 한 노인이 다가와 일부러 신발을 다리 밑으로 떨어뜨리고는 주워와 신기게 하여 장랑은 참고 신을 주워와 끓어앉아 신겨주었다. 그가 병법서를 주면서 10년 뒤에 제왕의 스승이 될 것이라 예언 했는데, 결국 그 말대로 되어 소하(蕭何). 한신(韓信)과 더불어  한나라 창업의 삼걸(三傑)이 되어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이 노인이 바로 황공석인데, 그 때 "13년 뒤에 제수(濟水) 북쪽에서 나를 만나는데, 곡성산(穀城山)아래 누런 돌[黃石]이 바로 나" 라고 하여 황석공이라 부른다.<『사기』55 「유후세가」>


117) 사백년...시작되었는데 : 장양이 고조 유방을 처음 만난 곳이 진류현이었다. <『한서』40「張陳王周傳(장진왕주전)」장양 조항>


118) 적송자(赤松子)...감추었네 : 적송자는 곤륜산(崑崙山)에서 비바람을 내린다는 전설상의 신선이다. 장양이 고조 말년에, "진나라에 복수하고 평민으로서 제후가 되어 만족스러우니, 적송자를 따라 노닐고 싶다." 하면서 신설술을 닦았다. 고조가 죽고 몇 년 뒤에 장양이 죽었는데, 장양이 자취를 감추어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생겼다. <『사기』55 「유후세가」>


119) 문거(文擧)는...마주하고는 : 문거는 후한의 대학자 공융(孔融)의 자(字)이다. 공융은 학식이 높았기 때문에 항상 명사들이 많이 찾아왔는데, 그때마다 그는 술자리를 마련해 담론하였다. <『후한서』70 「정공순열전(鄭孔荀列傳」공융 조항>


120) 아만(阿瞞) : 삼국시대 위(魏) 조조(曹操)의 어릴 때 이름이다.


121) 덕조(德祖)는...걸려들었지 : 덕조는 승상 조조의 주부(主簿)였던 양수(楊脩)의 자(字)이다. 조조가 한중(漢中)을 평정한 뒤에 유비에 대한 공격 여부를 결정하지 못해 ‘닭갈비[계륵(鷄肋)]’라고 하교했는데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양수만이 조조의 의중을 알아 철수 준비를 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조조는 양수를 멀리하다가 빌미를 잡아 죽였다. <『후한서』54 「양진열전(楊震列傳)」양수조항 >


122) 간곡한...유언 : 유비가 임종할 때에 아들 유선(劉禪)에게 제갈량의 충고를 반드시 따르라고 하고, 제갈량에게는 유선이 무능할 경우 직접 제위에 오르라고 유언했다. <제갈량 「출사표(出師表), 」「후출사표(後出師表)」>


123) 온 정성...맞이했으니 : 유비 사후에 제갈량이 위(魏)를 정벌하기 위해 여섯 차례 기산(祁山)에 출정했고, 오장원에서 사마의(司馬懿)와 대치한 지 100여일 뒤 54세의 나이로 병사(病死)했는데, 그 때에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 <『삼국지35』「제갈량전」> 


124) 오후(吳侯) : 한나라 성제(成帝)의 외삼촌 평아후(平阿侯) 왕담(王譚), 성도후(成都侯) 왕상(王商), 홍양후(紅陽侯) 왕입(王立), 곡양후(曲陽侯) 왕근(王根), 고평후(高平侯) 왕봉(王逢)이다. <『한서』36 「원후전(元后傳)」>


125) 두곡(杜谷) : 진한 성제(成帝) 때의 학자로, 왕을 공격하고 외척에게 아부한 두흠(杜欽)과 곡영(谷永)을 이른다. 두흠은 실권자인 대장군 왕봉(王鳳)의 막하로 들어간 이후, 여색과 천재지변 및 황제의 물음에 곡진하게 간언을 올리기도 하였으나, 주로 왕봉의 신변을 보호할 목적으로 일종의 유세객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서』36 「초원왕전(楚元王傳)」> 곡영도  역서(易書)에 밝아 천재지변을 잘 말했는데, 왕봉에게 아부하기 위해 임금의 잘못을 들추어 왕봉을 두둔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한서』85 「곡영두업전(谷永杜鄴傳)」>


126) 경학을 ...견강부화하여 : 두흠과 곡영이 저지른 잘못을 말한 것이다.


127) 박륙후(博陸侯) : 한나라 대장군 곽광(霍光)의 봉호(封號)이다. 곽광은 무제(武帝)의 고명을 받아 어린 소제(昭帝)를 세워 보필하여 나라를 안정시켰고, 소제가 죽자 창읍왕(昌邑王) 하(賀)를 맞아들여 제위(帝位)에 있게 했다가 그가 음란하다 하여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옹립했다. <『한서』68 「곽광김일제전(霍光金日?傳)」>


128) 한선제(漢宣帝)는...은혜 적어 : 곽광이 충성을 바치고 공적을 세웠음에도 한선제가 그 일족을 모두 죽인 일을 말한다. <『통감절요(通鑑節要)』12 「한기(漢紀)」중종효선황제(中宗孝宣皇帝)상>


129) 소위(蕭魏) : 소위는 소망지(蕭望之)와 위상(魏相)을 이른다. 소망지는 선제 때 어사대부(御史大夫)로서 한연수(韓延壽)의 횡령죄를 보고받고 승상 병길(丙吉)과 의논했는데 병길은 대사령(大赦令)이 내렸으니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만류했다. 그런데도 소망지가 조사를 진척시키자 한연수도 소망지의 과거 행적을 조사하여 탄핵하였다. 이에 소망지가 상참부도(上僭不道)의 죄목으로 탄핵한 결과 전법대신(典法大臣)을 무고하였다는 것으로 한연수를 기시(棄市)에 처했다. <『한서』78 「소망지전」48> 위상은, 곽광의 집안이 패망하는 기회를 틈타 묵은 앙심을 풀고 간계를 써서 승상 자리를 취하였으며 승상이 되어서는 일마다 반드시 허 황후의 아버지 허백(許伯)과 외척 사고(史高)에게 물어 행하였다. <『한서』74 「위상병길전」44>


130) 가생(賈生) : 한나라 명문장가 가의(賈誼)이다.


131) 오공(吳公)은...알았네 : 효문황제(孝文皇帝)가 즉위 초기에 오공을 초빙하여 정위(廷尉)로 삼았는데, 오공이 가의는 어리지만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에 정통하다고 추천하여 문제가 가의를 박사(博士)로 임용하였다. <『사기』84「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


132) 훌륭한 충고...같았네 : 가의가 시국광구책(時局匡救策)인 치안책(治安策)을 문제에게 올려 시정(時政)을 논평하고 개선을 건의한 것을 이른다. <『한서』48「가의전>」


133) 장사에서...아뢰었지 : 복조는 흉조(凶鳥)로 알려진 올빼미이다. 바른말을 자주하는 가의를 대신들이 미위하여 그를 참소해 장사왕(長沙王) 태부(太傅)로 좌천시켰다. 좌천된지 3년에 올빼미가 가의의 집에 날라와 앉았는데, 죽을 날이 머지않았음을 느끼고 슬퍼하며 「복조부」를 지어 스스로 위안했다. 선실은 한나라 미앙궁(未央宮)의 정전(正殿)이다. 장사왕 태부로 있던 가의를 문제가 소환하여 만났는데, 문제가 귀신의 본질에 대해 물었다. 가의가 그 이치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니 문제가 그 박식함과 정밀함에 탄복했다. <『사기』84「굴원가생열전」>


134) 그립구나...행적같구나 : 굴원은 전국시대 초(楚)나라 삼려대부(三閭大夫)로 참소를 받아 추방되어 연못을 거닐며 시를 읊었다. <굴원 「어부사(漁父辭)」> 가의가 장사왕 태부로 좌천되어 갈 때 굴원이 투신하여 죽은 멱(?)라수(汨羅水)를 지나면서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었다. <『사기』84「굴원가생열전」


135) 사례 교위(司隷校慰)...몰려 들었네 : 사례 교의는 후한 이응(李膺)을 가리킨다. 환제(桓帝) 때 환관이 정권을 차지하여 기강이 무너진 상황에서 이응만이 홀로 당당함을 지키고 있어 명성이 높아졌다.

<『후한서』67「당고열전(黨錮列傳)」>


136) 착한 선비들...코앞이었네 : 영제(靈帝) 때에 이응을 비롯한 두무(竇武) 등이 환관을 죽이려고 모의하였는데, 계획이 누설되어 1백여 명이 죽음을 당하였다. <『후한서』67「당고열전」>


137) 동림(東林)의 선비들 : 명나라 신종(神宗)  만력(萬曆) 연간에 고헌성(顧憲成)이 고반룡(高攀龍)과 함께 동림서원(東林書院)에서 맺은 유당(儒黨)의 선비들이다. 간신 위충현(魏忠賢)이 득세하자 그간 동림당을 시기하고 있던 자들이 그것을 기회로 중상모략을 하여 당화(黨禍)를 일으켜 거의 죽이고 쫓아냈다. <『명사(明史)』「열전」119 고헌성 조항>


138) 자정(子政)은...원망하고 : 자정은 대학자 유향(劉向)의 자(字)이다. 성제 때에 외척인 대장군 왕봉이 태후를 의지하여 전권을 장악하고, 그의 형제 7인이 모두 제후에 봉해지는 등 기세등등하였다. 유향이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시폐(時弊)를 조목별로 논한 「홍범오행전론(洪範五行傳論)」등을 지어 올리고, 외척 왕씨의 전행을 비판하였다. 황제가 감동하기는 했지만 나약하여 끝내 그의 충언을 받아들여 시행하지는 못했다. <『한서』36「초원왕전」유향 조항>


139) 삼십 년 동안...있으면서도 : 성제가 자주 유향을 등용하여 구경(九卿)을 삼고자 했으나 실권을 가진 왕씨들과 승상과 어사들에 의해 견제를 받았기 때문에 끝내 승진하지 못하고 낮은 대부의 관직에 30여 년 있다가 죽었다. <『한서』36「초원왕전」유향 조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