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贊成公(達行) 가문

성묘(省墓)

추읍산 2011. 2. 5. 18:58

성묘(省墓)

 

우리 가족은 설날 복잡함을 피해 다음 날 오후, 성묘길에 나섰다. 주현이는 직장일로 함께하지 못하여 아쉬웠는데 한강 변을 따라가는 길, 하늘은 잔뜩 찌푸려져 있는데 늦게 귀향하는 차량행렬과 구제역 방역으로 말미암아 차는 가다 서기를 반복하였고 평소 같으면 1시간도 안 걸릴 길이 2시간 이상이나 소비되었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도 춥다. 도로변 한강은 꽁꽁 얼어 물속 고기는 어떤 모습일까? 변온동물이라 추위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필자는 김달행의 8대 종손으로 생몰일 추가하여 계통도를 다시 만들어 보았다. 표 안의 분들은 본 블로그 찬성공의 후예편에서 소개하여 드린 바 있는데 이번에는 직계조상님의 묘역을 참배하였고 아울러 그분들(표 우측 붉은 배경)에 관한 글을 더 추가하기로 하였다.


시조 김선평(金宣平)


김상헌(金尙憲)-광찬(光燦)-수항(壽恒)-창집(昌集)-제겸(濟謙)-달행(達行)

 

20세 金達行(1706~1738)

21세

                     慶                    

 1738~1816

履中

1736~1793

 履基 1724~1790

22세

                      明淳                    生父  履基

1759~1810

       祖淳         1765~1832

 龍淳 1753~1823

23세

興根 1796~1870

 應根

1793∼1863 

弘根 1788~1842

左根 1797~1869

元根

1786~1832

逌根

生父 祖淳

1785~1840 

24세

炳德

1825~1892

炳始 1832~1898

炳溎 1824~1855

 

炳冀

生父 泳根 

1818~1875

 

炳地 

1830~1888

 

   炳㴤 

生父 弘根 

1827~1887

 

25세

宗圭 1862~1922

容圭 1864~1902

性圭 1846~1896

用圭 1867~1927

 錫圭

生父 炳洙 

1864~1905

 定圭 1862~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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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조 김달행(金達行 1706~1738, 字: 脩甫)과 8대조비 한산이씨(韓山李氏 1706~1747)의 묘소 앞이다. 앞, 오른쪽부터 큰아들, 평생의 반려자, 필자, 둘째 아들이다.

더 볼 곳 http://blog.daum.net/0113508344/4719223  

 

 

8대조 묘하, 향리 2반(아랫상골) 회관에서 바라본 향리 저수지

날씨가 흐려 선명하지 못하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도 추워 언 저수지 물은 차가 지나가도 견딜 듯 단단해 보였다. 눈 덮인 산하가 뿌연 안갯속에 잡힐듯하다.

 

 

7대조 김이기(金履基 1724~1790, 字 德汝) 묘소 앞이다. 할머니는 청해이씨로 한중록을 보면 할아버지의 성장기 모습과 위 두 분의 혼례(禮) 때의 기록이 나온다.     보기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DGT4808930706315&barcode=4808930706315&keyword=%EA%B9%80%EC%9D%B4%EA%B8%B0&preTab=02&isDaumSearchRefer=false#tab_preview 

 

더 볼 곳: http://blog.daum.net/0113508344/4719224 

 

 

6대조 김용순(金龍淳 1753~1823, 字 施伯) 묘소 앞

할머니는 풍산홍씨로 합장되었다. 1777년(정조 1), 진사시에 합격하고 주로 지방관으로 봉직하셨다. 본 블로그 「김용순이 김유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보면 1821년 황주목사를 마지막 지방관으로 근무하시고 귀경 잠시 공조참의를 하셨을 것으로 생각한다. 1823년, 4월 14일 운명하셨는데 이때 아들 김유근을 대신하여 조카 김홍근이 묏자리 보러 다니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참고: http://blog.daum.net/0113508344/4719619  

 

초장은 1823년, 여주군 흥천면 효지리로 모셔졌는데 1980년대 초, 현 위치로 5대조 황산 김유근과 함께 이묘 하였다. 더 볼 곳: http://blog.daum.net/0113508344/4719225   

 

 

5대조 김유근(金逌根 1785~1840, 號 黃山, 字 景先) 묘소 앞

할머니 해주오씨와 여흥민씨께서 합장되시었다.

황산 할아버지 묘소는 여주에서 이곳으로 모셔오면서 6대조와 함께 한 구역 안에 묘역을 조성하였다. 할아버지의 황산유고를 본 블로그에 싣고 있는데 이는 편지와 함께 그 시대와 할아버지의 모습을 엿볼 수 있어 소중한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8대조 김달행, 6대조, 5대조의 묘소를 같이 한 장에 넣어 보았다. 오른쪽부터 8, 6, 5대조의 묘소이다.

 

 

고조 김병주(金炳㴤 1827~1887, 字 範初, 호 小山)

카메라의 배터리가 다 되어 찍지 못하였다. 대신 먼저 찍은 사진을 올린다. 할아버지의 초장은 양평군(그때는 여주군) 개군면 계전리인데 후 향리로 이 묘하였다. 할머니는, 배 증정경부인 평산신씨, 후배 증정경부인 파평윤씨, 삼배 정경부인 풍천임씨로 이곳에 모셔진 분은 소산 할아버지와 평산신씨, 풍천임시 삼 위 합장이고 파평윤씨는 여주군 흥천면 효지리 산 18에 있다.

더 볼 곳: http://blog.daum.net/0113508344/4719233   

 

 

 

증조 김정규(金定圭 1862~1903 字 戒前 호 兼山)

삼위합장이며 할아버지와 배 정부인 남양홍씨(갑자생임진구월이십육일졸), 후배 정부인 청해이씨께서 잠든 곳이다.

 

향리 선영으로 처음 낙향하신 분이 할아버지라고 어머님께 전해 들었다. 향리 마을 앞에는 저수지가 들어서기 전, 164번지에는 선영을 지키는 묘막이 있었고 그곳으로 1903년 병 요양차 내려오신 것으로 생각하는데, 풍채가 좋으셨다고 들었다. 이때는 병환이 깊으신 것 같았는데 그 해를 넘기시지 못하고 42세로 운명하셨다.

 

그때는 이웃, 지제면 수곡리(무꼴)에 한학과 의술로 유명한 천학자(전 국회의원 천세기와 전 보사부 장관 천명기의 조부)가 계셨는데 그분으로부터 병환 치료를 받으셨다고 한다. 아마도 서울에 계실 때부터 천학자께서 왕래하시지 않았을까? 향리 선영으로 내려오심도 이런 사연이 있지 않았을까? 양 가문의 사랑은 아버지 생존하실 때까지 이어졌는데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간직하게 되어 아쉽다. 그러면 저의 증조 김정규는 어떤 분인가? 더 볼 곳: http://blog.daum.net/0113508344/4719246 

 

할아버지 김익진(金翼鎭 1884~癸未년)

밧데리가 다 되어 사진을 찍지 못했으므로 먼저 사진을 올린다(앞에서의 사진은 등록이 안된다). 구한말과 일정을 살아오신 할아버지는 영능참봉의 임무를 수행하시면서 여주군 개군면 하자포리(현 면 소재지)에서 교육사업에 매진하셨는데  망국의 설음을 민족교육으로 승화하셨다. 여주군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고 이는 어머님의 구전과 일치한다.


『--생략. 또한, 야학회는 아니지만, 김익진(金益鎭 |金翼鎭의 誤記?) 등은 1922년 7월에 교원 2명과 학생 35명으로 하자포학술강습회(河紫浦學術講習會)를 설립하였다. 이하 생략』

출처:  http://history.yj21.net/Search/SearchForm.asp?SearchWord=%EA%B9%80%EC%9D%B5%EC%A7%84&x=16&y=8  


 필자는 할아버지를 보지 못했지만 어머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영능참봉(參奉)을 역임하셨다고 들었는데 이런 연고로 필자가 어렸을 적에는 주위에서 참봉댁으로 불리기도 했다. 어느 곳의 참봉이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는 기록이 집에 없어 이는 과제로 남는다. 영릉참봉이라고만 기억하는데 이는 여주의 세종 대왕의 영릉(英陵)이나 효종 대왕의 영릉(寧陵)을 관리하는 직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일정 때도 참봉 직책은 존속? 했었는가보다.

 

 

아버지 김조한(金朝漢 1913~1967)과 어머니 풍산홍씨(1911~1985)께서 영면하여 계시다. 심신이 유학하신 부친께서는 술은 통 못하시고 담배는 즐기셨다. 이는 어머님도 같으셨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문의 멍에를 짊어지신 어머님은 그 어려운 일정시대와 해방, 그리고 6, 25를 헤쳐 오시면서 숱한 가시 발길을 걸어오셨는데 그런 속에서도 삼국지 등 명현들의 이야기와 전해오는 가문의 내력을 들려주셨는데 어머니의 뜻을 살리지 못해 죄송스럽고 글로 나마 그 모습을 본 블로그에 쓰고 있다.

 

 

위 증조 김정규의 묘소 위에서 아래를 보았다. 가운데가 아버지 김조한과 어머니 풍산홍씨로 성묘하고 잠시 감회에 젖었다. 아래는 둘째 숙부 김천한의 묘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