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규(金性圭) 할아버지
시조 김선평(金宣平)
김상헌(金尙憲)-광찬(光燦)-수항(壽恒)-창집(昌集)-제겸(濟謙)-달행(達行)
20세 金達行
21세 |
履慶 |
履中 |
履基 | |||
22세 |
明淳 生父 履基 |
祖淳 |
龍淳 | |||
23세 |
興根 |
應根 |
弘根 |
左根 |
元根 |
逌根 生父 祖淳 |
24세 |
炳德 |
炳始 |
炳溎 |
炳冀 |
炳地 |
炳㴤 |
25세 |
宗圭 |
容圭 |
性圭 |
用圭 |
錫圭 |
定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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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균(金性均, ★1884년 갑신정변후 金性圭)
왕/년도 : 고종(高宗) 3년
과거시험연도 : 1866 병인
시험명 : 정시(庭試)
등위 : 병과6(丙科6)
[인적 사항]
성명(姓名) : 김성균(金性均)
자 : 치성(稚成)
본관(本貫) :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 경(京)
[이력 및 기타 사항]
전력(前歷) : 은유학(恩幼學)
[가족사항]
부(父) : 김병계(金炳溎) 참고: 김병연으로 적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조부(祖父) : 김홍근(金弘根)
증조부(曾祖父) : 김명순(金明淳)
외조부(外祖父) : 이충익(李忠翼)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bang/detail?sn=13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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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상의 金性均
字穉成
號惠居
憲宗丙午十二月三日生
丙寅文科歷翰苑吏議丙申四月十日卒
○配淑夫人楊州趙氏丁未生丙辰十一月一日卒
父參判秉學祖郡守贈參判敎淳曾祖牧使贈參議鎭敏外祖金亨淳本宗人
○墓富川郡桂陽面橘峴里坤坐合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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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균(金性均 1846~1896. 1884, 갑신정변 이후 金性圭)은 필자의 고조 김병주의 생가 조카이다. 9세라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면서 그 삶의 모습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속에서도 저의 고조와 증조하고는 우의가 깊었음을 그의 편지로 확인할 수 있어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안동김씨 문정공파 기증유물 도록에는 숙부 김병주에게 보낸 편지가 7매 보이는데 마치 직접 말씀을 나누는 것같이 느껴진다. 1884년(고종 21) 공의 나이 38세에 보낸 편지를 보면 홀어머니를 모시면서 두 분 다 병약하심을 알 수 있는데 모친은 노환이라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 젊으신 나이인데 왜 그렇게 허약하신지 모르겠습니다. 할아버지는 문장에도 능통하시어 혜거시고(惠居詩稿)를 남기셨고 글씨도 필체가 아름다운 달필이었습니다. 혜거시고에 대하여는 안동김씨 문정공파 도록에서 저의 증조부 김정규의 시고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더 탐구하지 않은 집필진의 오류입니다. 惠居는 김성규의 호고 따라서 혜거시고는 김성규의 글입니다. 이 책이 저희 집에 있었음은 양 집안이 깊고 큰 사랑 안에서 하나 되어 있었음을 알게 합니다. 소개하기를 주로 사우(士友) 및 집안사람들과 창수(唱酬)한 시와 기행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이 책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권(卷) 삼(三)의 「려구주해(儷句註解)」다. 7언 율시 등에서 사용되는 대구들 중 고전 및 사서(史書)에 전거(典據)를 가지고 있는 시구들을 가려 뽑은 후, 그 전거에 대하여 해설하고 있다고 하면서 높게 평가하고 있다. 황산 김유근의 글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문장에 능하신 것으로 생각하는데 연구하여 그 해제본이 속히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할아버지는 갑신정변에 대하여 이를 개탄 하셨음을 그의 편지에서 볼 수 있는데 그때의 사고로는 우국충정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그때는 양 집안이 한집안 같았는데 지금은 얼굴도 모르니 모두가 제 불찰입니다. 할아버지 하늘나라에서 평안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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