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梧 벽오
벽오동
김유근(金逌根 1785~1840)
夭矯曾看種子初 요교증간종자초 씨앗을 처음 볼 대 어리고 여리더니
如今磊落媿塵裾 여금뢰락괴진거 지금은 당당한 모습, 속세에 물든 내가 부끄럽네
榦成碧玉通身冷 간성벽옥통신랭 푸른 옥 같은 줄기는 온통 맑고
葉剪靑羅疊影疎 엽전청라첩영소 푸른 비단 같은 잎새는 겹겹 그림자 성그네
留鳳幾時棲己老 유봉기시서기노 언제 봉황새 깃들어 늙어갈까
伐琴他日樂仍虛 벌금타일락잉허 후일 거문고 되어 즐거움 담박하겠지
亭亭百尺凌雲氣 정정백척릉운기 백 척 높이 우뚝 솟아 구름 뚫는 기세
愛爾長年蔭我居 애이장년음아거 오래도록 우리집 덮는 너를 사랑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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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추읍산)가 쓰는 글
삼청동의 백련사(현 교육과정평가원 자리) 뜰엔 큰 오동나무가 있어 집을 드리었음은 김유근의 또 다른 글(황산유고의 病中憶蓮社)로도 알 수 있는데 후일 거문고를 만들었을까? 속담에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 그 딸이 출가할 때 비어 장롱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런 목적으로 심으신 것은 아닐까?
백련사가 추정 1815년(순조 15)부터 있었고 그때 입주하면서 심은 오동나무로 생각하는데 따님의 혼사에 쓰고? 남은 나무가 더 자라서 우뚝 솟아 온 집을 덮고 있음을 글로 남기신 것으로 생각해 본다.
구름 뚫는 기세라면 나이가 15년 이상일 것이다. 참고로 황산 김유근은 세 분의 따님이 있었는데 큰딸(1803~1882)은 이인기(李寅虁)에게, 둘째(1816~1888)는 조장호(趙章鎬), 셋째(1820~1844)는 조병기(趙秉夔)에게 각각 출가하셨다.
필자의 젊은 시절 1,970대로 기억하는데 어느 해 봄, 면에서 각 리로 오동나무 묘목을 공급하였다. 그때 20여 주 심었는데 사랑마당에 심은 오동나무 몇 그루가 잘 자라 십여 년 후에는 사랑채를 덮고 씨가 날아다녀 온 마을에 오동나무가 번졌다. 지붕 위 개와 장 틈에서도 싹이 자라 뽑아내느라고 지붕 위를 여러 번 올라다녔고, 지금도 시골 옛날 살았던 집터에 가면 번진 오동나무가 집터를 덮고 있어 윗글을 보면서 삼청동 백련사의 옛 모습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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