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글 출처: http://sillok.history.go.kr
------------------
1827년 3월 26일: 김유근(金逌根)을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으니,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의논하여 천거한 것이다.
1827년 4월 1일: 평안 감사 김유근(金逌根)이 상서(上書)하여 새로 제수된 번임(藩任)을 사양하였는데, 답하기를, “경과 나는 의리는 비록 군신간이지마는 정리로는 지친(至親)이므로 경이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은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갑절이나 될 것이다. 이처럼 서관(西關)의 민생들이 어려운 때에 경에게 위임하는 것은 뜻이 있어서였다. 경은 임지(任地)에 내려가 직무에 정성을 다하여 내가 서관을 돌보아 생각하는 근심을 풀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1827년 4월 27일: 평안 감사 김유근(金逌根)이 하직 인사를 드리고 부임하러 가다가 서흥(瑞興)에 도착해서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부임하러 가는 길에 갑자기 천고(千古)에도 없던 흉악한 변고를 당하였는데, 절월(節鉞)을 세우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처음부터 논할 것이 없거니와, 원통하고 통분스러워 죽고만 싶습니다. 신이 처음에 마음먹기는 감영에 도착한 뒤에 곧바로 노모(老母)와 본생모(本生母)를 맞이하여 한때 잘 봉양하려고 작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두 노인을 모시려면 시중들 사람이 없어서는 안되겠기에 신의 서제부(庶弟婦)와 첩(妾)으로 하여금 먼저 신을 뒤따라 와서 정돈해 놓고 대기하도록 하였습니다. 서흥에 도착하여 신은 공청에 들어가 거처하고, 서제부와 첩은 여관에서 머물게 하였습니다. 날이 저물어 갈 때, 마침 덕천군(德川郡)에서 퇴임(退任)한 아전 장가(張哥)란 놈이 여러 차례 만나기를 청하다가, 문지기가 막고 거절하자, 곧바로 여관으로 가서 옷을 벗고 칼을 들고서 안방으로 들이닥쳐 만나는 사람마다 찔렀습니다. 신의 첩은 도망하여 다행히 죽음을 면하였으나, 서제부와 주모(主母)는 악독한 손에 죽고, 감영 소속 사비(私婢) 가운데 죽게 된 자가 두 사람이고, 상처를 입고 사경을 헤매는 자는 세 사람이나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천고에도 없는 흉악한 변고입니다.
신이 비록 미처 부임하지는 못하였지만, 40주(州)의 백성들을 거느리는 사람인데, 부하(部下)인 한낱 퇴임한 아전이 감히 조금도 두려움 없이 고약한 행패를 부렸으니, 신이 무슨 얼굴로 관서(關西)의 이속과 백성들을 대할 수 있겠으며, 신으로 말미암아 화가 형제에게 미쳤는데, 차마 무슨 마음으로 의연히 길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신의 노모(老母)가 이 참변의 소식을 듣는다면, 반드시 슬픔을 안고 나올 리가 없습니다. 이로 보나 저로 보나 신이 부임할 수 없기에 길가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큰소리로 우러러 호소하오니, 곧바로 체차해 주소서. 그리고 흉악범은 지금 막 잡아서 부옥(府獄)에 가두었는데, 법에 따라 처단하는 것은 유사(有司)가 있으므로 신이 번거롭게 청할 바가 아니고, 삼가 유시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하령하기를, “지금 들어온 글을 보고 너무나도 놀랍고 참혹하여 나도 모르게 마음이 떨렸다. 사람의 흉측하고 악독함이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단 말인가? 세상의 변고가 거듭 생기니, 더 말하고 싶지 않다. 경의 심정은 매우 슬프겠지만, 밀부(密符)를 찬 곤외(閫外)의 중요한 지방 장관의 자리를 어찌 한낱 강도(强盜)의 변괴로 인하여 갑자기 체차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미 늙은 어버이를 모시고 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오랫동안 떨어져 있는 것도 결코 지극한 정리상 견딜 수 있는 바가 아니며, 또 하기 어려운 일을 억지로 시켜 한결같이 서로 버티는 것도 예로 신하를 부리는 도리가 아니므로, 청한 바대로 시행하라. 흉악한 놈에 있어서는 앞으로 율에 의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1827년 4월 28일: 서능보(徐能輔)를 평안도 관찰사로, 홍희준(洪羲俊)을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로, 임희존(任希存)을 판의금부사로, 박종훈(朴宗薰)을 좌빈객으로, 김유근(金逌根)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1827년 4월 28일: 하령하기를, “어제 평안도 도백의 상서를 보았는데, 이게 어찌 한 사람, 한 집안의 일이겠는가? 세상의 변고에 크게 관계된 것이니, 너무나도 놀랍고 참혹하다. 지금 만약 쾌히 법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국가에 떳떳한 법이 있다고 말하겠으며, 또 어찌 흉악한 도적을 징즙(懲戢)할 수가 있겠는가? 이미 성지(聖旨)를 받들었으니, 흉악한 일을 저지른 장가놈은 그 도의 수신(帥臣)이 서흥부(瑞興府)로 달려가 백성들을 크게 모아 놓고 효수(梟首)하여 뭇사람을 경계시키고, 죄인의 아내와 자식은 모두 멀리 떨어져 살기 어려운 땅에 노비로 삼도록 일체 분부하라.” 하였다.
1827년 4월 30일: 왕세자가 차대를 행하였다. 영의정 남공철이 말하기를,
“신이 지난번 조참(朝參) 때 입대(入對)하여 8조목으로 아뢴 바가 있었습니다. 저하께서는 사람으로 인해 말을 폐기하지 않고 한가할 때 가끔 살펴보지 않으셨습니까? 그 가운데 총명(聰明)을 너무 쓰지 말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신은 이 한 가지 단락에다 상당히 힘을 썼다고 여깁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저하께서는 대조(大朝)께서 수고로움을 나누려는 성의(聖意)를 본받아, 한결같은 마음으로 다스리기를 도모하여 무너진 기강을 반드시 분발하여 진작시키고자 하시므로, 신은 그지없이 탄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하의 일이란 모두 본말(本末)과 선후(先後)가 있으니, 저하께서는 반드시 먼저 중대한 것과 실지에 있어서 폐단의 원인을 살피고 어떤 것이 폐단을 바로잡는 것이 마땅한지를 익숙히 헤아려, 해이해진 온갖 법도를 차례로 수거(收擧)해야 합니다. 그러나 뜻을 견고하게 세워 자질구레한 형식적인 절차에다 한계가 있는 총명을 지나치게 쓰지 마시고, 천천히 하여 서두르지 마시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혹시라도 해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옛날의 성인(聖人)들은 총명을 선용(善用)하여,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정사를 부지런히 하면서도 항상 정신(精神)을 보존하고 아끼는 도리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기(志氣)가 청명(淸明)하고 오랫동안 지키기를 유지하여 처음엔 부지런히 하다가 나중에 게을러지는 염려가 없었습니다. 구구한 우애(憂愛)의 충정에서 또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요즈음 강대(講對)가 정지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이는 저하께서 정무에 겨를이 없어 그런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학문과 정사는 일치된 것으로서, 학문이 정사이고 정사가 학문입니다. 신은 학문을 한 뒤에 정사를 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정사를 한 뒤에 학문을 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부열(傅說)이 은(殷)나라 고종(高宗)에게 고할 때 학문을 근본으로 삼아 시종 한결같이 하고자 하였으며, 주자(朱子)가 차자로 아뢴 수많은 말도 모두 성학(聖學)에 근본을 두어 공부가 사이에 중단될까 근심하였습니다. 옛날의 성현이 그의 임금에게 경계할 것을 권한 것이 어찌 모르고 이런 말을 하였겠습니까? 성현의 경전(經傳)을 읽지 않고 천하와 국가를 잘 다스리는 이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있지 않았습니다. 신의 이 말은 비록 진부(陳腐)한 것 같지만 다스리는 도리는 이보다 앞설 것이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앞으로는 비록 정무에 겨를이 없더라도 항상 이를 생각하여 사이에 중단될 때가 없게 하소서. 그러면 실로 학문과 사공(事功)이 번갈아 닦아지고 아울러 진행하는 도리가 될 것이며 따라서 큰 근본이 저절로 세워질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말한 바가 좋으니, 마땅히 명심할 것이다.”
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방금 전에 동래 부사 윤경진(尹景鎭)이 올린 장달을 보니, 관백(關白)이 손자(孫子)를 낳아 고경 차왜(告慶差倭)의 선문(先文) 두왜(頭倭)가 지금 이미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서울의 접위관(接慰官)과 차비 역관(差備譯官)을 파견하는 것과 그들에게 줄 예단(禮單)을 마련하는 등의 절차를 해조(該曹)와 해원(該院)에 분부하여 예(例)에 의하여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집의 조경진(趙璟鎭)이 아뢰기를,
“평안 전 감사 김유근이 부임의 도중에 변을 당한 일은 실로 전고(前古)에 듣지 못했던 하나의 큰 변괴입니다. 변괴가 뜻밖에 돌발했으니, 어찌 그 중신(重臣)에게 허물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생각건대, 중신의 처지는 의당 삼가고 조심했어야 하는데, 이번의 변괴는 천첩(賤妾)을 데리고 갔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합니다. 중신의 지위와 명망이 어떠하기에 부월을 앞세우고 감영에 부임하는 행차에 먼저 천첩을 데리고 갔으니, 삼가고 조심한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이처럼 전에 없었던 변을 만나 사방에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마침내 온 세상에 구실거리가 되고 말았으니, 주의시키는 도리에 있어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평안 전 감사 김유근에게 파직의 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니, 답하기를, “다시 생각하여 앞으로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827년 4월 30일: 하령하기를, “아까 연석(筵席)에서 대각의 신하가 전 평안 감사의 일에 관해 의견을 진달하였는데, 그가 한 말이 전혀 말이 되지 않았다. 천첩을 데리고 간 것은 부임하는 사람들에게 흔이 있는 일에 불과하고 보면, 신중하고 조심하는 여부가 어찌 이것에 관련되겠는가? 이는 사람의 불행을 틈타 감히 한번 시험해 보고자 계책을 쓴 것이니, 그의 심보를 따져 보면 너무나도 교활하고 악랄하다. 아까는 대간의 체통 때문에 비록 되돌려 보내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간사함을 막고 참소를 꺾는 도리에 있어서 그냥 둘 수 없다. 집의 조경진에게 우선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 하도록 하라.” 하였다.
1827년 4월 30일: 하령하기를, “지난번 유영오(柳榮五)의 글은 알쏭달쏭하게 말하여 대충 한번 시험해 보고자 하는 계책을 보인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사전에 조짐을 막는 뜻에서 귀양의 법을 시행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조경진이 곧장 그의 수법(手法)을 드러내어 성명(姓名)을 노출(露出)하였다. 부덕(不德)한 내가 외람되이 대리 청정의 명을 받들고 아침저녁으로 전전긍긍하여 마치 엷은 얼음을 밟듯이 하였다. 내가 평소 나의 외가(外家)를 깎아내리는 뜻을 조정의 신하들에게 보인 적이 있었는가? 그런데 대리 청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영오와 조경진의 무리들이 감히 안면을 짝 바꾸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패거리가 되어 반드시 우리 조정을 어지럽히고 우리 외가를 없애고자 하니, 그들의 심보를 따져 보면 그들이 장차 어떤 변고를 일으킬 지 어찌 알겠는가? 이는 그가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니, 지금 만약 암암리에 시킨 자를 조사해 내어 전형(典刑)을 분명히 바루지 않는다면, 내 진실로 들어가 중전을 뵐 낯이 없다. 이로써 들어가 여쭈어 이미 성상의 분부를 받았다. 내일 아침에 친히 금위영(禁衛營)에 가서 귀양보낸 죄인 조경진을 국문할 것이니, 해방(該房)은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남기고 싶은 글 > 효명세자와 김유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왕조실록(순조) 속의 효명세자와 김유근, 1827년 윤5월~10월 (0) | 2011.03.11 |
---|---|
조선왕조실록(순조) 속의 효명세자와 김유근, 1827년 5월 (0) | 2011.03.09 |
조선왕조실록(순조)에 나타난 효명세자(翼宗, 1809~1830)와 김유근(金逌根, (0) | 2011.03.09 |
효명세자(효명세자)가 김유근(金逌根)에게 보낸 편지 8 (0) | 2011.03.07 |
효명세자가 김유근에게 보낸 편지 7 (0) | 2011.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