卽是山房記
즉시산방(卽是山房)에 대한 기문(記文)
김유근(金逌根 1785~1840)
黃山子 仕宦人也 家闤闠而友薦紳 羣居 其言不離乎榮利 恒遊 其踪不外乎市朝 而應接迎送之勞 或至竟日 輒油油然與之相忘 扁其室曰卽是山房 夫人之日用云爲 無一非心之動 而心之體 靜而已矣 守其靜 勿馳於動 則彼外至之紛然者 猶萬形之照於明鏡 鏡何嘗疲於屢照哉 昔東方子不離金門 而時謂之大隱 盧藏用棲息終南 而世譏其捷徑 觀人者 不以迹而以心 亦久矣 吾心不靜 雖窮山鹿豕之與居 將無往而非城市也 吾心方冲漠虛曠 超然事物之外 而孰謂城市非山林哉 然則所謂以心而不以迹者非歟 孔子曰仁者樂山 是知仁者之樂山 未必入山而後樂也 長夏端居 天雨少人 慕長統之樂志 誦安仁之閒居 消搖庭院 欣然有會 遂援筆而爲之記
황산자(黃山子, 작자 자신)는 벼슬살이 하는 사람이다. 집은 소란한 저자거리에 있고 벗은 벼슬하는 관리들이다. 여럿이 어울리는데 하는 말은 모두 부귀영화와 이익에 관한 것이고, 항상 놀기만 하는데 그 지역은 저자거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여 접대하고 전송하는 힘든 일이 어떤 경우 하루해가 넘어갈 때까지 이어지는데도, 그때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로 잊어버린다. 그 사람 모이는 집을 ‘즉시산방(卽是山房)’이라 이름 붙였다.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은 모두 마음의 움직임에서 나오는 것인데, 마음의 본체는 ‘고요함[靜]’일 뿐이다. 마음의 본연 상태인 고요함을 지켜 동요하지 않으면 저 외부에서 나에게 이르는 어지러운 일들은 온갖 형체가 맑은 거울에 비추는 것과 같을 것이니, 자주 비춘다고 거울이 한 번이라도 피곤해 한 적이 있는가.
옛날에 동방자(東方子)는 궁궐의 금마문(金馬門)을 떠난 적이 없는데도 당시 사람들은 ‘큰 은자[大隱]’라 했고1), 노장용(盧藏用)은 종남산(終南山)에서 은거하고 있었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벼슬하는 빠른 길을 선택했다고 비난했다2). 이로써 미루어 보면,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는 것은 행적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마음을 기준으로 한 것이 이미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내 마음이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면 궁벽한 산골에서 사슴과 돼지와 함께 산다 하더라도 자기가 있는 장소 어느 곳이나 모두 저자거리와 같을 것이고, 내 마음이 고요히 텅 빈 상태를 유지하여 사물의 바깥에 훌쩍 뛰어넘어 있다면 저자거리에 있어도 그곳이 바로 산 속이라고 누구나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마음을 기준으로 하고 행적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는 말은 틀림없는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仁者樂山].”고 하셨는데, 이 말씀에서 어진이가 산을 좋아하는 것은 굳이 산에 들어간 뒤에야 즐거워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긴 여름날 가만히 앉아 있는데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중장통(仲長統)의 「낙지론(樂志論)」3)을 사모하고 반안인(潘安仁)의 「한거부(閑居賦)」4)를 읊조리면서 한가롭게 정원을 거닐다가, 기쁘게도 그들의 마음과 합치하는 점이 있어 붓을 들어 즉시산방에 대해 기록한다.
1) 동방자(東方子)는…‘큰 은자[大隱]’라 했고 : 동방자는 전한(前漢) 동방삭(東方朔)이고, 금마문은 문학(文學) 하는 선비들이 출사(出仕)하던 관청 이름이다. 동방삭이, “나 같은 사람은 조정에서 세상을 피하여 한가히 지내고, 옛 사람은 깊은 산중에 들어가 세상을 피했다.” 했다. <사기(史記)126 「골계열전(滑稽列傳)」>
2) 노장용(盧藏用)은…비난했다 : 노장용은 당(唐)나라 사람으로, 큰 벼슬을 하고 싶었지만 대과(大科)에 급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일부러 서울에서 가까운 종남산에 은거하여 명성을 얻으려 하였다. 역시나 임금이 ‘은거’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등용하였다. 그 후 사마승정(司馬承禎)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대궐에 왔지만, 벼슬에 뜻이 없어 다시 은둔하려고 했다. 이때 그를 전송한 사람이 노장용이었는데, 노장용이 종남산을 가리키며 “참 좋은 산” 이라 하자, 사마승정이 “내가 보기에는 관리가 되는 첩경(捷徑)일 따름” 이라 했다. <『신당서(新唐書)』114 「이소노위조화열전(李蕭盧韋趙和列傳)」 노장용 조항> 이 일로 인하여 ‘종남산에 은거하는 것이 벼슬길에 나설 수 있는 지름길[終南捷徑]’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3) 중장통(仲長統)의 「낙지론(樂志論)」 : 중장통은 후한(後漢) 말기의 명사(名士)로, 조정에서 벼슬을 주어 부를 때마다 병을 핑계대고 나아가지 않았다. 「낙지론」은 원림(園林) 속에서 유유자적하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며 사는 심경을 읊은 글이다. <『후한서(後漢書)』49 「왕충왕부중장통열전(王充王符仲長統列傳列傳)」 중장통 조항>
4) 반안인(潘安仁)의 「한거부(閑居賦)」 : 안인은 위진시대(魏晉時代) 진(晉)나라 반악(潘岳)의 자(字)이다. 그는 장안령(長安令)으로 벼슬을 옮겼다가 박사(博士)에 제수되었는데, 벼슬을 버리고 「한거부」를 지었다. 「한거부」는 예기(禮記)의 편명인 「중니한거(仲尼閑居)」의 뜻을 취한 것인데, 대체로 세상일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진서(晉書)』 「열전」25 반악 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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