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潁[穎]南相公公轍致仕序
영의정(領議政) 사영(思穎) 남공(南公)1)이 벼슬을 그만둔 것에 대해 쓰다
김유근(金逌根 1785~1840)
上之三十三年癸巳夏 大學士大丞相思潁[穎]南公 告老于朝 三請而後獲遂 盖上惜其去而憫其老 黽勉而許之 選日御法殿宣麻 又引對于便殿 勞勉備至 賜御饌 手酌黃封以飮之 殊禮也 殿上觀者 莫不動色相賀 旣退 都人士亦莫不齎咨歎息 侈其榮遇而惜其便訣也 說者謂 公大臣也 顧今國勢岌嶪 民生困瘁 此政君相宵旰靡懈之日 而公居上相之位 汲汲求去 非大臣體國之義也 噫 是言何足以知公之心也 公 大臣也 公之心以爲 今之所謂國勢岌嶪民生困瘁者 其言近之 然聖朝積德累世 垂五百年 內無强梁之患 外無兵革之憂 主勢尊而民志壹 休養生息 上下相安 可謂有磐泰之固矣 特以昇平日久 朝野恬嬉 吏玩其治 民惰其業 因循至於國受其弊 民隨以困 此宰相有司之過也 聖上一朝奮發 從欲之治 赫然可覩 岌嶪者奠安 困瘁者復蘇 承佐輔弼 不患無其人矣 臣事我聖上 三十餘年 幸免大戾 遂得全歸 所謂終始生成之澤 從古人臣事君 老而乞身者 曠世可數 今臣之退 未必不爲熙朝之美事 臣斷而行之 上亦斷而許之 恩批所謂臣主俱榮 永有辭於後世者 大哉之言 孰得以議之哉 此卽公之言而輿人之所共誦也 噫 公 大臣也 平日憂國恤民之心 不以進退間之 國家有事 其言出而尊主 其身進而庇民 將不以己退而必先於人矣 此乃古大臣進退皆憂之大節也 至若朝議之可否時事之得失 非公之所獨憂 而不足以挽公之歸也 公 今世之完人也 衣服成器 尙不可訾 況敢以小人之腹 度君子之心 而妄論其去就也哉
전하[純祖]께서 즉위하신지 33년(1833)되는 여름에 훌륭한 학자이자 위대한 정승이신 사영 남공철 공께서 연로하다는 이유로 조정에 사직을 요청하여 세 번이나 간청한 끝에 허락을 받으셨다.2) 이것은 임금께서 남공이 조정을 떠나는 것을 애석해 하시면서도 연로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어쩔 수 없이 허락하신 것이다. 좋은 날을 가려 정전(正殿)3)에 납시어 선마(宣麻)4)를 거행하시고, 또 편전(便殿)5)에서 접견하셨으니6) 위로와 면려가 모두 지극하신 것이다. 임금만이 드시는 음식을 하사하시고 손수 황봉(黃封)7)을 따라 주어 마시게 하셨으니, 특별하게 대우하신 것이다. 궁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감동어린 표정으로 공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대궐에서 물러난 뒤에는 서울의 선비들도 누구나 안타까워하면서 탄식하고, 영광된 예우를 부러워하면서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다.
논평하는 자가, “공은 대신(大臣)이다. 생각해보면 지금은 국가의 상황이 위태롭고 백성의 삶이 곤궁하니, 바로 군주와 재상이 밤낮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게으르지 말아야 하는 때이다. 그런데 공은 영의정의 지위에 있으면서 쫓기듯 급하게 조정을 떠나려고만 하니, 이것은 나라를 제 몸처럼 생각해야 하는 대신의 의리가 아니다.” 한다. 아, 이런 말을 하는 자가 어찌 공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공은 대신이시니, 공의 마음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지금 말한, 국가의 상황이 위태롭고 백성의 삶이 곤궁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조선의 훌륭한 군주들이 은덕을 쌓아 대대로 내려와 거의 오백 년이 되었다. 안으로는 내란의 근심이 없고 밖으로는 외침의 우려가 없으며, 군주의 권세가 존귀하고 백성의 의지가 통일되어 있다. 이 때문에 평화로이 살면서 번영하여 상하가 모두 편안하니, 반석(磐石)과 태산(泰山)같은 굳건함이 있다고 할 만하다. 다만 태평한 시절이 오래 지속되어 조정에서나 민간에서나 무사안일(無事安逸)한 태도로 경계심 없이 희희낙락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아전은 정치를 제멋대로 좌지우지하고 백성은 생업을 게을리 하게 되었다. 이런 태도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여 국가가 그 폐해를 입고, 따라서 백성이 곤궁해지는 상황이 되었으니, 이것은 재상과 관리들의 잘못이다. 그러나 전하께서 하루아침에 분발하셔서 당신의 의지대로 다스림을 펼쳐 뚜렷하게 그 성과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위태로웠던 정치 상황은 안정되고 곤궁했던 백성은 다시 소생했으니, 전하를 보필하는 문제로 말한다면 적임자가 없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가 우리 전하를 모신 삼십 여년의 세월 동안 다행히 큰 죄를 짓지 않아 마침내 온전한 상태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이른바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순간이나 키워 준 군주의 은택 때문이다. 옛날부터 신하가 군주를 섬기다가 늙어서 물러나고자 한 것은 손으로 꼽을 만큼 세상에 드문 일인 만큼 지금 내가 물러가는 일은 태평성대의 아름다운 일이다. 내가 과감하게 물러가려 하고 전하께서도 결단하여 허락하셨다. 은혜로운 비답(批答) 가운데 ‘신하와 군주가 둘 다 영광되니 후세에 영원히 칭찬이 있을 것’이라는 훌륭한 말씀에 그 누가 이러쿵저러쿵 따질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공의 생각이고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하는 말이다. 아, 공은 대신이시다. 평소 국가를 걱정하고 백성을 돌아보는 마음은 벼슬을 하건 하지 않건 변함이 없다. 국가에 일이 생기면 의견을 개진하여 군주를 존중하고 직접 나아가 백성을 보호하기를, 이미 은퇴했다고 가만히 있지 않고 반드시 남보다 먼저 할 것이다.
이런 태도가 바로 옛 대신의 ‘나아가거나 물러나거나 항상 걱정[進退皆憂]’8)한다는 큰 절개이다. 조정 의론의 옳고 그름과 당시 일의 잘잘못은 공 혼자만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일을 가지고 물러가는 공을 만류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공은 지금 세상에서 덕행을 완벽히 구현한 분이다. 의복과 물건에 대해서도 가타부타 헐뜯지 말라고 했거늘,9) 하물며 감히 소인의 소견머리로 군자의 마음을 헤아려 함부로 공의 거취를 따지겠는가.
1) 남공(南公) :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다. 남공철(영조36-헌종6)은 본관 의령(宜寧), 자 원평(元平), 호 사영(思穎)·금릉(金陵)이다. 아버지는 대제학 남유용(南有容), 어머니는 김석태(金錫泰)의 딸이다. 김조순(金祖淳)·심상규(沈象奎)와 함께 패관문체(稗官文體)를 일신하려는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 운동에 동참했고, 그 뒤 순정한 육경고문(六經古文)을 깊이 연구함으로써 정조 치세의 인재라는 평을 받았다. 1817년(순조17)에 우의정에 임명된 뒤 14년간이나 재상을 역임했으며, 1833년(순조3) 영의정으로 치사(致仕)해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2) 세 번이나…받으셨다 : 1833년(순조33) 4월 13일 처음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여 4월 27일 재차 상소를 올렸다. 이때에도 허락받지 못하고, 5월 16일 세 번째 상소를 올려 허락을 받았다. <『국역조선왕조실록』>
3) 정전(正殿) : 임금이 나아가 조참(朝參)을 받고, 정령(政令)을 반포하고,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궁전이다. 경복궁(景福宮)은 근정전(勤政殿), 창덕궁(昌德宮)은 인정전(仁政殿), 경희궁(慶熙宮)은 숭정전(崇政殿)이 이에 해당하는데, 여기서는 숭정전이다.
4) 선마(宣麻) : 당나라와 송나라 때에 재상이나 장수를 임명할 때 백마지(白麻纸)에 조서를 써서 조정에서 공포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후에 재상과 장수를 임명한다는 의미가 되었다. 여기서는 임금이 나이 많은 대신(大臣)에게 봉조하로 임명하며 궤장(几杖)을 하사할 때에 함께 글을 내린 것이다.
5) 편전(便殿) : 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면서 정사(政事)를 보는 궁전으로, 여기서는 경희궁의 편전인 자정전(資政殿)이다.
6) 좋은 날을…접견하셨으니 : 5월 22일 순조가 숭정전에 나아가 봉조하 남공철의 선마를 거행하고 이어서 불러 보았다. <『국역조선왕조실록』>
7) 황봉(黃封) : 관청에서 만든 술인데, 누런 종이로 입구를 막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는 임금이 하사하는 술이라는 뜻이다.
8) 나아가거나…걱정[進退皆憂] : 범중엄(范仲淹)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높은 조정에 있을 때는 백성을 걱정하고, 머나먼 강호에 있을 때는 군주를 걱정한다. 이것은 나아가도 걱정하고 물러나도 걱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때에 즐거워하겠는가. [居廟堂之高 則憂其民 處江湖之遠 則憂其君 是進亦憂 退亦憂 然則何時而樂耶]”라고 했다.
9) 의복과…했거늘 : 『예기(禮記)』 「소의(少儀)」에, “의복과 물건에 대해 헐뜯지 말고, 몸을 걸고 주장을 펴지 말라. [毋訾衣服成器 毋身質言語]”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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