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詢亭重建記
오순정(五詢亭)1)을 다시 짓는 것에 대한 기문
김유근(金逌根 1785~1840)
병신년(1836, 헌종2, 작자 52세)
경국(景國)2) 이 판서가 평안도 감사로 부임한 다음 해3)에 벗인 내게 편지를 보내와서, “감영(監營) 서쪽에 오순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지난해에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 다시 지으려고 계획하고 있으니, 자네가 나를 위해 기문을 지어주게.”라고 했다.
나는 편지를 보고 생각해보았다. 나라 안에 유명한 누각이나 정자가 나로 인하여 방치되어서는 정말 안 될 일이다. 이 정자로 보자면, 조망할 때의 좋은 경치와 잔치할 때의 아름다움으로 말하더라도 최고의 경관을 마련해 주는 연광정(練光亭)4)과 부벽루(浮碧樓)5)에는 견줄 수 없고, 다경루(多慶樓)6)와 비교해도 그 훌륭함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참으로 이러쿵저러쿵 비난하는 말이 없을 수 없다.
지금 평안도 지역은 피폐해져서 온갖 병폐가 가지각색으로 생기고 있는데, 중요하고 다급한 일을 버려두고는 천천히 해도 되는 하찮은 일을 서둘러 처리하려고 하니, 일의 중요도를 헤아려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뒤에 해야 하는지 모르는 처사라고들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잘 알고 있다. 아, 이 판서는 지금 시대의 현명한 대부이다. 처리하지 못할 일이 없는 의정부의 인재로 조정의 막중한 책임을 떠맡고 평양에 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높고 큰 대장의 깃발을 영광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고 진수성찬 차린 큰 식탁을 원하지 않을 것이며, 곱게 단장한 기생들이 줄을 잇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누각에 올라 경치를 감상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밤낮으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은 오직 어떻게 해야 평안도를 걱정하는 임금님의 걱정을 덜어줄까, 어떻게 해야 이 지역 백성들을 살려낼까, 어떻게 해야 국가를 보호하는 책임을 다할까, 어떻게 해야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원하는 방법을 하나하나 실현할까, 바로 이것이다. 노심초사하여 야윈 모습으로도 잠자는 것과 먹는 것도 잊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이 판서의 마음이다.
그러니 패강(浿江; 大同江)을 건너자마자 서울로 돌아오려는 마음이 터럭만큼도 없었다는 것은 온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일이다. 그가 견책을 받아 평양 감사의 자리에서 물러날 때7)에 평안도 백성들이 누구나 길거리에 나와 한숨짓고 탄식하면서, “우리 공께서 정말 떠나시는가. 그러면 백성들은 어떻게 삶을 살아가나.”라고 했고, 그대로 머물게 되었을 때는 또 모두 손을 이마에 얹고 칭송하면서, “우리 공께서 정말 떠나지 않으시는가.
백성들이 이제야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되었구나.”라고 했다고 하니, 이 판서가 어진 정책을 베풀어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이 깊고도 절실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 이 판서는 과연 현명한 대부이다. 그렇다면 이 오순정을 다시 지으려는 것은 조망과 잔치의 도구로 쓰기 위함이 아니고, 천천히 해도 되는 하찮은 일이라도 예전부터 있던 것이 나에게 이르러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도 예전부터 있던 것을 내가 없앨 수 없으니, 이보다 더 중요하고 다급한 행정의 시행이라면 옆 사람의 권면을 기다린 뒤에 처리하겠는가. 옛날 설계 그대로 새로 짓되 칸수를 조금 줄인 것은 아마도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고 백성의 노동을 덜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1) 오순정(五詢亭) : 평양시 중구역(中區域) 만수동(萬壽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1707년(숙종33)에 평양 감영의 정원에 있는 망월지(望月池)에 건립하였다.
2) 경국(景國) : 이지연(李止淵)의 아우 이기연(李紀淵, 1783-?)의 자(字)이다. 1835년(헌종1)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3) 이기연이 평안도 관찰사가 된 것이 1835년(헌종1)이니, 김유근에게 오순정의 기문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낸 것은 1836년이다.
4) 연광정(練光亭) : 평양시 중구역(中區域) 대동문동(大同門洞) 덕암(德巖)에 있는 정자이다. 제일루대(第一樓臺)라고도 한다. 현존하는 누정은 1670년(현종11)에 다시 지은 것이다.
5) 부벽루(浮碧樓) : 평양시 중구역 모란봉 청류벽에 있는 누각이다. 원래 이름은 영명루(永明樓)로 393년(광개토대왕3)에 세운 영명사(永明寺)의 부속 건물로 지은 누정이었다고 하는데, 12세기 초에 중건한 뒤로 맑고 푸른 대동강이 감돌아 흐르는 청류벽 위에 떠있는 듯한 누정이라는 뜻에서 부벽루라고 고쳐 불렀다. 현재의 건물은 1614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6) 다경루(多慶樓) : 평양 감영 서쪽 양명포(揚命浦) 위에 있다. 대안(對岸)에 돌을 쌓고 그 위에 다락을 걸쳐 아래로 배가 통할 수 있다.
7) 견책을…물러날 때 : 1836년(헌종2) 평안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공무를 폐기한 죄로 삭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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