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친환경농업박물관<역사관> 소장 도록 p117
3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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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김성균(金性均)이 김병주(金炳㴤)에게 보낸 편지 7
數朔阻褫 慕菀政切 月初伏承五月出下書 伏審伊者調中氣體候添損 伏念不任 間又日富 快有勝度 而伯道果卽來謁 昕夕審診 連進何劑否 從子親節長時欠和 情私焦迫 身恙自從暑令 多般乖症惡祟 比前頓㞃方一倍罔措 其狀槪及干承旨耳 趙室信息之連穩 吳室之來湯 竊想慰滿幷摯耳 多少承旨當傍稟無餘 因京隸回 略此姑不備白
丙戌六月十七日 從子 性圭 上書
몇 달 동안 소식이 막혀 그리움과 울적함이 정말로 간절하던 차에 5월에 보내신 편지를 월초(月初)에 받고 최근에 병환 중에 건강을 더 해치셨다는 것을 아니, 걱정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간 다시 여러 날이 지났는데 병은 나으셨는지요? 백도(伯道)는 즉시 가서 아침저녁으로 진찰하며 어떤 약을 올리고 있습니까? 제 아버지(어머니입니다. - 옮긴이 주)는 늘 좋지 않으셔서 매우 걱정입니다.
제 병은 더워진 뒤로 여러 가지 나쁜 증상들이 나타나 이전보다 더 기력이 소모되어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그 상황에 대해서는 승지(承旨)에게 대략 말했습니다. 조실(趙室)1)의 소식은 계속 괜찮으며 오실(吳室)이 와서 탕약을 끓이니, 위로와 만족이 도타우시리라 생각합니다. 다른 이야기들은 승지(承旨)가 곁에서 남김없이 말씀드릴 것입니다. 서울 하인이 돌아간다고 하기에 대략 쓰고 이만 줄입니다.
1886년 6월 17일 종자(從子) 성규(性圭)2) 올림
1) 조실(趙室): 조(趙) 씨 집으로 시집간 딸네.
2) 1884년 10월에 발생했던 김옥균(金玉均)의 역모사건, 즉 갑신정변으로 1884년 12월에 이름을 ‘성균(性均)’에서 ‘성규(性圭)’로 바꾸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다음 기사를 참조할 것.
고종 21년 갑신(1884, 광서 10) 12월 15일의 기사
<이름을 고치기 위해 고장을 올린 행 부호군 김성균 등에게 체지를 발급할 것을 청하는 이조의 계목>
“이조 계목에, ‘행 부호군 김성균(金性均)은 이름을 성규(性圭)로 바꾸고, 행 부호군 김정균(金定均)은 이름을 정규(定圭)로 바꾸고, 전 학관(學官) 김제균(金悌均)은 이름을 인규(寅圭)로 바꾸고, 전 별제(別提) 서광익(徐光翼)은 이름을 병익(丙翼)으로 바꾸고, 검서관 김능균(金能均)은 이름을 면규(冕圭)로 바꾸고, 전 부사 이희정(李熙正)은 이름을 희중(熙重)으로 바꾸고, 공사관(公事官) 이현구(李鉉九)는 이름을 현국(鉉國)으로 바꾸고, 부사과 김성균(金星均)은 이름을 성규(星圭)로 바꾸고, 전 영(令) 김영균(金泳均)은 이름을 영규(泳圭)로 바꾸고, 출신 오영진(吳泳鎭)은 이름을 태영(台泳)으로 바꾸고, 부사맹 김재필(金在弼)은 이름을 재원(在䛃)으로 바꾸고, 현륭원 참봉 김지균(金志均)은 이름을 경규(敬圭)로 바꾸고, 선전관 김창모(金昌模)는 이름을 흥모(興模)로 바꾸고, 제용감 주부 한응보(韓應輔)는 이름을 응일(應一)로 바꿀 일로 모두 고장(告狀)을 올렸습니다. 전례에 의거하여 예문관으로 하여금 체지(帖紙)를 내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그대로 윤허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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