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庶尹公의 후예

남양주 묘역을 찾아서

추읍산 2011. 4. 20. 20:36

오늘은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 조상님 묘역과 근처인 이패동 묘역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하여 찾기로 하였다. 가까운 곳임에도 실행을 못 했는데 만사 제쳐놓고 집을 나섰다. 마침 날씨가 쾌청하여 사진 찍기에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직계 조상님 묘역이 있는 곳을 아래에서부터 순서대로 쓰면 ●양평군 개군면 향리에 부모님~8대조까지 ●여주군 대신면 초현리(아래 새재)에 9대조~10대조 ●남양주시 이패동(돌누께)에 11대조 ●남양주시 와부읍 석실에 12대조~16대조 ●17대조~시조까지는 경북 안동에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김철동)의 직계 조상님과 그 형제분의 계통도를 적는다. 저는 김달행의 8대 종손입니다.

 

 

-始祖: 金宣平-----------15 世 13代祖 상헌---12代祖 광찬光燦(生父 尙寬)---|壽增, 壽興(出 伯父 光爀 后)| 11代祖 수항壽恒| 壽徵, 壽應, 壽稱, 壽能|---10代祖 창집昌集| 昌協, 昌翕, 昌業, 昌緝, 昌立|---9代祖 제겸濟謙| 好謙(出 從叔 昌肅 后)---|省行, 俊行(出 季父 好謙 后), 元行(出 從叔 崇謙 后)| 8代祖 달행達行| 坦行, 偉行|---7代祖 이기履基| 履中, 履慶|---6代祖 용순龍淳| 明淳(出 季父 履慶 后)|---5代祖 유근逌根(生父 祖淳)---高祖 병주炳㴤(生父 弘根)---曾祖 정규定圭---祖父 익진翼鎭---父親 조한朝漢---28世 철동澈東(本人)

 

아래에 이어지는 묘소의 주인공 소갯글은 「워키백과」에서  발췌하였다.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 묘역이 이정표 건너편 산자락에 둘러싸여 있다. 이곳은 16대조 서윤공 김번(庶尹公 김번(金璠) 할아버지와 그 직계 후손 묘역이 분포한 곳이다.

 

 

청음, 선원 선생 묘소 안내판

 

 

석실 마을 입구에는 안동김씨분산(安東金氏墳山) 이라는 표석이 안내판과 더불어 서윤공과 그 직계 후손 묘역이 자리한 곳임을 알리고 있다.

 

 

조상님 묘역이 자리한 곳을 원경으로 보았다.

 

 

16대조 서윤공 휘 김번 묘역으로 조선 8대 명당으로 꼽히며 풍수지리를 통해 역사를 탐구하는 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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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번(金璠, 1479년 ~ 1544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字)는 문서(文瑞)이며 본관은 (신)안동(安東)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장령 김영수(金永銖)이며, 어머니는 강릉김씨로 현령 김박(金博)의 딸이다. 세조때 국사(國師)로 유명한 학조대사는 그의 삼촌이다.

  • 1498년 진사시에 입격하고, 1513년(중종 8)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사관(史官)을 거처 1515년 전적(典籍)이 되고, 이듬해 정언(正言)에 올랐다. 1518년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지내고, 군자감직장을 거쳐 성균관전적,예조좌랑,병조좌랑,경기도도사,사간원헌납,이조정랑,병조정랑,예조정랑,제용감첨정,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춘추관편수관,세자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성균관 전적으로 있을 때 관북지방에 재난이 발생, 가뭄과 메뚜기 피해로 기근이 들어 많은 백성들이 죽어 가는데도 삼남(三南)의 곡식을 조운할 마땅한 사람을 고르지 못할 때, 낮은 관직으로 선발되어 흉년을 구제함으로 명성과 경륜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 1523년 평양부서윤으로 나갔을 때 관서지방에 전염병이 만연하자, 둔전책(屯田策)을 건의하고 민식(民食)과 창름(倉廩)을 넉넉히 하며 군졸의 잡다한 세를 없애주어 백성의 주거를 편안하게 하였다. 뒤에 대간으로부터 요승(妖僧) 학조(學祖)의 조카라 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신임이 두터워 화를 면하였다. 재물에 대한 탐욕이 지나쳐서 당시 사람들로부터 많은 기롱(譏弄)을 받았다. 관직은 통훈대부 평양부서윤 겸 춘추관편수관에 이르렀으며, 사후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성균관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에 증직 추서되었다.
  • 配位(배위)는 贈貞夫人(증정부인) 南陽洪氏(남양홍씨)로 生年(생년)은 未詳(미상)이고, 서기 1550년 庚戌(경술) 明宗(명종) 5년에 卒(졸)하였다. 친정아버지는 判官(판관) 傑(걸)이고, 祖(조)는 政丞(정승) 禮矜(예긍)이며, 曾祖(증조)는 原從功臣(원종공신) 江原觀察使(강원관찰사) 漢城府尹(한성부윤) 深(심:1398-1456년)이니, 外祖(외조)는 別坐(별좌) 趙克誠(조극성)으로 本(본)은 平壤(평양)이다. 膝下(슬하)에 1男(남) 2女(녀)를 두니, 1男(남)은 信川郡守(신천군수) 生海(생해)이고, 1女(녀)는 修撰(수찬) 贈直提學(증직제학) 金義貞(김의정)으로 豊山人(풍산인)이며, 2女(녀)는 子鳳(자봉) 李千福(이천복)이다. 墓所(묘소)는 京畿道(경기도) 南楊州市(남양주시) 瓦阜邑(와부읍) 石室(석실) 安東金氏墳山(안동김씨분산)에 子坐(자좌) 合窆(합폄)이다. 墓碣銘(묘갈명)은 大司成(대사성) 李希輔(이희보)가 撰(찬)하고, 金魯(김노)가 썼으며, 그후 磨耗(마모)되어 後孫(후손) 參判(참판) 壽增(수증)이 바꾸어 세우니, 尤庵(우암) 宋時烈(송시열)이 追識(추식)하고, 6代孫(대손) 府使(부사) 昌國(창국)이 篆(전)하고, 墓表(묘표)는 壽增(수증)이 撰(찬)하고 썼다. 다시 세월이 흘러 17代孫(대손) 彰縣(창현)이 飜譯(번역)하고 忠顯(충현)이 다시 섰다.
  • 김번의 묘(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 안동김씨분산)는 부인인 남양홍씨(한성부윤 홍심(洪深)의 증손녀이며 판관 홍걸(洪傑)의 딸-이들 남양홍씨 산소가 와부읍 덕소리에 있음)의 친정 땅으로 방앗간을 하고 있던 자리였다고 한다. 남양홍씨 부인의 친정에서 방앗간을 하고 있던 곳을 그의 조부 김계권의 아들인 학조대사(學祖大師)가 우연히 이곳을 들렀다가 이곳이 천하명당임을 알아차리고 홍씨부인에게 이곳에 남편의 사후에 묘를 쓰도록 권고받았다. 그뒤 친정집을 설득하여 부군인 김번이 죽자 이곳에 안장하게 하였다. 나중에 홍씨부인의 친정에서 이곳이 천하명당임을 알아차리고 급기야 야간에 광중에 물을 퍼부어 물이 나니 묘를 쓰면 안된다고 했지만 홍씨부인은 이를 눈치채고 상관없으니 그냥 쓰겠다고 하여 결국 김번을 여기에 안장하였다 한다.

 

이해하기 쉽게 근래에 세운 서윤공 비석 앞면

 

 

서윤공의 새 비석으로 후면이다.

 

 

서윤공 묘역 아래에서 바라본 조상님 묘역이다. 오른쪽 아래 12대조 휘 광찬, 그 위 오른쪽 안내판 있는 곳이 13대조 휘 상헌, 그 위가 15대조 휘 생해, 왼쪽 중간 휘 극효 그리고 그 위는 할머님들의 묘소가 있다. 

 

 

달리 본 묘역, 우측이 13대조 휘 尙憲, 전면, 좌는 휘 克孝이시고 옆 비석만 보이는 곳이 15대조 휘 生海이시다.

 

 

묘역 전체가 나온 사진이 등록이 안된다. 휘 生海는 저의 15대조 할아버지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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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해(金生海, 1512년~1558년 )는 조선중기 문신으로 자는 지혼(之渾), 본관은 (신)안동이다. 선친은 평양서윤(平壤庶尹)을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제학(大提學)에 추증(追贈)된 휘 번(璠) 선조와 증정부인(贈貞夫人) 남양홍씨의 외아들로 중종 7년(1512) 임신년에 출생 하였다.

 

음직으로 경기전 참봉(慶基殿 參奉)에 보직되었다가 희릉참봉(禧陵參奉)으로 옮기고 관례에 따라 선공감 봉사(繕工監 奉事)에 승진되었다. 중종 32년(1537) 丁酉 26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상서원 직장(尙瑞院 直長)에 제수되었고 그 후 사섬시(司贍寺) 내자시(內資寺) 전생서(典牲署)의 주부(主簿),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통예원인의 겸 한성부참군(通禮院引儀 兼 漢城府參軍)을 지낸 뒤 중종 36년(1541) 辛丑 5월 호조좌랑(戶曹佐郞)이 되었다. 같은해 7월 29일에는 정랑(正郞) 권겸이 좌석상에서 "김생해는 분수에 넘치는 사치스런 옷을 입고 스스로 호걸인 체한다"고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 그 후 판관(判官)을 거쳐 장례원 사의(掌隷院 司議), 형조정랑(刑曺正郞) 그리고 금산군수(錦山郡守), 신천군수(信川郡守)를 지냈다. 명종 13년(1558) 戊午 4월29일 향년 47세로 타계 한 뒤 아들과 손자들의 현달(顯達)로 증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증정경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완산이씨)로 정덕(正德) 경오년1510년 10월 21일에 태어나 만력(萬曆) 신묘년1591년 9월 6일 향년82세로 졸하였다. 친정아버지는 경명군(景明君) 이침(李忱=成宗大王의 제9男)이고, 처조부(妻祖父)는 성종(成宗)이며, 처조모(妻祖母)는 숙의(淑儀)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외조는 첨정 증찬성(僉正 贈贊成) 윤첩(尹堞)으로 본은 파평(坡平)이다.

 

묘는 남양주 와부읍 덕소리 석실 서윤부군(庶尹府君:아버지 김번)의 묘소 동쪽 축좌에 합장하였다. 갈(碣)은 좌의정 임당 정유길(鄭惟吉)이 찬하고 좌찬성 퇴계 이황(李滉)이 썼다. 표(表)는 현손 공조참판 김수증(金壽增)이 찬하고 음기(陰記)를 아울러 썼다.

 

김생해는 일찍이 중종(中宗)의 부마(왕의 사위) 물망에까지 올랐다. 물론 초간에 그쳐 부마가 되지는 못했지만 마침내 성종의 아들 景明君 李忱(경명군 이침)의 사위가 됨으로써 왕실의 일원으로 편입되기에 이른다. 문벌가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國婚이나 王室과의 통혼이 있어야 하는 당시의 관행을 생각한다면 김생해의 혼인은 장동김씨(신안동김씨)의 성장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4대조 휘 대효 묘소

 

청음 휘 상헌의 부친으로 15대조 휘 생해 묘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휘 대효는 휘 생해의 장자이다. 묘비인데 사진 목록에서 묘역이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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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효(金大孝, 1531년~1572년5월 20일)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字)는 희순(羲舜)이며 본관은 (신)안동이다. 벼슬은 삼가현감에 이르렀고 사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병자호란때 척화신 좌의정 처음 김상헌의 백부이자 양아버지이다. 군기시정을 지낸 김원효와 돈녕부도정을 지낸 김극효의 형님이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고, 음직으로 관직에 올랐다. 그뒤 빙고제조(氷庫提調)를 거쳐 상의원(尙衣院) 직장(直長), 사축서사축(司畜) 등을 지내고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올랐으며, 외직인 삼가현감(三嘉縣監)으로 나갔다. 1572년 융경 임신년 삼가현(경남 합천 삼가면일대) 관아에서 사망하였다. 세 번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어 동생 김극효(金克孝)의 아들 김상헌(金尙憲)을 양자로 입양하였다. 사후 양자 김상헌의 출세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춘추관성균관관상감사가 추증되었다. 행서와 초서에 능했다.

 

 

휘 극효는 필자의 13대조 휘 상헌의 生父로 휘 生海의 셋째 아들이다.

 

김극효(金克孝, 1542년9월16일~1618년2월3일)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희민(希閔)이며 號는 사미옹(四味翁), 본관은 (신)안동이다. 아버지는 신천군수(信川郡守)를 지낸 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된 생해(生海)선조와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의 네아들중 세째아들로 중종 37년(1542)임인 9월16일 출생하였다.

 

명종(明宗) 19년(1564) 23살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선조 37년 갑진(1604) 4월 22일 제용감정(濟用監正)이 되었고 돈녕부 도정(都正),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使)를 지냈다. 광해군 10년(1618) 무오 2월 3일 77세로 세상을 떠난 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고 (신)안동김씨 서윤공파(安東金氏 庶尹公派)의 중시조(中始祖)로 일컬으며 직계후손(直系後孫)으로 문과급제자(文科及第者)가 120여명에 이르고 대제학(大提學)이 6명 왕비(王妃)를 세분 배출 하였으니 신안동김씨(新安東金氏=장동김씨)의 대표적인 선조로 손꼽힌다.

 

배위는 임당 정유길(鄭惟吉)의 딸인 정경부인 동래정씨로 1542년(임인년) 11월 24일 태어나 1621년(신유년) 11월8일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후손으로는 우의정 김상용, 장단부사 김상관, 진사 광릉참봉 김상건, 좌의정 김상헌, 경주부윤 김상복 5형제가 있다.

  • (신)안동김씨가 권력의 기반을 잡은 것은 광해조 때 도정을 지낸 김극효(金克孝)가 좌의정과 대제학을 지낸 임당 정유길(鄭惟吉)의 사위가 되면서였다. 광해군의 장인(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인 유자신(柳自新)또한 정유길의 사위이므로 유자신 김극효은 동서간이 되며, 정유길은 광해군의 처외조부이고 김극효는 광해군의 처이모부가 된다. 또한 광해군의 처남이기도 한 유자신의 아들 희분 희발형제와 김극효의 아들 상용 상헌형제는 이종사촌간이 되므로 이로써 서서히 권력의 터를 다지게 되었다.

 

13대조 청음 할아버지 묘소로 휘 극효의 아들이나 백부 휘 대효 앞으로 입후하였다.

 

 

 

 

김상헌(金尙憲, 1570년~1652년)은 조선 중·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병자, 정묘호란시 척화대신으로 이름이 높았다.[1] 본관은 (신)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서간노인(西磵老人)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1] 윤근수(尹根壽)의 문인. 조선후기 세도가의 직계선조로 그의 후손에서 13명의 재상과 수십 명의 판서, 참판이 배출되었고, 순조비, 헌종비, 철종비 등 왕비 3명과,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가 모두 그의 후손이었다.

 

3세 때 큰아버지인 김대효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소학(小學)》 공부에 힘썼으며 성혼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다.[1]

1590년에 진사가 되고, 1596년(선조 2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통례원 인의(引儀)가 되었다. 이후 부수찬·예조좌랑·부교리를 역임했고, 예조좌랑·시강원사서·이조좌랑·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596년 제주도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진상 조사와 수령들의 근무상황을 점검하라는 임무를 띠고 어사로 파견되었다.

이후 정인홍(鄭仁弘) 등이 성혼(成渾) 등을 비판할때 연루되어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고산찰방(高山察訪)·경성판관(鏡城判官) 등을 지내고 1608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사가독서한 후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배척하려던 정인홍을 탄핵하였다가 광주부사(廣州府使)로 좌천되었다. 이후 이황·이언적 등을 문묘에 종사하는 일을 놓고 1611년 정인홍 등이 상소를 올려 이황이언적을 격렬히 비난하자, 승지로 있으면서 정인홍을 규탄하였다.

인목대비 폐모론(廢母論)이 나오자, 그는 폐모론에 반대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었고,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24년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 등이 거병하여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인조에게 누차 상소를 올려, 붕당·파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하며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정 이후에도 강직한 성격으로 누차 시사를 비판하다가, 반정 주체들의 뜻에 거슬려 향리로 귀향하였다. 이후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부제학을 거쳐,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하였고, 돌아와서는 후금(後金)과의 화의를 끊을 것과 강홍립(姜弘立)의 관작을 복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인조가 자신의 부친 정원대원군을 대원군에서 다시 왕으로 추존하려 하여, 이른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예법에 어긋남을 들어 그에 강력히 반대하였고, 찬성한 반정공신 이귀(李貴) 등과 갈등을 빚어 다시 낙향하였다. 그뒤 다시 육조판서예문관·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냈다.

1633년 사헌부대사헌에 기용되었는데, 이후 2년간 5차례나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강직한 언론활동을 벌이다가 여러 고관들과 충돌, 출사와 사퇴를 여러번 반복하였다.

1636년 예조판서로 재임할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였으며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대세가 기울어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지고 인조가 항복하자 최명길(崔鳴吉)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 항복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뒤 안동의 학가산(鶴駕山)에 들어가, 와신상담해서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 안동 소산으로 은퇴하였다.

예조판서로 있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38년 사헌부 장령 유석(柳碩) 등으로부터 "김상헌이 혼자만 깨끗한 척하며 임금을 팔아 명예를 구한다"라는 내용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고 곧 조정에 다시 들어오라는 명을 내렸으나,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 청이 명을 치는 것을 돕는다는 말을 듣고 의연히 반대하였다. 1639년 청나라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의 요구로 압송되어[2] 4년 뒤에야 풀려났다.[3] 선양(瀋陽)에 잡혀 있을 때, 여진족은 수시로 회유하였으나, 그는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청인들의 타협 요구를 거절하고 끝내 조금도 굽히지 않아, 청나라 사람이 의롭게 여기고 칭찬해 말하기를 “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라고 했다.[1]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하였지만,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석실(石室)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으며, 1649년 대학자로 존경을 받는 가운데 의정부좌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수차례 거절하며 은퇴의 뜻을 밝히고 효종에게 인재를 기르고 대업을 완수할 것을 강조하였다. 김육이 추진하던 대동법의 시행을 김집 등과 함께 강력 반대하기도 하였다.

이후 영돈령부사로 있다가 1650년 5월 28일 녹봉을 수령하지 않았다 하여 효종이 녹봉을 내려 승지가 달구지에 싣고 갔으나 업무를 보지 않았으니 받지 못한다며 도로 실어가게 하였다. 그해 8월 다시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효종은 불허하였다. 1651년 5월 28일 영돈녕부사직 등 모든 직함을 사직하였으나 불허하였고, 11월 13일 병이 나자 어의(御醫)를 보내어 진찰하고 약물을 하사하였다. 1652년 4월 다시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거부되었고, 영돈령부사로 재직 중 사망하였다. 1653년 특명으로 의정부영의정이 증직되었다.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문집으로 《청음전집》 40권이 있다.

그의 후손에서 13명의 재상과 수십 명의 판서, 참판이 배출되었고, 순조비, 헌종비, 철종비 등 왕비 3명과,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가 모두 그의 후손이었다. 죽은 뒤 대표적인 척화신으로서 추앙받았고, 1661년(현종 2)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는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 안동김씨분산에 있다

       저서

  • 《야인담록(野人談錄)》
  • 《독례수초(讀禮隨)》
  • 《남사록(南錄)》
  • 《청음전집》 40권

청나라에 압송되어 가면서 조국의 산천을 돌아보며 남긴 시조가 널리 회자되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쟈 한강수야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큰길에서 석실마을로 들어서면 바로 선원 종가댁이 좌측에 있고 그 뒷동산에 있는 휘 상용의 묘역을 원경으로 보았다.

 

선원 휘 상용 묘역으로 석실마을 입구 왼쪽 산에 있는데 13대조 청음 휘 상헌의 생가 큰형님이시다.

 

 

선원 휘 상용 신도비

 

 

 

병자호란 때 강화도 남문루에서 손자 김수전과 함께 순절하심을 기리는 충효각

 

김상용(金尙容, 1561년 ~ 1637년)은 조선 중·후기의 문인, 시인, 정치가, 서예가로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작은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에 이르렀고, 병자호란시 강화도에서 순절하였다.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계옹(溪翁),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신)안동이다.[1] 좌의정 청음 김상헌, 장단부사 김상관, 경주부윤 청백리 김상복(金尙宓)의 형이며, 효종비 인선왕후의 외조부이다.

 

외할아버지 좌의정 임당 정유길이 살고 있던 서울의 수진방(현 수송동·청진동)에서 태어났다. 김상용은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였으며, 행동이 단정하고 법도에 맞아 주위에서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칭찬하였다고 한다. 16세 때 영의정 권철(도원수 권율의 아버지)의 손녀와 혼인해 3남3녀를 두었고, 권씨 사후 사계 김장생의 누이를 얻어 1남4녀를 두었다.[1]

 

1582년(선조 15) 진사(進士)가 되고,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등용되었다. 그뒤 좌의정 정철(鄭徹), 판서 김찬(金瓚)의 종사관으로 있었다. 병조좌랑, 응교 등을 역임하고, 1592년 임진왜란때에는 처삼촌 도원수 권율을 따라 호남·영남 지방을 왕래했으며, 정유재란이 종결되면서 1598년 승지로 등용되고, 그해 겨울 명나라에 사신이 파견되자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외보로 정주목사, 상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때 한성부판윤·호조참판·승정원도승지·지의금부사·사헌부대사헌·지의금부사·형조판서·지중추부사 등을 지냈으나 '폐모론'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도총관과 지중추부사를 지내는 동안 인목대비가 폐비되자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원주(原州)로 낙향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한 사람으로 판돈령부사를 거쳐 인조 즉위후 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626년 3월 좌참찬에 제수되고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임명되었다. 그뒤 1628년 판의금부사, 이조판서, 1629년 예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1630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노령으로 치사(致仕)하고 관직을 사퇴하려고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631년 다시 치사를 청하였으나 불허되었고,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냈다. 32년 우의정에 임명되자 거듭 사퇴하여 허락받았다. 1635년 우의정을 사퇴하고 영돈령부사로 전임되었다.

 

병자호란 때 세자빈과 원손 등 왕족을 모시고 강화도에 건너갔으나 적병이 강화성으로 쳐들어와 함락당하게 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살하였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명신으로 알려져 있다. 저서에 《선원유고》 등이 있다.

그의 묘 옆에는 손자 김수전(金壽全)의 묘가 있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순절하는 할아버지를 따라 죽겠다고 간청해 불에 뛰어들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갸륵한 효심을 기려 사후에도 할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도록 할아버지 김상용의 묘 옆에 그의 묘를 안장한 것이다. 한편 묘역 입구의 충효각에는 김상용의 충신정려와, 김수전의 효자정려가 모셔져 있다.[2][1]

 

글씨에 뛰어났는데, 그 서체는 이왕체(二王體:왕희지와 왕헌지의 글씨체)를 본뜨고 전(篆)은 중체(衆體)를 겸하였으며, 시조로 유고(遺稿)에 《오륜가(五倫歌)》(5편)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9편) 등이 있고, 그 밖

에도 《가곡원류(歌曲源流)》 등에 여러 편의 시조가 실려 있다.

 

인천의 충렬사(忠烈祠), 양주(楊州)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상주(尙州)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안변(安邊)의 옥동서원(玉洞書院), 정주(定州)의 봉명서원(鳳鳴書院), 정평(定平)의 모현사(慕賢祠) 등에 배향되었다. 1758년 영조의 특별명령으로 의정부영의정이 증직 추서되었다.

저서

  • 《선원유고(仙源遺稿)》
  • 《독례수초(讀禮隨抄)》

 

작품:

  • 《숭인전비(崇仁殿碑)의 전액(篆額)》
  • 《군수 장인정비(郡守張麟禎碑)의 전액(篆額)》

 

 

상관 할아버지께서 잠들어 계신 곳이다(전체가 나온 사진은 등록이 안 된다.). 12대조 휘 광찬의 生父이시니 필자에게는 혈통상 13대조이시다. 

 

[석실을 나와 이웃 이패동 돌누께 마을 접어들었는데 11대조 휘 수항의 묘역이 자리한 곳이다. 그 부근에는 휘 상관, 휘 수흥의 묘역이 있다는 말만 듣고 산속으로 접어들었는데 수목이 우거져 헤쳐나가기가 어려웠다. 얼마를 가니 부사공인 할아버지 묘소가 보여 반가웠다. 그러나 휘 수흥 선조님 묘역은 찾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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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관(金尙寬, 1566년1621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중율(仲栗), 호는 금시재(今是齋). 본관은 (신)안동(安東)이다. 우의정 선원 김상용의 동생이며 병자호란때 척화대신 좌의정 청음 김상헌의 형이다. 증조부는 평양서윤(平壤庶尹)을 지낸 김번(金璠)이고, 조부는 신천군수(信川郡守)를 지낸 김생해(金生海)이며, 부친은 돈녕부 도정(都正)을 지낸 김극효(金克孝)이다. 어머니는 좌의정(左議政) 임당(林塘)정유길(鄭惟吉)의 딸이다. 5남 중 둘째로 형은 우의정(右議政) 선원 김상용(金尙容)이고, 아우로 진사 김상건(金尙謇), 좌의정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경주부윤(慶州府尹) 김상복(金尙宓), 종형으로 형조참판(刑曹參判)휴암 김상준(金尙寯)이 있다.

 

음보(蔭譜)로 관직에 오른 뒤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았다. 그뒤 1599년에 호조정랑으로 조선을 구원하러 온 명나라 파견군대에 군량을 조달·지원하였다. 그뒤 1604년 다시 호조정랑으로 임용되었다. 1607년 진산군수(珍山郡守)로 부임하였고, 회양부사(淮陽府事), 판관(判官)을 거쳐 한달 내에 한번에 3품으로 승진했다가 사헌부(司憲府)에서 탄핵을 받은 적도 있었으나, 1609년(광해군 1)에 장단부사(長湍府使)로 부임했다. 아들 김광혁(金光爀)은 1612년(광해군 4) 임자식년사마시(壬子式年司馬試)에 진사 1등으로 합격하고, 1624년(인조 2) 갑자알성문과(甲子謁聖文科)에 을과 1등으로 급제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다. 사후 후손들이 현달(顯達)하여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종일품 증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남양주(南楊州) 와부읍(瓦阜邑) 율석리에 있다.



12대조 휘 광찬 묘소로 앞에서 보아 13대조 휘 상헌 묘소 좌하이다.

 

김광찬(金光燦, 1597~1668)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사회(思晦). 호는 운수거사(雲水居士). 본관은 (신)안동이다. 서예가로 청풍군수, 공조참의, 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아버지는 좌의정 김상헌, 생부는 장단부사 김상관이다. 세도가의 직계조상으로, 영의정을 지낸 형제 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의 아버지이며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의 6대조이다.

 

장단부사 증좌찬성 김상관의 아들이었으나 삼촌인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있다가 인조5년(1627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그뒤 음보로 관직에 진출하여 세마(洗馬)가 되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아버지 김상헌을 따라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1637년 아버지 김상헌이 척화(斥和)를 주장하며 자결을 기도하였을 때, 만류하지 않아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1637년병자호란을 거친 뒤 강화도 통진현감(通津縣監)을 지냈고 1651년 교하현감(交河縣監)에 부임하였다. 현종 즉위후 아들 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 형제가 출세하자, 1661년 특별히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제수되었다. 뒤에 청풍군수로 부임하였고, 파주목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사후 아들 김수흥·김수항이 영의정을 지내면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부친의 영향으로 동기창체(董其昌體)에도 조예가 깊었다. 묘소는 남양주 와부읍 덕소리 석실에있다.

 

 

위 묘역 군 밑에 선 신도비인데 글자가 희미하다, 청음 차 종손 명동 형님한테 들었는데 하나는 휘 극효, 또 하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확인요.

 

 

16대조 서윤공 묘역 쪽을 답사하고 내려오다 명동 형님 집 옆에 늘어선 비각 모습이다. 좌로부터 석실서원 묘정비, 취석, 도산석실?, 송백당 유허비이다.

 

 

곡운 휘 수증의 묘소이다(전체가 나온 사진은 등록이 안 된다.). 서윤공의 5대 종손이며 필자의 11대조 휘 수항의 큰 형님이시다. 강원도 화천군에서는 할아버지께서 만년을 보내신 곡운구곡을 복원 중이고 흔적을 기리고 있는데 문화를 사랑하신 할아버지가 자랑스럽다. 워키 백과에서 김수증을 다시 보완 작성 중이므로 아랫글은 「한국역대인물 종합 정보시스템」의 글에서 옮겨왔다.

 

김수증(金壽增)에 대하여
1624년(인조 2)∼1701년(숙종 27).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성리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 할아버지는 상헌(尙憲)이다.
1650년(효종 1)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2년에는 세마(洗馬)가 되었다.
그뒤 형조정랑·공조정랑을 거쳐 각사(各司)의 정(正)을 두루 역임하였다. 젊어서부터 산수를 좋아하여 금강산 등 여러 곳을 유람한 뒤 기행문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1670년(현종 11)에는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동에 복거(卜居)할 땅을 마련하고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었다.
그뒤 1675년(숙종 1)에 성천부사로 있던 중, 동생 수항(壽恒)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농수정사로 돌아갔다.
이때 주자(朱子)의 행적을 모방하여 그곳을 곡운(谷雲)이라 하고, 곡운구곡(谷雲九曲)을 경영하면서 화가인 조세걸(曺世傑)을 시켜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하는 등 글씨와 그림에 관심을 기울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과 동생 수항 등이 죽자, 벼슬을 그만두고 화음동(華蔭洞)에 들어가 정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694년 갑술옥사 후 다시 관직에 임명되어 한성부좌윤·공조참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한 뒤 세상을 피해 화악산(華嶽山) 골짜기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이때 그는 성리학에 심취하여 북송(北宋)의 성리학자들과 주자의 성리서를 탐독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소강절(邵康節)의 음양소식관(陰陽消息觀)을 정사의 조경(造景)에 응용하였다.
이와같은 사상을 도상화(圖象化)하는 데 힘을 기울여, 주돈이(周敦頤)주자의 행적에 나타나는 〈태극도〉·〈하도낙서 河圖洛書〉·〈선후천팔괘도 先後天八卦圖〉 등을 정사의 경내에 있는 바위에 새겨 ‘인문석(人文石)’이라 하였다.
또한, 계곡에 있는 바위들에 천근석(天根石)·월굴암(月窟巖) 등 소강절의 사상시(思想詩)에 나오는 음양소식관을 담은 이름도 붙여 조경을 하였다. 이들의 유적은 지금도 남아 있어 성리사상이 건축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춘천의 춘수영당(春睡影堂)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곡운집》이 있다.

 

 

휘 수흥은 11대조 휘 수항의 둘째 형님으로 백부 김광혁(金光爀) 앞으로 입후하였다. 돌누께 마을에서 묘역을 찾지 못했으므로 휴암공파 홈페이지에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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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흥(金壽興, 1626-1690)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의정부우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자(字)는 기지(起之), 호는 퇴우당(退憂堂)·동곽산인(東郭散人), 시호 문익(文翼)이며 본관은 (신)안동이다. 우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이고, 동지중추부사 영의정 김광찬의 아들이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형으로 좌승지(左承旨)를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신 백부(伯父) 김광혁(金光爀)의 계자(系子)로 들어갔다.

 

仁祖(인조) 26년(1648) 戊子(무자) 23살에 式年(식년) 사마시(司馬試)에 1等(등) 5位(위)로 급게한 후, 효종 6년(1655) 을미 춘당대(春塘臺)에서 치른 문과(文科)에 丙科(병과) 2位(위)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1656년 문과 중시(文科重試)에도 병과(丙科) 3位(위)로 급제(及第)하여 세 번에 걸친 과거시험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孝宗(효종) 7년(1656) 丙申(병신) 5월 28 겸설서(兼說書), 같은 해 10월 6일 설서(說書), 孝宗(효종) 8년(1657)丁酉(정유) 10월 4일 부수찬(副修撰), 孝宗(효종) 9년(1658) 戊戌(무술) 1월 9일 수찬(修撰), 같은 해 4월 11일 헌납(獻納)으로 충청도 어사(御使)로, 같은 해 5월 5월13일 어사 책무를 마치고 귀임하였다

같은 해 6월 5일 교리(校理), 같은 해 12월 21일 이조좌랑(吏曹左郞), 顯宗(현종) 즉위년(1659) 己亥(기해) 12월 2일 이조정랑(吏曹正郞), 顯宗(현종) 1년(1660) 庚子(경자) 5월 21일 겸문추(兼春秋)로, 顯宗(현종) 2년(1661) 辛丑(신축) 5월 6일 응교(應敎), 같은해 6월 9일 광주 부윤(廣州府尹), 顯宗(현종) 4년(1663) 癸卯(계묘) 4월18일 대사간(大司諫), 같은 해 9월 18일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였다.

顯宗(현종) 5년(1664) 甲辰(갑진) 2월 28일 대사간(大司諫), 같은 해 7월 8일 병조참지(兵曹參知), 같은 해 7월23일 승지(承旨), 같은 해 12월 21일 경기감찰사(京畿監察使)를 지냈다.

顯宗(현종) 7년 丙午(병오) 1월24일 도승지(都承旨), 7월 23일 대사성(大司成), 같은 해 8월11일 호조판서(戶曹判書), 顯宗(현종) 9년(1668) 戊申(무신) 2월 23일 좌참찬(左參贊), 顯宗(현종) 11년(1670) 庚戌(경술) 5월 17일 우참찬(右參贊), 같은 날 한성판윤(漢城判尹)으로 壽恒(수항)은 좌참찬(左參贊)에 각각 보임하였다.

顯宗(현종) 11년(1670) 辛亥(신해) 6월 2일총융사(摠戎使). 같은 해 8월 23일 강화유수(江華留守), 같은해 6월 13일 호조판서(戶曹判書), 같은 해 8월 17일 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를 겸직하고, 같은 해 11월 4일 총융사(摠戎使)를 역임하였다.

顯宗(현종) 13년(1672) 壬子(임자) 2월 24일 지경연(知經筵)을 겸직, 顯宗(현종) 14년(1673) 癸丑(계축) 2월 9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같은 해 4월 24일 우의정(右議政)에 제수 되었다.

顯宗(현종) 15년(1674) 甲寅(갑인) 4월26일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나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제문제(服制問題)로 남인에게 몰려 부처(付處) 될 번 하 였고, 같은 해 8월 현종(顯宗)이 승하(昇遐)하자 남인(南人)과 제2차 예송(禮訟)논쟁에 참여해『대공설(大功說)=9개월 복상(服喪)』을 주장하였다.

남인은『기년설(朞年說=1년복상(服喪)』을 주장하다가 벼슬에서 파직되어, 그해 8월 顯宗(현종)이 죽자 춘천에 유배 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 양주(楊州)로 돌아가 살다가,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西 人)이 다시 집권하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고 肅宗(숙종) 14년(1688) 戊辰(무진) 12월 7일 다시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1689년 숙종희빈 장씨(昭儀張氏)가 낳은 왕자 이균(李昀)을 처총애하여 왕세자에 책봉하려 하자 송나라 철종의 고사를 들며 반대한 송시열과 함께 왕자 균의 세자책봉은 시기상조라고 반대하였다.[1]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서인(西人)이 집권하자 다시 복권, 영중추부사를 거쳐 88년 다시 의정부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장기현에 유배, 그다음해(1690년) 유배지에서 죽었다.

김수흥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마음의 스승으로 존경하였고 그의 뜻에 잘 따랐고,『주자대전(朱子大全)』․『어류(語類)』등을 탐독하고, 역대의 왕에게 시폐소(時弊疏)를 올려 백성의 편에서 정치를 하고 정치의 혁신(革新)을 여러 번 건의하여 민생(民生)에 도움을 주어 복지향상에 힘쓰고자 하였으나 반당(反黨)의 노골적인 반대로 한번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정쟁(政爭)의 소용돌이 에서 희생 되고 말았다.

配位(배위)는 정경부인 남원윤씨로 서기 1626년 丙寅(병인) 仁祖(인조) 4년에 태어나, 서기 1706년 丙戌(병술) 肅宗(숙종) 33년 9월 6일에 卒(졸)하니 天壽(천수) 81세였다. 아버지는 목사 衡覺(형각)이고, 祖(조)는 승지 皓(호)이며, 증조는 참판 民新(민신)이니, 외조는 서윤 尹火+翕(윤흡)으로 본은 파평이다.

膝下(슬하)에1男(남) 5女(녀)를 두니, 1남은 안악군수 昌設(창설)이고, 1녀는 현감 洪澤普(홍택보)로 남양인이며, 2녀는 서윤 宋光涑(송광속)으로 여산이이니, 3녀는 逸贊善(일찬선) 李喜朝(이희조)로 연안인이요, 4녀는 병조판서 李晩成(이만성)으로 우봉인이며. 5녀는 목사 李聖佐(이성좌)로 경주인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이패동 長端公(장단공:친할아버지 장단부사 김상관) 兆左(조좌) 第三麓(제삼록) 壬坐(임좌) 合窆(합폄)이다, 묘지는 조카 사헌부집의 김창흡이 撰(찬)하고, 表石(표석) 陰記(음기)는 조카 예조판서 김창협이 撰(찬)하였으며, 海昌尉(해창위) 吳參周(오삼주)가 썼다. 저작으로 퇴우당집 5권이 전한다.

 

 

이패동 돌누께 뒷동산에 있는 11대조 휘 수항 묘역

 

 

문곡 묘비 전면

 

 

문곡 묘비 후면으로 윗 부분이다.

 

 

문곡 묘비 후면 아래 부분

 

 

문곡 묘비 측면

 

 

구비가 마모가 진행 중이므로 새 비를 묘소 좌측에 세웠다. 전면이다.

 

  

새 묘비 후면

 

 

측면

 

 

측면

 

 

11대조 문곡 묘소 위에서 아래를 보았다.

 

김수항(金壽恒, 1629(인조 7)∼1689(숙종 15))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본관은 (신)안동(安東)이다. 돈녕부 도정(敦寧府 都正)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낸 김극효(金克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左議政) 청음 김상헌(金尙憲), 친할아버지는 장단부사 김상관(金尙寬)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광찬(金光燦)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연안김씨(延安金氏)로 목사 김래의 딸이다. 처조부(妻祖父)는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다.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곡운 김수증(金壽增)이 백씨(伯氏:큰형님))이며,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퇴우당 김수흥(金壽興)은 중형(仲兄:둘째형)으로, 당대에 명문거족(名門巨族)의 가문(家門)에서 仁祖(인조) 7년(1629) 기사(己巳) 8월 1일 7형제 중 세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다섯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어려서 원주(原州)에 계신 외할머니댁에서 1년쯤 있다가 6살때 할아버지(청음 김상헌)가 계시는 안동 풍산으로 내려가 16살까지 학문을 닦고 한양(漢陽)으로 올라와 仁祖(인조) 24년(1646) 丙戌(병술) 18살 때 반시(泮試)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이어 진사시(進士試) 또한 장원(壯元)로 급제하여 進士(진사)가 된 뒤, 효종 2년(1651) 신묘 9월 18일 상(임금)이 문묘文廟)에 배알하여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이어서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여 김수항(金壽恒) 등 7인을 뽑았는데, 방방(放榜)할 때에 문과장원(文科狀元)한 사람은 23살에 김수항(金壽恒)이며 특별히 어촉(御燭)을 하사(下賜)하였다.

 

그 다음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 병조좌랑(兵曹佐郞) ․ 사서(司書) ․ 경기도사(京畿都事) ․ 지평(持平)을 거쳐 효종 4년(1653) 계사 6월 14일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지내고, 같은 해 11월 3일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같은 해 9월 17일 춘당대(春塘臺)에서 문신 정시(文臣 庭試)에 5등으로 합격하여 말을 하사(下賜) 받았고, 같은 해 9월 21일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孝宗(효종) 5년 갑오(1654) 7월 19일 이조정랑(吏曹正郞), 같은 해 10월 4일 겸 중학교수(兼中學敎授), 孝宗(효종) 6년(1655) 乙未(을미) 1월 26일 교리(校理), 같은 해 2월 13일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역임하였다.

 

8월 12일 남용익(南龍翼) ․ 이은상(李殷相) ․ 홍위(洪葳) ․ 이단상(李端相) ․ 안후열(安後說) 등과 함께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家讀書)를 하였다.

같은 해(1655년) 9월 25일 부교리(副校理), 같은 해 12월 10일 이조정랑 (吏曹正郞), 孝宗 7년(1656) 丙申 윤5월 9일 응교(應敎), 같은 해 7월 18 일 사인(舍人), 효종 8년(1657) 정유 2월26일 승지(承旨), 같은 해 5월 26일 이조참의(吏曹參議), 같은 해 10월 4일 대사간(大司諫), 같은 해 11월 6일 궁가(宮家)의 하인(下人)들 폐단(弊端)을 막아 달라는 상소, 같은 해 12 월 26일 승지(承旨)를 맡았다.

 

孝宗 9년(1658) 戊戌 6월 5일 승지(承旨), 7월 27일 부제학(副提學), 顯宗즉위년(1659) 己亥 5월 11일 찬집청 당상(撰集廳 堂上)으로 효종비(孝宗妃=인선왕후(仁宣王后)의 비에 전서(篆書)를 쓴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승차(昇差)하였다.

顯宗 1년(1660) 庚子(경자) 1월 16일 대사간(大司諫), 같은 달 28일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같은 해 3월 10일 도승지(都承旨), 같은 해 5월2일 승지(承旨)들이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뒤 비가와서 숙마(熟馬) 1필씩 하사(下賜)받았다.

같은 해 7월13일 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 같은 해 8월 23일 예조참판(禮曹參判), 같은 해 9월1일 부제학(副提學), 11월 9일 이조참판(吏曹參判), 顯宗(현종) 2년(1661) 辛丑(신축) 4월 22일 중전 책례 옥책 제술관(中殿 冊禮 玉冊 製述官)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7월 18일 겸동지경연(兼同知經筵), 같은 해 윤7월 15일 겸동지의금(兼同知義禁), 같은 해 10월 16일 동지춘추(同知春秋), 顯宗(현종) 3년(1662) 壬寅(임인) 5월 5일 도승지(都承旨), 같은 해 5월 6일 대사헌(大司憲), 같은 해 5월 25일 도승지(都承旨), 같은 해 7월 4일 이조참판(吏曹參判), 같은 해 11월 9일 청나라 사신(使臣) 원접사(遠接使)를 맡았다.

 

같은 해 12월 10일 지춘추(知春秋), 玄宗(현종) 4년(1663) 癸卯(계묘) 4월 27일 대사헌(大司憲), 같은 해 5월 25일 예조판서(禮曹判書), 같은 해 7월 5일 이조판서(吏曹判書), 같은 달 11일 대사헌(大司憲), 같은 해 11월 13일 이조판서(吏曹判書), 顯宗(현종) 5년(1664) 甲辰(갑진) 예조판서(禮曹判書), 같은 해 9월12일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顯宗(현종) 6년(1665) 乙未(을미) 1월7일 대제학(大提學), 같은 해 12월 14일 형조판서(刑曹判書), 顯宗(현종) 7년(1666) 丙午(병오) 10월 8일 대사헌(大司憲), 같은 해 12월 27일 이조판서(吏曹判書), 顯宗(현종) 9년(1668) 戊申(무신) 1월 10일 대사헌(大司憲), 같은 달1월 22일 예조판서(禮曹判書), 현종 11년(1670) 경술 3월 18일 지경연(知經筵)을 제수하였다.

 

같은 해 5월 17일 우참찬(右參贊), 같은 해 6월 9일 예조판서(禮曹判書), 顯宗(현종) 12년(1671) 辛亥(신해) 1월 25일 대제학(大提學), 같은 해 3월 22일 판의금(判義禁), 顯宗(현종) 13년(1672) 壬子(임자) 5월 16일 44세에 우의정(右議政)에 제수 되었다.

 

같은 해 6월 3일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하고, 같은 해 11월 30일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나 이때에 서인의 송시열(宋時烈) 등이 미움을 사서 물러남을 보고, 남인(南人)의 재상(宰相) 허적(許績)을 탄핵한 대간(臺諫)을 힘써 변호하다가 도리어 임금의 미움을 사서 顯宗(현종) 14 년(1673) 癸丑(계축) 9월 18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체직(遞直)되었다.

 

바로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顯宗(현종) 15년(1674) 甲寅(갑인) 3월 5일 북경에서 돌아 온 뒤, 같은 해 7월 26일 좌의정(左議政)에 승차하였다.

肅宗(숙종) 즉위년(1674) 甲寅(갑인) 8월 18 현종대왕(顯宗大王)이 승하(昇遐) 한 뒤 체직(替直) 상소를 여러번 올리고 교외로 나아가 등청하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2일 우의정(右議政)에 좌천, 肅宗(숙종) 1년(1675) 2월 18일 다시 좌의정(左議政), 같은 해 7월 17일 원지유배령(遠地流配令)이 있었는데 이때에 죄목은 윤휴(尹鑴)를 배척하고 종실(宗室) 복창군(福昌君) 정(楨)과 복선군(福善君) 남(柟) 형제의 추문[(醜聞):궁중여인(宮中女人)을 능욕하고 사생활이 난잡하여 세간에 원성이 많았던일]을 들어 그 처벌을 주장했다가 집권파(執權派) 남인(南人)의 미움을 받아 영암(靈巖)에 유배되었다.

 

肅宗(숙종) 2년(1676) 丙辰(병진) 7월 27일 철원(鐵源)으로 이배(移配)되어, 같은 달 12일 이른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시작되어 남인(南人)이 실권하자 肅宗(숙종) 6년 (1680) 庚申(경신) 4월 3일 유배(流配)에서 풀려나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제수된 뒤,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남인(南人)들의 죄를 다스리는 한편 송시열(宋時烈) ․ 박세채(朴世采) 등을 불러들이고, 그 후 8년간 영의정(領議政)으로 재직하고 肅宗(숙종) 13년(1687) 丁卯(정묘) 3월 13일 영의정(領議政)을 사직하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체직되었다.

같은 해 태조어용(太祖御容)을 전주로 모시고 돌아오는 길에 기사사화[(己巳士禍:소의장씨(昭儀張氏=장희빈)가 낳은 왕자 윤(昀=경종)이 아직 강보(襁褓)에 싸여있고 정비(正妃) 나이 아직 젊은데 더구나 후궁(後宮)의 소생(小生)을 세자(世子)에 책봉 하려하자 송시열과 함께 시기상조라(時機尙早)고 반대했고, 숙종은 이때에 남인을 지지하는 소의(昭儀)의 오라비 장희재(張希載)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의 힘을 얻어 서인(西人)을 물리치고 남인에게 정권을 맡겨서 일어난 사화(士禍)]가 일어나, 肅宗(숙종) 15(1689) 己巳(기사) 윤 3월 21일 양사에서 합계하여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金壽恒을 위리안치(圍籬安置)하라는 비답 있어 진도(珍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고, 이때 남인인 예조판서(禮曹判書) 민암(閔黯)을 비롯하여 판서(判書) ․ 참판(參判)등 남인경재(南人卿宰) 수십인(數十人)이 공격하고 사헌부(司憲府) ․ 사간원(司諫院)도 합계(合啓)하여 마침내 같은해 4월 9일 회갑(回甲)을 불과 네달을 앞두고 향년 61세로 사사(賜死)되었다.

 

이 사건의 배경은 경신출척(庚申黜陟)때 남인(南人)의 옥사(獄事)를 다스릴때 위관으로 소론(少論)의 반대에도 남인재상(南人宰相) 오시수(吳始壽)를 처형하여 보복을 당한 것이라는 명분이 있으나 그것은 숙종(肅宗)의 뜻을 반대했던(원자책봉문제) 관계로 처벌 한 것을 사록(史錄)은 남인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公(공)은 청음상공(淸陰相公:청음 김상헌)의 손자로 가학(家學)을 이어 계승하고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의 문인(門人),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과 종유(從遊) 하였고, 특히 우암(尤菴)이 가장 아끼던 후배로 한때 사림(士林)의 종주(宗主)로 추대 되고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열할때 송시열을 옹호하고『외척(外戚)=곡운공(谷雲公)의 손녀(從孫女) 숙종의 후궁 영빈김씨(寧嬪金氏)을 말함』과 가까운 노론(老論)의 영수(領袖)이기 때문에 소론(少論)의 명사(名士)로 부터 배척을 받기도 하였으나 시문(詩文)에 뛰어나고 변려문(騈儷文)은 당대에 제일인자로 손꼽혔고 가풍(家風)을 이온 필법(筆法)은 단아하여 전서(篆書)와 해서(楷書)는 물론 초서(草書)에도 능통하였다.

 

사후에 세상의 평가는 그가 조정에서 벼슬할때 세 가지의 큰 절의를 세웠다고 찬양하였다. 첫째는 남인의 역모를 꺾어 기강을 유지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소론이 이론(異論):남인에 대한 온건한 처벌 주장을 말함)을 일삼아 흉당(凶黨:남인)을 기쁘게 할 때에도 홀로 옳은것을 지켰을 뿐 아니라 화를 당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셋째는 스승인 송시열을 배신한 윤증(尹拯)의 죄를 통렬히 배척해 선비의 갈길을 밝혀 사문(斯文)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의 평판은 물론 그가 속한 노론계의 주장이며, 반대로 소론측에서는 그가 송시열과 윤증 사이의 사사로운 일을 임금에게 아뢰어 조정을 시끄럽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마침내 사림을 분열시켜 놓았다고 비난하였다.

 

拜位(배위)는 정경부인 安定羅氏(안정나씨)로 서기 1630년 庚午(경오) 人造(인조) 8년에 태어나, 서기 1703년 癸未(계미)肅宗(숙종) 29년 6월 22일에 卒(졸)하니 享年(향년) 74세였다. 아버지는 목사 星斗(성두)이고, 祖(조)는 참의 萬甲(만갑)이며. 증조는 輔德(보덕) 級(급)이니, 외조는 판서 金南重(김남중)으로 본은 경주이다.

膝下(슬하)에 6男(남) 1女(녀)를 두니, 1남은 영의정 몽와 昌集(창집)이고, 2남은 대제학 예조판서 농암 昌協(창협)이며, 3남은 증이조판서겸 제주 시호 文康(문강) 삼연 昌翕(창흡)이니, 4남은 증이조참의 노가재 昌業(창업)이요, 5남은 증이조판서 예빈사 주부 포음 昌楫(창즙)이고, 6남은 昌立(창립)이며, 1녀는 아버지가 군수인 李涉(이섭)으로 전주인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남양주시 와부읍 이패동 산11번지(석천마을 송전탑뒤)]金村(금촌) 子坐(자좌) 合窆(합폄)이고, 묘지(墓誌)는 우암 송시열이 撰(찬)하였으며, 묘갈과 用誌文(용지문)은 백형 곡운 金壽增이 쓰고, 묘표는 아들 삼연 金昌翕이 撰(찬)하였다.

 

肅宗(숙종) 20년(1694) 甲戌(갑술) 4월 2일 사면복관(赦免復官)되었으며, 高宗(고종) 23년(1886) 丙戌(병술) 현종묘정(顯宗廟廷)에 배향(配享)되었고, 진도봉암사(珍島鳳巖祠) ․ 영암녹동서원(靈巖鹿洞書院) ․ 영평옥병서원(永平玉屛書院) ․ 양주석실서원(楊州石室書院) ․ 전주호산사(全州湖山祠)에 배향(配享)되었고 저서(著書)는 문곡집(文谷集) 28권과 갑진북정록(甲辰北征錄)이 전한다. ※【참고문헌】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文谷集 宋子大全 黨議通略(李建昌) 안동김씨세보 안동김씨문헌록

 

 

농암 휘 창협의 묘역이다. 10대조 휘 창집의 바로 아래 동생으로 그다음 편에 실어야 하나 석실 묘역에 자리하였으므로 싣는다. 석실마을로 들어서면 선원 휘 상용 묘역 앞(선원 종가댁)을 지나 좌측으로 곡운 휘 수증 묘역이 있고 그 위 우측에 있다.

 

김창협(金昌協, 1651년(효종 2) ~ 1708년(숙종 34))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또는 삼주(三洲) 본관은 (신)안동(安東)이다. 증조부는 좌의정 청음 김상헌(金尙憲),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운수거사 김광찬(金光燦), 아버지는 영의정 문곡 김수항(金壽恒)이고, 어머니는 안정나씨(安定羅氏)로 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영의정 몽와 김창집(金昌集)의 동생이며 조선말기 형제 영의정으로 유명한 김병학(金炳學) 김병국(金炳國)의 6대조부이다.

 

현종 때 진사에 급제하였으며 숙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대사성·청풍 부사에 이르렀다.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사약을 받고 죽자 벼슬을 내놓고 산중에 들어가서 살았다. 아버지의 누명이 풀리자, 예조참판, 이조참판, 대제학, 예조판서, 지돈녕부사 등으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노론 가문이었지만 이황의 사상에 심취해 평생 연구하였다. 저서로 《농암집》, 《사단칠정변》 등이 있다.

 

 

석실 서윤공 종가댁의 모습이다. 종손 되시는 김성동씨가 선영을 지키고 계신다.

 

 

선원 휘 상용 종가댁으로 큰 도로 安東金氏墳山 표석 있는 곳에서 석실 마을로 40m 정도 들어서면 도로 좌측에 있고 집 뒷동산에 선원 할아버지와 그 후손들의 묘역이 자리 잡고 있다.

 

 

서윤공 묘역을 내려오면서 종손 김성동씨의 동생 되시는 김명동씨 집을 바라보았다. 두 분 형님께서 선영을 보살피는데 회관에 가 계셔서 찾아 인사를 드리고 돌누께쪽으로 향하였다. 답사를 마친 필자는 이내 집으로 향하였는데 오다가 청풍김씨 효 공원을 둘러보았는데 납골 묘역으로 조성되어 있었고 잘 정리되어 인상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