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庶尹公의 후예

안동김씨 김창집 집안 금관자 서말

추읍산 2011. 4. 27. 08:35

출처: 한국명문

 

안동김씨 김창집 집안 금관자 서말

이 가문의 인맥은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청음 김상헌계이며, 다른 하나는 선원 김상용계이다. 김상헌은 무후하여 김상용 아우 김상관의 아들 광찬으로 하여금 대를 이었다. 이 김광찬의 아들 김수증보다 아들 김수항으로부터 대박이 터졌다. 김수항은 영의정에 대제학을 ,할아버지 청음은 좌의정에 대제학을 지냈으니 조손 상신에 조손 대제학을 터뜨렸다.

 

할아버지가 좌의정이데 손자가 영의정이니 손자의 영예가 할아버지를 추월했다. 아들이나 손자가 아비나 할비를 타고 넘으면 고얀 놈이지만 벼슬에서는 아들이나 손자가 아비나 할비를 뛰어 넘으면 효자, 효손이 된다. 상신에서 손자 김수항이 한급 위라 하여 으시댈 일은 아니다. 할아버지 김상헌은 손자가 하지 못한 청백리가 되었다. 상신에서 한급 낮은 할아버지가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니 영의정 손자의 명예가 오히려 추월당할 판이다. 아니다! 손자 문곡은 할아버지 청음이 들어가지 못한 호당 출신이다. 사가독서를 한 선비의 명예는 할아버지도 부러워할 일이다. 이 집의 할아버지와 손자가 벌리는 명예 경쟁은 놀이터에서 하는 씨이소 게임보다 더 재미가 있다.

그러나 김수항의 대박은 곧 천길 낭떨어지 아래 핏빛으로 얼룩져 버렸다. 김상헌의 법통을 이어 받은 문곡 김수항은 "장동김씨 가문"의 영예로운 수장이었지만 비극의 주인공으로 돌변했다. 본인은 100만 대군을 거느린 장수보다 더 큰 기상으로 전장을 누비며 여러 차례 싸웠지만 결국은 순국했다. 제일차 예송 때는 기년설을 주장하여 승리했다. 제이차 예송에서는 대공설로 패했으나 영의정에 올랐다. 그뒤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유배된 후 사사되었다.

그 결과는 비극의 잔해만은 아니다. 100만 대군을 각각 거느린 장수 여섯을 얻었다. 바로 그 장수는 "6창"이라 불리는 그의 아들 여섯이다. 문곡 김수항의 작품 "6창"의 공연과 "6창'의 후손들이 벌리는 활동과 능력 경시대회는 너무 휘황찬란하여 눈이 부실 정도이다. "6창은 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 또 김창집[앞에 김창집과는 집자의 한자가 다르다], 김창립을 말한다. 이 "6창" 은 바로 "금관자 서말"의 곳간이다. 이 곳에서 안동김씨 실세가 다 나오다싶이 했다. 맏아들 김창집을 제외한 동생 다섯 "5창"은 학행편에서 이야기 하기로 하자.

김창집은 천하 무적함대 안동김씨 "6창"의 선봉장으로 아버지와 똑같이 영광과 비극의 양극을 넘나든 영웅호걸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몽와 김창집은 1684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의를 지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사사되자 영평의 산중에 숨어 지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조정에 다시 나가 여러 요직을 거쳐 1712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 뒤 소론의 목호룡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고발하여 사사되었다. 이 가문의 수장격인 문곡 김수항에 이어서 그 아들 몽와 김창집이 사사되고 김창집의 아들 죽취 김제겸도 아버지가 사사될 때 울산에 유배되었다가 부령으로 유배지를 옮겨 사사되었다. 김제겸의 아들 김성행도 그 고변사건으로 허위 자백 강요에 맞서다가 무릎뼈가 부서져 26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이에 임금이 4대에 걸친 비통한 죽음을 애도하여 "일묘 4충"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붉은 피가 흥건하던 이 집안에 약80년이 지나 경사가 터졌다. 왕비가 났다. 4대 비극의 마지막의 주인공 김성행의 종손자이며, 김제겸의 증손자 김조순의 딸이 순조의 비가 되었다.이제 김창집 집안의 비극은 끝났으며, 고생도 졸업이다. 안동김씨 만만세다. 이 경사는 우연이 아니다. 4대가 흘린 붉은 피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김창집의 손자 "3행"은 비극의 급류에 휩쓸려가는 주인공이며 유가족이었다,. "3행"은 김성행, 김달행, 김탄행이다. 맏인 김성행은 비참히 죽었고 나머지 두 손자도 죽은 몸이나 다름 없었다. 두 손자는 벼슬은 생각도 못했다. 이 비극의 세 손자 집안에 각각 왕비가 한 명씩 다 났다. 보기 드문 경사다. 이미 말한 순조비는 김달행의 손자 김조순의 딸이다. 헌종의 비는 김탄행의 증손 김조근의 딸이다. 철종의 비는 김성행의 증손 김문근의 딸이다.

 

김조순의 집안부터 살펴보자. 김조순은 안동김씨 제1호 왕비를 탄생시켰다. 풍고 김조순은 1765년에 태어나 1785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청환직을 거쳐 순조 즉위 후에 부제학이 되고 이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1802년 양관 대제학을 지내고 딸이 순조의 비가 되자 영돈녕부사에 오르고 영안부원군에 봉해졌다.

 

맏아들 김유근은 종숙 김용순에게 입양되었다. 김유근은 1785년에 태어나 1810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판서를 거쳐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김유근의 아들이 김병주다. 김병주는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와 예조 등의 판서를 지냈으며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핵심 인물로 권력을 행사했다.

 

김조순의 아들에 김좌근이있다. 김좌근은 문과에 급제하여 요직을 두루 거치고 영의정을 여러 차례 지낸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중추적인 인물이다. 김좌근은 무후하여 맏집 김성행의 증손 김영근의 아들 김병기로 입양 계대 하였다. 김병기는 철종 국구 김문근의 조카로 성격이 호방하였으며 관력이 화려했다. 이조판서만 다섯 번 지냈다. 김조순의 손자이며 김문근의 조카 김병지가 있다. 김병지는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와 형조의 판서 등을 지냈다. 이상은 김조순의 직계 가족이었다.

 

그 다음은 김조순의 사촌 김명순의 집을 보기로 하자.김명순은 문과하여 이조참판을 지냈다. 그의 아들에 김흥근이 있다. 문과하여 좌의정을 지냈다. 그다음 김명순의 아들 김응근이 사마시를 거쳐 공조와 형조의 판서를 지냈다. 김응근의 아들이 김병시이다. 김병시는 문과를 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파란만장한 우리의 역사 즉 문호개방,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의 혼란기에 보수 정객으로 맹활약을 했다. 조선 왕도정치의 정체성을 수호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또 김명순의 아들에 김홍근이 있다. 김흥근,김응근의 동생이다. 김홍근은 문과하여 영의정을 지냈다. 그리고 김홍근의 아들 김병덕이 문과하여 좌의정을 지냈다. 김명순의 집이 국구 김조순의 집보다 벼슬이 좋다. 김조순의 집은 상신 하나에 판서가 넷이다. 김명순의 집은 상신이 넷이고, 판서가 하나다.

 

김조근의 집안을 보기로 하자. 김조근은 안동김씨 제2호 왕비를 탄생시켰다. 자오 김조근은 헌종의 국구로 철종 때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기지를 굳힌 인물이다. 김조근은 "3행"의 끝인 탄행 집이다. 이 집은 직계 가족보다는 안동김씨 일족에게 덕을 더 많이 입혔다. 김조근의 집은 그 사촌 김보근이 문과하여 이조판서를 지냈을 정도이다.

 

김조순의 조부 김이소는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동이 트기도 전에 이미 명성을 날리고 세상을 떠났다. 김이소는 김조순의 당숙으로 김조순의 딸이 왕비로 간택되는 데 왕실로부터 좋은 점수를 받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김이소는 문과를 하여 우의정을 지냈으며 절개가 굳어 조야에 신망이 높을 뿐만 아니라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김조근의 집에는 김조근의 종조부 즉 김이소의 동생 김이도가 문과하여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그 조카 김난순이 김조근의 숙부로 문과하여 이조판서를 지냈다.

김문근의 집안을 보기로 하자. 김문근은 안동김씨 왕비 제3호를 탄생시켰다. 사교재 김문근은 1841년 음보로 가감역이 된 후 현감을 지냈다. 1851년 딸이 왕비가 되자 영은부원군에 봉해졌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강화에 진력한 인물이며, "3행"의 맏집 김성행의 증손이다. 김문근의 아들 김병필이 문과하여 예조판서를 지냈다. 그 사촌 김영근, 김교근, 김문근의 당질 김병교, 김병교의 손자 김학진이 모두 판서를 지냈다.

6창" 중에서도 맏인 몽와 김창집 집이 금관자 서말의 핵이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본령이다. 안동김씨의 노른자위 중에도 노른자위이다. 옥돌 중에 옥돌이고, 꽃 중에 꽃이다. 가문에 판서 하나가 나기만 해도 그 영광이 치솟아 1000명의 부러움을 산다. 그러나 그 다른 면을 보면 100명의 입맛을 떨어뜨리는 수도 있다. "나는 뭔가?"하며 씁쓸한 웃음을 짓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10명 정도는 이해 관계로 원망을 할 수도 있다. 4대 80년간 피로 물들든 집이 사라호 태풍 때 폭우처럼 80년간 판서가 쏟아졌다. 그때 백성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오늘의 국민들이 보는 눈은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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