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그리운 어머니

외사촌 형님과 어울렸던 어린 시절

추읍산 2011. 6. 2. 14:34

6.25 때 잠시 시골 우리 집으로 피난 오신 외가 식솔들은 얼마 안 되어 그해(1950년) 가을경인가? 되돌아갔습니다. 외사촌 형제들과 집 옆, 뭍 밭 8대조(諱 達行) 묘역에서 놀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 후 1.4 후퇴 때 저희는 흥천면 효지리로 피난하였고 외가는 군포로 피난하였다가 그만 미군 전폭기의 공습으로 외할머니와 외숙모, 외사촌 형제들, 향리에서 대동한 이승재? 누님이 방공호로 피신하였다가 모두 부둥켜안고 운명하였음은 이미 쓴 글( 6, 25전쟁 속의 어린 시절 )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때 논두렁으로 피한 외삼촌과 큰형만 살아남았는데 그때 상황이야 오죽했겠습니까? 1953년, 7월 휴전협정으로 총성은 멈췄고 외삼촌과 홍대식(1938년생으로 필자보다 6년 연상) 형은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서 사셨습니다. 자리는 차츰 잡혀갔고 외삼촌은 광산업무에 종사하셨고 형님은 대한민국 최고의 영재들이 다닌다는 경기중학교를 거쳐 경기 고등학교로 진학하였습니다.

 

1954년 제가 개군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일 것입니다. 형님은 매년 방학 때면 저희 집에 오셨습니다. 올 때는 라디오 한 대들고 오셨어요. 뚜껑 열리고 닫치는 것으로 제니스라고 들었습니다. 참 신기해하였습니다. 사람 목소리가 나오는데 저 속에 사람이 들었나? 음악도 흘러나오고요.

 

여름방학 때 밤이면, 라디오 소리 들으려고 우리 집 멍석 깔린 마당에는 마을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모두가 처음 보는 것이고 신기하니 그 소리 들으려고 밤만 되면 우리 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마을 앞에는 저수지가 있습니다. 물도 맑았고요. 여름방학에는 형님과 함께 저수지에 나가 수영하고 물장구치고 놀았습니다. 그때는 상당한 거리를 수영하였고 물속 숨바꼭질로 참 재미있었는데 지금은 수영금지구역이기도 하지만 발 담그는 모습도 볼 수 없어 세태의 변화가 너무나도 빠른 것 같습니다.

 

과자 상자를 들고

형님이 시골 올 때는 라디오 말고 꼭 가지고 오는 것이 하나 더 있어요. 과자 상자지요. 젤리, 사탕 과자 등 먹을거리 들었는데 살살 녹고 난생처음 느끼는 맛이었었습니다. 지금은 별것 아니겠지만, 그때는 참 신기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맛이었습니다.

 

낚시

여름방학 때는 형님하고 마을 앞 저수지에 낚시하러 갈 때가 잦았습니다. 대나무 낚싯대 걸러 메고 말입니다. 밑밥은 보리 방아 찧어오면 나오는 가루에다 된장 섞어 만든 것이죠. 후엔 깻묵 덩어리 구해 절구에 빻아 밀가루 섞어 만들기도 했지만요. 낚싯줄 중간에 달린 찌를 웃기라고 불렀어요. 수수깡 잘라 만든 것으로 물고기가 낚싯바늘에 달린 밑밥을 물면 쑥 들어가고 나오고 움직여요. 이때 낚아채는 것이죠.

 

덩벙이라고 하는 것도 있어요. 일종의 채낚시라고 할까요. 낚싯바늘 밑밥 다는 곳에 둘둘 말린 작은 삼각형 철사 또는 납봉에 낚싯바늘이 6, 7개 달렸습니다. 여기에 밑밥을 뭉쳐 낚싯바늘 그 속에 숨기고 늘어놓은 낚싯줄 인계 삼아 손에 잡고 몸짓 다해 힘껏 던집니다. 일반낚시 거리보다 훨씬 먼 거리를 날라 텀벙 물에 떨어지죠. 그래서 덤벙이라고 했나 봅니다.

 

줄 당겨 손 잡이용 채에 고정하고 수수깡으로 만든 웃기를 달아 응시합니다. 고기가 밑밥을 먹으면 웃기도 따라 움직이죠. 쳐지거나 당겨지면 낚아채는데 어떤 때는 두 마리가 올라오기도 해요. 온종일 잡으면 망태기 가득했어요. 백 마리도 넘었을 겁니다.

 

언제인가? 아버지도 함께하셨는데 저녁 무렵이 되었습니다. 펼쳐놓은 낚싯대 앞 웃기가 쑥 들어가는 거여요. 낚아챘는데 이거 끌려갈 느낌으로 떨려오는데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어느새 낚싯대는 형님에게 넘어갔고 한참을 실랑이 끝에 끌어올린 고기는 들기에도 어려운 반팔 길이도 넘는 잉어였습니다.

 

이웃에는 김홍국씨가 살았어요. 그 부친 말하기를 대삭(대식으로 억양 높인 말)이는 물고기도 잘 잡는다. 너도 잡아오렴 하셨습니다. 형 만나면 이 이야기를 리듬~ 잡아 한바탕 웃기도 한답니다.

 

겨울방학 때는 썰매도 함께 탔고 눈 오는 날이면 눈사람도 만들었습니다. 그때는 땔감이 귀해 산에는 갈퀴질 하여 먼지가 일 지경이었습니다. 모두가 땔감을 산에 의지할 때이니까요. 소쿠리 달린 지게 걸머지고 도끼 들고 함께 나섰습니다. 고작빠리 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나무를 베어낸 자리에는 끄트머리가 남지요. 이를 도끼로 두드려 패 뿌리째 캐내는 거여요. 할 줄 모르는 도끼질로 그래도 한 소쿠리 담아와 따듯한 겨울나기에 보탬이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어느 산이나 울창하여 비끼고 나가기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마을에서도 인기가 좋아 그때 마을에 계셨던 분이면 홍대식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어요. 저는 고향에서 중학교에 다녔고 그때까지의 모습을 형님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았습니다. 이후 형님은 고려대학교를 나와 우리나라 화학 발전에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퇴직하시고 산골 전원주택에서 형수님하고 여생을 보내시는데 가끔이지만 만나 옛이야기 하며 그때를 떠올리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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