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그리운 어머니

가시밭길 헤쳐오신 어머님

추읍산 2011. 6. 6. 11:37

어머니 풍산홍씨 께서는 1911년 참위(參尉) 홍우경(洪祐景)과 광산김씨 사이에서 1남 1녀 중 따님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위로 오빠 한 분 계셨습니다. 대전 부근 송촌이라는 곳에서 성장하셨다고 해요. 그곳에서 사시다가 1930년경 저희 부친 하고 결혼하셨습니다. 여주군(지금은 양평군) 개군면 향리 160번지(현 향리 저수지 안)에는 저희 집인 조선 기와집이 있었다고 합니다. 40칸? 정도였을 겁니다.

 

그곳에서 신혼생활을 하셨는데 일본 강점기 때죠. 층층시하로 고생 필설로 어찌 다 표현하겠습니까? 더구나 부군인 저희 아버지는 심신이 허약하셔서 항상 피동적 모습이셨답니다. 말이 ◯◯이고 ◯◯◯이지 왜들 그렇잖아요. 일제강점기에는 유명가문이 몰락하는 과정으로 그때의 일반적인 현상인 것 같았습니다. 가세는 수그러들고 더구나 할아버지께서 ◯◯에 빠지셔서 얼마 안 되던 가산도 기울었다고 합니다.

 

어머님께서 겪으신 시집살이, 그 고생을 필설로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 추운 겨울 문고리에 손은 쩍쩍 달라붙고 층층시하와 대가족 그 틈에서 어머님의 모습은 어떠하셨을까? 어떻게 된 일인지 양식 걱정까지 해야 했답니다. 공출로 빼앗김을 당할 때이지만 일반 농가의 평균보다 많았을 농토와 지금의 향리 저수지 안 50여 호 대지가 우리 소유임을 살피면 일반인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악착같지 못한 부친의 성격까지 더 했을 것입니다. 그때는 집집이 쌀 등 곡식을 숨겨놓지 않았나 두졌다고 해요. 대신 깻묵 등 짐승먹이로나 쓰였을 것을 받았겠지요.

 

부모님의 신혼 초였을 그때는 교통수단이 미약하던 때라고 합니다. 서울 계동에는 세마(洗馬, 김승진) 할아버지께서 사셨습니다. 하옥 김좌근의 증손자인 할아버지는 해마다 저희 집에 년 얼마씩의 생활비를 감당하셨다고 합니다. 위선이 놀라운 분이시니까요. 어머님께서 편지를 쓰시면 집안일을 도우셨던 노씨 할아버지(어머니께서는 노 서방 이라고 불렀습니다.)께서 갖고 걸어서 서울을 다녀오셨다고 합니다. 교통이 조선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그때로 지금의 코스와 별 차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굽은 길이 펴지고 넓혀져 포장된 모습이 다르겠지요. 양평을 거쳐 한강을 끼고 가는 그 길을 걸으셨을 할아버지를 생각합니다. 동 트기전 일찍 길을 나와 온종일 걸어서 저녁 무렵이면 계동에 도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1년 쓸 생활비를 받아들고 오시는 노씨 할아버지는 은인 중에 은인입니다.

 

어머님께서는 바느질 솜씨가 놀라우셨습니다. 저희 집에는 소련제로 고추같이 생긴 북이 들어 있는 일명 고추 북 재봉틀이 있었어요. 생활의 원천이 되었을 이 재봉틀은 밤낮으로 돌아갔다는데 제가 1944년 태어나고 1960년대까지 계속되어 그 모습 아른거립니다.

 

향리 저수지와 어머니

저희 마을에는 저수지가 있습니다. 45,000평 정도로 일본 강점기 말(1942년)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때는 제가 태어나기 전입니다. 50여 호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옛적부터 내려오는 촌락이지요. 그곳 향리 160번지 있었던 우리 집을 비롯한 수몰되는 모든 집이 뜯김을 받아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향리 2반(아랫상골)의 저수지 옆 작은 마을은 그때 우리와 함께 남기를 원하는 일부의 분들이 뜯어 옮긴 집들이고 대부분은 타곳으로 이사하였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대대로 이어오던 촌락은 저수지로 변하였고 그 안의 상당 부분의 토지가 저희 것으로 이는 경제적으로 더욱 어렵게 만든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이때 보상금을 겁박 당하기도 했고 그나마 어머님께서 나서셨기에 다행입니다. 어머님의 두 주먹 불끈 쥔 타격은 수리조합 건설 사무실에서 울렸습니다. 이때 대신면 후포리와 장풍리에 농토를 마련하였다는데 해방 후 곧 있었던 토지개혁(농지분배)에 의해 모두 없어졌습니다.

 

토지개혁과 우리 집

1950년에는 토지개혁(농지분배)이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농지가 그 대상으로 경작자 앞으로 권한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대신면의 농토와 얼마 남지 않은 집 주위 농토는 모두 소작인에게 분배되었습니다. 직영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다만, 조상님 모심으로 위토라는 제도가 있어 일부 농지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때 위토마저 뺏으려는 경작자와의 갈등으로 고통에 시달리셨고 어머님의 울부짖음은 면사무소를 진동시키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 없이 시행되는 농지분배라면 이는 정의에도 어긋납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농지의 소유 평준화가 이루어졌고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이후 살아오는 과정에서 여러 시련이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의 우리 집

여전히 어려운 때입니다. 전답은 얼마 안 되는 위토뿐으로 이때 어머니께서 삯바느질로 모은 돈으로 얼마간 농토를 샀습니다. 그때는 할 줄 모르는 농사일로 이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유약하시고 교편(원덕 초등학교)을 잡으셨지만 작은 보탬만 되었을 뿐이죠. 그때는 꼬맹이로 뛰어놀던 생각밖에 없습니다. 이어 1950년 6, 25가 터졌고 제 나이 7살 때입니다. 그때의 어려운 모습은 <클릭> 6, 25전쟁 속의 어린 시절 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바 있습니다.

 

여 군자로서의 모습

어머니는 대범하시고 위엄이 크게 돋보였습니다. 아무리 세태가 변했다 하더라도 그 위치는 부동이었습니다. 모두를 압도하시는 이 모습은 천성에다 중국소설로 견문을 넓히시면서 더해졌을 것입니다. 삼국지 등 고사를 들려주셨는데 제가 블로그를 개설하고 글을 쓰면서 역사 속의 글에서 어떤 부분은 어머니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추가하였음은 이런 과정의 결과입니다.

 

6, 25전쟁은 비참함을 불러왔습니다. 인민군이 들어오자 공무원(특히 경찰), 지주 등은 숙청 대상이 되었고 실지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때 우리 집은 안전하였음은 곱 씹어야 할 대목입니다. 국군이 입성하자 상황은 반전되었습니다.

 

북의 체제를 지지하여 앞장섰던 어느 분은 국군이 입성하자 마을을 떠나가야 했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북행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마지막 인사를 하러 어머니 앞에 선 그분을 담장을 넘겨 도망가게 했다고 합니다. 북으로 넘어갔는지 아니면 도중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름을 들었는데 생각나지 않는군요. 전쟁은 비참함을 불러옵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석 달 장마에 비 안 맞는 사람 없다.

 

곳곳에서 이루어진 슬픔은 때론 사감까지 가세해 인민군이 물러간 자리를 피로 물들였다고 합니다. 이성을 잃은 것이겠지요. 어머님의 강직하고 대담함은 면내에서 부동의 위치였고 자문하기도 했답니다. 실지로 희생될 위기에 몰린 여러 사람을 구해냈다고 들었습니다.

 

개군면 부인회장

전쟁은 끝나고 차츰 안정도 되찾아 갔습니다. 제가 개군초등학교 다닐 적이죠. 자유당 정권으로 이승만 대통령 때입니다. 어머니는 대한부인회 여주군 지회 개군면 부인회장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여성으로의 개군면 대표가 된 것입니다. 군 부인회 모임에서도 어머니는 모두를 압도하셨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여주군의 각 면 부인회장들이 저희 집으로 찾아왔고 중학교 2학년 전후입니다.

 

면장도 지서주임도 어머님에게는 깍듯하였습니다. 하루는 군 정찰기가 저희 집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저희 시골집 부근에는 군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특무대장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이분 또한, 어머니와 친교를 쌓으신 분으로 어머님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임무수행 중 어느 날 하늘 위에서 어머님을 뵙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시간 날 적마다 찾아왔습니다. 어머님의 개군면 부인회장의 임무는 박정희 대통령 초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기동훈련과 어머니

매년 이른 봄이면 군 기동훈련이 펼쳐집니다. 이 훈련은 저희 집에서 4km 거리인 이포에서 도강훈련으로 그 절정에 이룹니다. 집 주위에는 군 막사가 설치되고 장비가 집결합니다. 하늘에서는 헬기와 누에같이 생긴 비행기가 날아다니고요. 이때에 군인들에게 쉬어 갈 곳을 마련해주기도 하고 수도 없이 밥을 지어 주었습니다. 물론 쌀과 부식은 가져오지만, 그 수고를 마다치 않으셨어요. 해마다 훈련 때는 우리 집은 군인들로 북적댔습니다.

 

제가 1965년 입대하였고 의정부 부근에서 군 생활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사단 본부에서 문 대령이라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이분도 기동훈련 중 어머니를 알게 됐고 마침 제가 속한 사단 사령부로 전임을 명받아 온 것이지요. 중대장을 만나 저를 당부하였다는데 저는 대대 무선 통신병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중대장의 저를 대하는 모습이 따듯하여 모두가 어머님의 덕분이었습니다.

 

 대대장 숙소가 된 사랑방

지금은 부대마다 장교와 부사관들이 가족과 함께 머무를 공간이 아파트 등의 모습으로 현대화되었지만 1960년대는 그런 시설들이 없었어요. 옆 마을에는 포대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사랑방이 대대장의 숙소로 제공되었습니다. 지프로 출퇴근하고 군인들이 들락거렸습니다.

 

길쌈 매는 어머니

저희는 생활하기 위해서는 농사를 짓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밭에 나가 살다시피 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왜 그렇게도 잡초가 많은지 매고 나면 또 기어 올라와요. 그때는 보리농사를 지었는데 보리가 팰 무렵이면 고랑에 콩을 심었습니다. 보리 베어낸 밭은 콩 싹이 자랍니다. 풀도 함께 자라 이때는 호미로 보리 끄트머리를 흙과 함께 파내어 콩 싹 틈에 난 풀을 덮습니다. 도랑이 만들어지고 풀 없는 깨끗한 모습으로 탈바꿈합니다. 이를 맹이 튼다고 하였습니다. 풀은 고추밭 참깨밭 등 곳곳에서 기어 올라오니 참 생명력은 질기기도 합니다. 밭농사는 풀과의 전쟁이다. 이렇게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논농사

마을 비탈진 곳에 우리 논 8마지기(1,600평)와 저수지 뜰 아래에는 역시 논 9마지기(1,800평)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분배 당하고 남은 논 전부입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소가 필수입니다. 갈 줄도 알아야 하고요. 어느 해는 직영하여 수확한 볏 더미가 불에 타 고통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일부 기간을 제외하고는 능력 없어 타인이 경작하였습니다.

 

 례 쌀도 먹었습니다.

수입은 없고 참 어렵던 절 우리는 할 수 없이 장례 쌀을 먹었습니다. 쌀 한 가마를 빌리면 다음 해 반 가마를 더해 갚습니다. 연 50‰ 이율입니다. 그때는 쌀 5가마만 빌려도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세태는 많이도 달라졌습니다.

 

 옛날이야기 하시는 어머님

어머님은 옛날 이야기하기 좋아하셔서 저희 또한, 듣기 좋아했습니다. 시간 날 적마다 이야기꽃 피우셨는데 농한기인 겨울에는 화로 가에 우리 가족 모였습니다. 삼국지 이야기를 주로 하셨고 공자, 맹자, 옥인몽등 중국 소설과 명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붓으로 필사한 소설을 읽은 것이지 현대와 같은 책을 읽은 것은 아닙니다. 양평박물관에 보관된 옥인몽도 필사본입니다. 붓글씨도 명필입니다. 선세유교는 어머님의 글씨로 몇 년 전 KBS 느티나무 시간에 방영되기도 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고 제가 전모를 기억할 수 없지만, 그때는 그 모습 속으로 빨려들기도 했습니다. 닭 밝은 여름밤에는 우리 가족 뜰에 멍석 깔고 앉았습니다. 그때는 주로 이태백의 시를 읊으셨고 관련된 이야기에 숨죽여 들었습니다. 이는 제가 쓴 글「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에서 표현하였습니다.

 

맹자 어머니의 삼천지교, 한석봉과 그 어머님, 정조의 효행, 양녕대군, 뒤주대왕(사도세자를 일컬음), 송 우암 선생님 이야기로 사약 잡으실 때 오줌 적이 장에 누적되어 사약이 안 듣자 발꿈치로 항문을 바치고 돌아가신 이야기, 향리에 먼저 자리한 노씨댁, 순원왕후를 업어 키운 할아버지, 영안 부원군 잠행시 지방관과의 마주한 밥상, 출가한 황산 할아버지의 ○○딸의 슬픔,, 황산과 춘산 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와 대원군 사이에 있었던 일, 군총난리(임오군란)와 우리 집, 외 증조 홍철주의 여주목사 때 투전국과 암행어사로서의 활약, 갑신정변에서의 처절한 모습과 김옥균의 최후 모습 등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제가 쓴 역사 속 글에서 이런 부분은 어머님의 이야기를 첨가해야 하겠구나 하여 필자(추읍산)가 쓰는 글옮긴이의 글로 이해를 돕기도 했습니다. 아직 소개되지 않은 부분은 하나하나 정리할 생각인데 명예와 관련하여 누구에겐가? 마음 아픔을 불러올 글이라면, 바로 가리켜 쓰지는 않겠습니다. 이는 제가 쓰는 글 전체에 해당하기도 합니다.

 

유학(儒學)과 어머니

증조할머니 청해이씨를 모시고 유약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멍에를 짊어지신 어머님! 1950~1960년대의 장례풍습에 대하여 쓰고자 합니다. 그때의 풍습으로 경조사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였습니다. 아름다운 미풍양속이지요. 심신이 허약하신 아버지는 글 쓰시는 일을 도맡았고 부고장으로부터 시작하여 관 뚜껑 덮는 천에 쓰는 글, 상여 나갈 때 깃발에 쓰는 글 등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수의와 상복 등 바느질을 도맡았습니다. 언제인가? 저 초등학교 때 마을에는 유학이라는 계가 결성됐습니다. 사람이 돌아가시면 장례절차를 돕기 위한 모임이지요. 뭐 이런 계 모임이 없었을 때도 마을 분 함께 했는데 새삼 결성됐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심신이 유약하신 아버지에게 상여를 메게 하려는 일부의 주도로 진행됐지만, 이는 마을 분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더 쓰고 싶지 않네요.

 

 큰 외가와 서울 공대생

외가의 큰 댁도 넓은 의미에서 외가입니다. 1960년대, 큰 외가댁 아저씨로 홍준기 씨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로 재직할 때입니다. 1960년, 노량진 집은 터가 꽤 넓었습니다. 최순달(전 체신부 장관으로 우리나라 우주과학 개척자) 매형은 큰 누님과 미국에 계셨고 그 어머니는 손자와 큰 외가 근처, 작은 집에서 살고 계셨습니다. 그곳을 어머니와 함께 찾기도 했는데 아주 인자하셨습니다.

 

어느 날 꼬맹이(최순달 씨의 아들로 이름이 기억나지 않습니다.)와 함께 노량진 뒷동산에 올랐습니다. 강 건너 당인리 화력 발전소 굴뚝에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여의도 벌판은 비행기가 뜨고 내렸습니다. 제가 꼬맹이 손을 잡고 여의도를 가리키며 아빠는 어느 곳에서 비행기를 타셨지? 꼬맹이는 여의도를 가리켰습니다. 그때는 주 비행장이 김포?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큰 외가는 1961년경 돈암동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조선 기와집으로 이웃은 돈암장(한때 이승만 대통령이 머무른 곳)입니다. 아저씨 제자들이 수시로 드나들기도 하였습니다. 어머님께서 서울에 오시면 그곳에 머무를 적이 많았는데 어느 날 서울공대생 가득 모인 대청마루에서 어머님의 삼국지 이야기가 꽃 피어오릅니다. 모두가 숨죽이는데 한마디로 어머님의 삼국지 삼매경에 빠져든 것이지요. 저도 어머니 따라 그곳을 찾을 적이 많았습니다.

 

10여년 전 외사촌 형 딸 결혼식에서 혜정 누님(최순달의 부인)을 만났어요. 네가 철동 이냐고 어찌할 줄 몰라 좋아하셨던 모습이 떠오르네요. 그때 함께한 형제들과 즐거웠고 저를 끔찍이도 사랑하셨던 준익 아저씨 등 적으려면 끝도 없어요.

 

 어머님께서 운명하셨습니다.

1985년 어머니는 부천 성가병원에서 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치유하기에는 너무 늦어 얼마간의 입원 끝에 시골집으로 귀향하셨는데 그때 부축하며 복받치는 설움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저희를 공부시키셨고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셨는데 그 뜻을 받들지 못했고 모진 풍파를 겪으시게 했습니다.

 

1985년 7월 8일, 운명하시기 전날 밤 어머님께서는 예감하셨는지 임종경을 바쳐달라고 하셨습니다. 기도 속에 하느님 품에 안기려는 마지막 당부이셨습니다. 어머니는 편안하셨을 것입니다. 다음 날(7월 9일) 아침 양평성당의 최 신부님을 모셨습니다. 세수하시고 깨끗한 옷 갈아입으시고 언제 아팠던가? 정신 말짱하셨습니다. 병자성사를 받으시고 신부님께서 되돌아가신 다음 당신의 큰 손자인 정현에게 훌륭하게 성장하여 가문의 기둥이 되어 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날 오후가 되자 어머님의 숨소리는 가빠졌고 곧 눈을 감으셨습니다. 지극히 평화로운 모습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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