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문화유산

화성행궁

추읍산 2011. 6. 29. 09:56

 6월 28일 오후 3시경 융건릉을 나온 준한 아저씨와 필자는 화성행궁을 찾았다. 수원역 앞 육교를 건너 우측으로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행궁 가는 시내버스로 이동하였다.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화성의 일차 답사는 먼저 융건릉과 행궁이다. 정조께서는 서울을 화성(수원)으로 옮길 가도 생각하셨고 성역화하셨는데 이는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비롯하였다. 그곳을 답사하기 위하여 나선 것이다.

 

아래 설명문 중 ○ 표시는 워키백과에서 인용한 것이다.

 

행궁을 향해 걸어가시는 준한 아저씨로 행궁 앞 광장이다.

 

 

행궁 앞 광장에는 창가락 드높이 맑은 목소리 울려 나오고 있었다.

 

 

○ 신풍루(新豊樓)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신풍루는 1790년(정조 14년)에 세워졌는데 처음 이름은 진남루(鎭南樓)였다. 그 후 1795년에 정조의 명으로 신풍루로 변경하였다. 1795년에 정조가 행차했을 때 신풍루 앞에서 정조가 친히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 좌익문(左翊門)은 신풍루를 통과하여 마당을 지나면 나오는 문으로 중양문 앞에 위치해 있다. 1790년에 완공되었고, 남쪽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되어 있다.

 

 

 

 

입구 근처 생명력이 질긴 느티나무

 

 

 

 

 

 

 

 

 

 

 

 

 

 

 

 

 

 

재현되고 있는 옛 병사들의 모습

 

 

 

 

 

 

 

 

 

 

 

 

○ 경룡관(景龍館)은 장락당의 바깥문으로 사용했던 부속건물이다. 1794년(정조 18년)에 세워졌는데, 2층 구조로 만들고 2층은 누마루로 만들고 1층을 문을 만들어 지락문(至樂門)이라 이름붙였다.

 

 

 

 

 

 

 

 

평상시에는 화성(수원) 유수가 거처하는 곳이라니 1827~1828년에 수원 유수로 재직하신 5대조 휘 유근께서도 이곳에서 근무하셨을 것이다.

 

 

5대조 황산 김유근(金根 1785~1840)의 근무처였던 곳에서 준한 아저씨와 함께 자세를 잡았다. 1828년 3월 10일 전후한 어느날 이임을 명받아 이곳을 떠날 때 이임식이 열렸을까? 그때 남기신 글을 아래 옮긴다.

 

曉發京行 漫賦一律 示營中諸人

 

새벽에 서울로 떠나면서 공연히 율시(律詩) 한 수를 지어 화영(華營)의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다

 

來時殘臘雪漫天  올 때는 섣달이라 하늘에 눈발이 날렸는데

春日東歸意浩然  봄날 고향으로 가니 마음이 스스럼이 없구나

素操何曾留犢子  검소한 절조로 언제 송아지 남긴 적 있었던가

仁聲多愧設蒲鞭  부들 채찍 사용한 어진 명성에 부끄럽구나

斯民足與爲三代  이곳 백성은 더불어 삼대(三代)의 백성 될 만하니

易地皆同有後賢  내가 떠나도 뒤 이어 어진 관리 올 것일세

寄語諸君須努力  부탁하노니, 자네들 모름지기 노력하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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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있었던가 : 벼슬아치의 청렴함을 이른다. 후한(後漢) 때 수춘 영(壽春令) 시묘(時苗)가 젊어서부터 매우 청렴해서 수춘 영으로 부임할 때 허름한 수레에 누런 암소를 멍에 하여 타고 갔다. 1년 남짓 벼슬살이하는 동안에 그 암소가 송아지 한 마리를 낳자 이임(離任)할 때 그 송아지를 그곳에 남겨 두면서 주부(主簿)에게, “내가 올 때는 본래 이 송아지가 없었으니, 이 송아지는 회남(淮南)에서 낳은 것이다.” 했다. <?삼국지(三國志)?23 위서(魏書)23 「화상양두조배전(和常楊杜趙裴傳)」 상림(常林) 조항 배송지(裴松之) 주(注)>

 

부들 채찍...어진 명성 : 후한(後漢)의 유관(劉寬)이 남양 태수(南陽太守)로 있을 때 관리가 잘못을 저지르면 부들 채찍을 써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고 고통을 가하지 않았다. <"후한서(後漢書)"25 "탁노위유열전(卓魯魏劉列傳)" 유관조항>


8) 삼대(三代)의 백성 : 삼대는 하(夏). 은(殷). 주(周) 세 시대로 , 태평성대를 구가한 이상적인 시대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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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5대조 황산 김유근은 1827년 수원 유수로 임명되어 10개월의 공무를 마치고 1828년 3월 10일 전후한 어느 날  귀경길에 올랐다. (김유근은 1828년 3월 11일 판의금 부사 직책을 받았다. 그러나 곧 체직되고 4월 17일 이조판서로 되었다.) 수원 유수로 명받은 날이 1827년 6월 10일인데 곧 겨울이 왔고 눈 내린 정경은 취임 이후인데 올 때 눈이 온 것으로 적고 있다. 아마도 세월이 빠르게 갔음이 그렇게 느꼈는가보다. 그때도 이 취임식이 있었을 것이다. 같이 치렀는지 따로 거행했는지는 모르겠다. 그 이임을 명받아 서울로 떠나면서 그곳 관리들에게 시 한 수를 남겼다. 그 간 노고의 감사함을 전하면서 각자 맡은 바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여 새로 부임하는 수원 유수를 성심으로 보필하여 그곳 백성에게 선정을 펼쳐 달라고 당부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듯하다.

 

황산의 글 더 볼 곳

☆ 화영(華營) 공관에서 경미(景渼)가 보내준 시에 차운하다..

 명봉사(鳴鳳寺) 승려 경민(景旻)에게 주다.

섣달 그믐날

☆ 화영(華營)에서 정월 초하루에

 

 

 

 

 

 

 

황산 김유근 할아버지께서 1827~1828년의 수원 유수 재직 시 어느 날 이곳을 찾으셨는데 그 감회를 읽어보자. 행궁은 수원유수 근무처로 겸용되었다고 한다.

읽기: 장락당(長樂堂)에서 감회를 쓰다

 

 

 

 

 

 

혜경궁 홍씨

 

 

 

 

 

 

 

 

 

 

 

 

 

 

복내당 부엌으로 수원부 유수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단다.

 

 

 

 

 

 

 

 

 

 

 

 

 

 

외정리소는 역대 국왕이 화성 행궁 행차 시 제례 등 행사를 담당하는 부서이다.

 

 

 

 

 

 

 

 

 

 

 

 

 

 

봉수당

 

 

 

 

봉수당에서 아들인 정조 대왕의 하례를 받는 혜경궁 홍씨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예를 올리는 정조 대왕

 

 

원래 유여택에서 정조께서 신하를 접견하고 쉬시던 공간이었다. 편의를 위해 이곳 봉수당에서 연출하였단다.

 

 

 

 

글 읽는 환관으로 행각에 위치한다.

 

 

채비하는 환관

 

 

바느질하는 침방 나인으로 봉수당과 장락당 뒤편에 연결된 행각에 있다.

 

 

위 근처로 단장하는 상궁 모습이다.

 

 

 

 

 

이웃 관람처로 이동하시는 준한 아저씨

 

 

○ 득중정(得中亭)은 정조가 활을 쏘던 정자로 1790년에 정조가 세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쏴 다 맞춘 기념으로 득중정으로 지었다.

 

 

정조 어필

 

 

 

 

○ 낙남헌(洛南軒)은 1794년에 완공된 건물로 1795년 정조대왕 행차시에 각종 행사가 이곳에서 치러졌단다.

 

 

 

 

어정

 

 

어정 아래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물고기가 놀고 있다.

 

 

정조의 어진 이 모셔 진 곳

 

 

정조 어진

 

 

이안청으로 정조 어진을 옮겨야 할 때  임시로 모셔 두는 건물이다.

 

 

제향이 있을 때 제관이 머무는 곳이다.

 

 

 

 

산 위 누각은 서장대일까?

 

 

운한당을 나와 산쪽으로 걸었다.

 

 

 

 

 

 

산위에서 바라 본 화성 행궁

 

 

 

 

 

 

 

 

 

 

내려 오면서 주차장 근처에서 행궁을 바라 보았다.

 

 

화성 행궁 뒤 동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행궁 안으로 들어가 입구쪽을 되 돌아 보고 나오다 느티나무와 집사청 등을 한 번 더 보고 나왔다. 다시 본 행궁 입구

 

 

다시 바라본 행궁 앞 광장

 

 

행궁 광장으로 행궁으로 들어가는 입구 근처에 세워진 방향 이정표

 

 

행궁 광장 앞 큰 길을 건너기전 여민각의 모습이다.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여민각에서 바라본 화성 행궁과 산위 서장대의 모습이 희미하다.

 

 

행궁 앞 도로는 차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수원역으로 이동한 우리는 역 지하도도를 경유 식당가를 찾았다. 인파로 넘쳐나는 중심가인듯 하였다. 2층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한 우리는 수원역으로 되돌아 왔다.

 

 

수원역

 

 

수원 역 앞, 오가는 인파로 약동하는 수원의 심장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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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화성(수원) 답사를 마친 우리는 서울행 전철에 몸을 실었고 한 번 더 아직 보지 못한 구역을 찾을것을 다짐하였다. 집에 도착하니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고 피곤한 몸 잠자리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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