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불교문화재연구소(소장 미등)가 문화재청(청장 김 찬)의 문화재기금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는 ‘한국의 사찰문화재 일제조사 사업’ 진행 과정 중 용주사 효행박물관에서 1200년 전에 조성된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855년)를 발견했다.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 전면의 세부 이미지. 사진=불교문화재연구소 제공.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는 통일신라 46대 문성왕(재위 839~857)이 대중(大中) 3년(855)에 탑을 세우면서 납입한 금동판 형태의 발원문이다. ‘경응’은 문성왕의 휘(諱)이며 ‘무구정(無垢淨)’은 통일신라시대에 탑을 건립하는데 신앙적 근거가 되었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의미한다. 세로 22.4cm×가로 38.2cm의 판형에, 앞뒷면에 탑을 건립하게 된 배경과 발원 내용, 조탑(造塔)에 관여한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는 1824년에 석공(石工)이 경주 남산 창림사 삼층석탑을 도괴할 때 무구정광다라니경과 함께 발견된 것이다. 당시 금석학에 조예가 깊던 추사(秋史)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이를 모사해 두었으며, 그 모사본은 <慶州南山の佛蹟>(1940년)에 수록되어 세상에 전하고 있으나 원판의 행방은 지금까지 묘연한 상태였다.
이번 조사에서 발견된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는 김정희의 모사본으로만 전하는 것과 내용, 체제, 서체 등이 모두 동일한 것이어서 크게 주목된다.
이천 영원사 출토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 금동판 전면.
이천 영원사 출토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 금동판 후면
추사 김정희의 모사본 전면.
추사 김정희의 모사본 뒷면
(재)불교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11월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이하 탑원기)를 발견한 후 금속성분분석과 서체분석, 금속제작기법 등을 관련 전문가에 자문하였다. 약 3개월 동안 관련 전문가들의 분석 결과 순동(Cu), 금(Au), 수은(Hg) 등이 검출되었다. 이는 탑원기가 아말감수은기법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아말감수은기법은 전통적인 고대에 유행한 대표적인 제작기법이다. 서체면에서는 탑원기와 김정희의 모사본이 자간(字間), 결구(結構) 등이 대체로 일치하지만, 탑원기에서 보이는 필획이 보다 더 정밀하고 생동감이 넘치며 결구가 뛰어나다는 것이 서예전문가들의 평가다.
탑원기에 사용된 글자 새김 기법은 글자의 윤곽을 따라 그리는 쌍구법(雙鉤法)이다. 이 기법은 <염거화상탑지>(844년), <황룡사구층목탑 찰주본기>(872년), <중화3년명 경통>(883년) 등 통일신라 동판에 글씨를 새길 때 즐겨 사용되었던 기법이다. 이외에도 금동판의 고른 연마와 도금을 한 후 작은 망치로 정(釘)을 쪼아 글자를 새기는 방식 등에서 매우 숙련된 장인이 제작 기술을 살필 수 있으며, 표면의 불규칙한 크랙(crack)은 현대 금속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라고 불교문화재연구소는 설명했다.
전면 세부 사진
측면 사진
뒷면 세부사진
이번에 발견된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는 용주사(龍珠寺) 말사인 이천 영원사(靈源寺)에서 1968년 대웅전을 해체하던 중 기단에서 출토되었다. 이후 사찰에서 계속 비장(秘藏)하고 있다가 2011년 용주사 효행박물관에 기탁하였다. 영원사는 안동 김씨의 원찰(願刹)로, 1827년에는 김조순(金祖淳)의 시주로 중건되었다. 사찰 주변에는 김조순과 그의 아들 김유근의 묘소,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의 고택(경기도 민속자료 제122호) 등이 있으며, 1968년 영원사 중창 때에도 안동 김씨 종부의 시주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 시기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은 김정희와 석교(石交, 아주 돈독한 지기)에 비유될 정도로 돈독한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이러한 친분을 고려해 보면, 1824년 창림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무구정탑원기는 김정희를 통해 김조순 일가로 들어갔으며 1825년 영원사가 중창할 때 대웅전의 진단구(鎭壇具)로 기단에 매납(埋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무구정탑원기 금동판 원본 발견은 제작자와 발원자가 명기된 완벽한 형태의 통일신라 금석문의 발견되어 불교사와 불교미술사, 서예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또한 무구정탑원기의 행방을 둘러싼 갖가지 이설들을 말끔히 정리하게 되었다는 의미도 있다.
한편, (재)불교문화재연구소는 이번에 발견된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의 조사 내용을 정리하여 보고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 원문>
<전 면>
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
翰林郞新授秋城郡太守臣金立之奉 敎撰」
聞經之言有爲功德厥數萬端而利物」
無邊者莫若崇建塔廟伏以」
國王曆劫修善位冠人天而愍有情之」
沈浮苦海環廻六途將設拯濟之門」
導引淨域者無越於建立无垢淨塔」
於是竭至誠誓渡含靈爰選海內」
之匠以採他山之石雕鐫累塔藏諸」
舍利恭願此功德廣越天潯高踰」
有頂利彼蠢動含靈復願」
國王永主人天會其報盡之日捨粟」
散之名齊於无上之位」
維唐大中九年歲在乙亥夏首閏月日建」
<후 면>
奉 敎宣修造塔使從弟舍知行熊州祁梁縣令金銳」
都監修造大德判政法事 啓玄」
檢校修造僧前奉德寺上座 淸玄」
專知修造僧康州咸安郡統 敎章」
同監修造使從叔行武州長史 金繼宗」
同監修造使從叔新受康州泗水縣令 金勳榮」
檢校使阿干前執事侍郞 金元弼」
檢校副使守溟州別駕 金 嶷寧」
專知修造官洗宅大奈末行西林郡太守 金梁博」
勾當修造官前倉府史 金 奇言」
勾當修造官前倉府史 金 朴基」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 해제>
국왕 경응(慶膺)이 무구정탑을 만들고 바램을 기록한 글.
한림랑(翰林郞)으로서 새로이 추성군(秋城郡) 태수(太守)를 제수받은 김입지(金立之)가 국왕의 명을 받아 지음.
듣건대 경전에서 말하기를 공덕을 짓는 데에는 만 가지의 방법이 있지만, 만물에 무한한 이로움을 주는 것은 탑을 짓는 것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생각컨대 국왕께서는 여러 겁(劫) 동안 선행(善行)을 행하셔서 지위가 인간세계와 천상세계에서 으뜸이 되셨습니다. 이제 또한 생명이 있는 존재가 고해(苦海)에 떠다니면서 육도(六途)에 순환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장차 그들을 구원할 길을 만들어 부처의 정토로 이끌고자 하시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이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할 것을 서원하시고서 전국의 匠人 중에 뛰어난 사람을 뽑고, 여러 산의 좋은 돌을 골라 캐어서 여러 층 탑을 만들고 사리를 그 안에 넣었습니다. 공손히 바라건대 이 공덕이 멀리는 하늘이 끝나는 저편 너머까지, 위로는 높고 높은 곳 너머까지 미쳐서 저 꿈틀거리는 모든 영혼들에게까지 이익되고자 합니다. 또한 국왕께서는 영원히 인간세계와 천상세계의 주인이 되시고, 업보가 다하여 돌아가시는 날을 당하셔서는 곡식을 나누어 (보시한) 이름이 가장 높은 자리에 들기를 원합니다.
당(唐)나라 대중(大中) 9년, 을해(乙亥)년 4월 윤(閏)달 일에 세움.
왕명을 받은 수조탑사(修造塔使)는 (국왕의) 종제(從弟)이며 사지(舍知)로써 웅주(熊州) 기량현령(祁梁縣令)인 김예(金銳).
도감(都監) 수조 대덕(修造 大德)은 판정법사(判政法事)인 계현(啓玄).
검교(檢校) 수조 승(修造 僧)은 전봉덕사(前奉德寺) 상좌(上座)인 청현(淸玄).
혜지(專知) 수조 승(修造 僧)은 강주(康州) 함안군(咸安郡)의 군통(郡統)인 교장(敎章).
동(同) 감수조사(監修造使)는 (국왕의) 종숙(從叔)이며 武州長史인 金繼宗.
동(同) 감수조사(監修造使)는 (국왕의) 종숙(從叔)이며 새로 강주(康州) 사수현령(泗水縣令)을 제수받은 김훈영(金勳榮).
검교사(檢校使)는 아간(阿干)으로서 전임(前任) 집사시랑(執事侍郞)인 김원필(金元弼).
검교부사(檢校副使)는 명주(溟州) 별가(別駕)인 김의령(金嶷寧).
혜지(專知) 수조관(修造官)은 세택(洗宅) 대나마(大奈末)로써 서림군(西林郡) 태수(太守)인 김양박(金梁博).
구당(勾當) 수조관(修造官)은 전임(前任) 창부사(倉府史)인 김기언(金奇言).
구당(勾當) 수조관(修造官)은 전임(前任) 창부사(倉府史)인 김박기(金朴基).
[참고2]
<慶州南山の佛蹟>(朝鮮總督府, 1940)
京城의 鮎貝房之進씨 소장의 寫經「無垢淨光大陀羅尼經」 1卷 末尾에는 ‘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라는 銅板에 파서 새긴 글을 雙鉤로 해서 붙이고, 또 金正喜의 글씨라고 인정되는 아래의 識語가 쓰여져 있다.
甲申春, 石工破慶州昌林寺塔, 淂藏陀羅尼經一軸盛銅圓套,
又有銅板一, 記造塔事實, 板背竝記造塔官人姓名,
又有金塗開通元寶錢, 靑黃燔珠, 又鏡片· 銅趺爲鑄寫銅者所壞,
軸面黃絹金畫經圖
甲申은 조선 純祖24년 (1824) 에 해당하며, 昌林寺 石塔을 石工이 파괴하여
陀羅尼經一軸銅圓套入
造塔記銘銅板一 兩面刻字
鍍金開元通寶錢
銅鏡破片
靑黃燔珠
등을 발견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燔珠는 유리로 된 구슬이며, 黃絹金畫經圖란 寫經 卷首의 金泥變相圖를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되지만 이것들이 탑 안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芬皇寺塔 등의 예에서도 흥미있는 일이다. 따라서 銅版은 원래 雙鉤로 새겨진 것 같고 만약 이 模寫本을 가지고 原板의 크기를 추정해 보면 세로 약 24cm, 가로 약 30cm이며, 표면에는 願記를, 안쪽 면에는 造塔과 관계된 官人의 官位名을 열거하고 있다. 탑을 만든 시기는 唐 大中9년, 즉 新羅 文聖王 17년(855)에 해당된다. 그런데 앞서의 陀羅尼經 卷 이하의 것은 이 탑의 1층탑신석 윗면의 둥근 구멍 안에 충분히 넣어지지만 이 동판을 넣을 장소는 찾기 어렵고, 창림사에 이외에 다른 석탑이 있었다는 것도 확실하므로 이 탑을 가지고 文聖王때 건립했다고 속단할 수는 없다. 단지 文聖王 願記에 의해 從弟 金銳이하를 修造塔使로 한 것으로 보아도 結構가 웅대한 이 탑을 제쳐놓고 다른 곳에서 이를 찾는다는 것은 곤란하며, 탑 형식 역시 이 시대로 보아도 무리 없다. 따라서 이 동판은 廉居和尙舍利塔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단독으로 매납되어 제2층 또는 제3층 탑신석 상면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감히 私見을 덧붙여 後考를 기다리고자 한다.